코로나 시대의 여행, 흩어져라... 거기 숲이 있을지니

[여행]by 오마이뉴스

국립 김천 치유의 숲에서 자작나무를 만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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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시작된 조림으로 이루어진 수도산의 자작나무숲. 자작나무의 수령은 20년이 조금 넘은 것으로 보인다. ⓒ 장호철

난생처음으로 자작나무숲을 만났다. 경북 김천시 증산면의 수도산(修道山, 1317m)에서다. 강원도 아닌 경상도 내륙에 자작나무숲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의 자작나무숲을 시청하던 딸애가 스마트폰을 검색한 끝에 김천에도 자작나무숲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였다.

경북 내륙에도 자작나무숲이 있다

그다음 날, 수도산을 향해 떠난 것은 김천농협공판장에 과일을 구경하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였다. 경매가 끝나는 정오까지 기다리는 대신, 내비게이션에 '국립 김천 치유의 숲'을 입력하고 바로 길을 떠난 것이다.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파른 아스팔트 길을 십여 분 땀 흘리며 올랐다. 그때 나는 내 목적지가 도선국사가 창건한 암자 수도암(修道庵)의 이웃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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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교실. 탁자 모양의 큰 돌 주변에 의자로 쓰는 돌들을 배치했다. ⓒ 장호철

거기 들른 게 7년 전인데, 왜 이웃 숲을 알지 못했는가 했더니 숲이 조성된 것은 2016년부터 3년간이다. 국립 김천 치유의 숲은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소속 15개 치유의 숲(산림 치유를 할 수 있도록 조성한 산림), 숲체원(산림교육 전문 휴양 시설) 가운데 하나로 2020년 4월에 개장했다.


'산림 치유'란 "향기, 경관 등 자연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을 증진하는 활동"(누리집)이란다. 굳이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숲이 치유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숲과 나무가 연출하는 정화(淨化)가 산의 고요와 평화와 어우러지면서 다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는 거 아닌가.


2020년의 한국 사회에는 로마자 '힐링(healing)'이 우리말 '치유(治癒)'를 완전히 대체했다. 사람들은 힐링에 쓰인 울림소리가 '치유'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런데도 수도산의 숲 이름이 '치유'라는 게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숲의 관리사무소, 산림 치유 프로그램 공간의 이름은 '힐링센터'였다. '치유의 집'이라고 붙여 '치유의 숲'과 짝을 이루면 좀 좋아, 하고 나는 중얼거리다 말았다.


김천 치유의 숲을 구성하는 시설은 '잣나무 숲 데크 로드'와 '자작나무숲' 등이다. 자작나무숲은 약 7㏊ 크기로 조성된 숲이다. 1993년 인공적으로 조림한 30ha 규모의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 자작나무숲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에게 자작나무를 알리는 데는 과부족이 없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 그리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 백석, 시 '백화(白樺)'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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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는 한대에서 자라는 수종으로 국내에는 강원도와 평안북도, 함경남북도 등에서 자생한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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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는 얇은 데다가 눈부시게 흰빛을 띠고 있는 나무껍질로 영하 2, 30도에 이르는 혹한을 버텨낸다. 보온을 위하여 겹겹으로 만든 껍질에는 기름 성분이 풍부하다. ⓒ 장호철

자작나무는 이 땅에선 그리 친숙한 나무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자작나무숲은 특별한 환상을 선사하는 숲이다. 함경도의 풍경을 노래한 백석의 시 '백화(白樺)' 덕분일까.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자생하고 시베리아에 끝없이 펼쳐진다는 자작나무숲을 떠올려서일까. 어쩌면 그것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우아한 흰빛의 이 아름다운 숲이 환기하는 이국적 정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김천 치유의 숲 자작나무숲은 힐링센터 뒤편에 조성된 숲속 교실과 습지원 그리고 세심정과 자생식물원 등이 펼쳐진 숲길 맨 위에 조성된 숲이다. 이 숲의 조림은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니 산등성이에 곧게 서 있는 자작나무의 수령은 25년쯤 되었겠다.

혹독한 겨울을 하얀 껍질로 버티는 나무

자작나무는 한대에서 자라는 수종으로 국내에는 강원도와 평안북도, 함경남북도 등에서 자생한다. 당연히 남쪽에선 자작나무가 친숙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자작나무는 얇은 데다가 눈부시게 흰빛을 띠고 있는 나무껍질로 영하 20~30도에 이르는 혹한을 버텨낸다. 보온을 위하여 겹겹으로 만든 껍질에는 기름 성분이 풍부하다.


나무가 광합성을 통해 얻는 것은 단당류인 포도당인데, 포도당은 세포와 세포 사이를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그래서 겨울철에도 따뜻한 시간이면 나무 몸속의 물이 활력을 되찾게 되고, 물과 함께 포도당은 쉽게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 물이 얼게 되면, 나무는 생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 포도당을 전분으로 바꾸어 보관하면 포도당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을 수 있는데, 자작나무는 시베리아처럼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포도당을 지질 성분으로 바꿔낸다고 한다. 잘 얼지 않는 전분은 나무의 껍질 쪽으로, 물 분자들은 나무의 안쪽으로 배치하는 것이 바로 자작나무의 겨울나기 준비이다.


자작나무가 한겨울에도 나목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은 이 지질로 된 방한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가지나 줄기를 불에 태우면 전분의 지질(기름) 성분이 타며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편, 이 하얀 껍질은 눈에서 반사되는 열과 태양에서 직접 내리쬐는 복사열을 반사하여 겨울철 줄기 내부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구실도 한다.


종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엔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 대신으로 썼다. 경주 천마총에 있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 무늬 장니(障泥, 말다래로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그것이며, 팔만대장경 일부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대 지방 수종인 자작나무는 대체로 눈밭 속 겨울 풍경으로 기억된다. 순백의 눈 위에 하얗게 속살을 드러낸 자작나무숲은 그 낯설지만, 그만큼 새로운 북국(北國)의 정서를 환기해 준다. 그러나 여름의 자작나무숲도 아름답기는 그에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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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자작나무는 싱그러웠다. 7월의 햇살 아래 “자작나무는 그 눈록(嫩綠) 빛 잎사귀를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장호철

자작나무 껍질의 빛깔을 흔히들 '눈부신 흰빛'이라고 비유하지만, 별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눈부신 흰빛이란 자작나무숲에 쌓인 순백의 눈, 그 빛깔에 걸맞은 표현이다. 자작나무는 흰빛이라고는 하지만 눈빛처럼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착 가라앉아서 보는 이를 차분하게 해 주는 오묘한 빛깔이다.


나무의 하얀 살결은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옹이 자국과 얇디얇은 껍질이 일어나면서 부르튼 주름 때문에 매끄럽지만은 않다. 흠결 하나 없는 매끈한 모습이 아니라 그처럼 무심히 드러낸 성장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자작나무는 우아하면서도 무던해 보인다.


따뜻한 남쪽에선 쉬 볼 수 없지만, 북방에는 자작나무가 흔하다. 개마고원과 평북, 함경도의 산록에 자생한다는 이 나무에서 시인 안도현은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떠나 낯선 땅을 떠돌던 흰옷 입은 백성들을 떠올렸던가. 시인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지린성 옌볜 조선족자치주를 흐르는 이도백하(二道白河)를 건너는 한 떼의 자작나무를 노래한다.

한 떼의 자작나무가 이도백하(二道白河)를 건너고 있다 / 물을 가르는 허벅지들이 하얗다 / 자작나무들은 보퉁이 하나씩을 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있다 / 머리에 인 보퉁이가 클수록 삶은 가난처럼 슬프다 / 어두워지는데 옆모습 희미해진 자작나무들이 두런거린다 / 백 년 넘게 물을 건너느라 발목이 시큰거린다고 - 안도현, '물 건너는 자작나무'

맨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자작나무는 어쩌면 "백 년 넘게 물을 건너"야 했던, '가난처럼 슬'픈 삶을 짐 져야 했던 고단한 사람들을 닮았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북국의 산록에서 자작나무숲을 만나면서 고향을, 거기서 빼앗긴 단란한 삶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여름, 바다 말고 자작나무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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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보이는 것은 모두 숲과 나무다. 비록 고목은 아니었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나무의 바다는 넉넉하고 풍요로웠다. ⓒ 장호철

난생처음, 수도산 치유의 숲에서 만난 여름 자작나무는 싱그러웠다. 7월의 햇살 아래 "살결은 은잔처럼 눈부시고 / 맨발은 흰 뱀처럼 보드라"운(강신애, '나의 자작나무') 자작나무는 그 눈록(嫩綠) 빛 잎사귀를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인적 드문 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새소리가 심화하는 고요와 적막 속에서 나는 땀을 씻으며 꽤 오래 자작나무숲이 이어지는 산등성이에 머물렀다. 나는 완만한 산 아래를 굽어보면서 가을과 겨울의 자작나무숲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산을 오르면서 비 오듯 흐른 땀은 산등성에서 머무는 동안 말랐고, 하산길은 시원했다. 온통 보이는 것은 모두 숲과 나무다. 비록 고목은 아니었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나무의 바다(수해 樹海)는 넉넉하고 풍요로웠다.


7월, 휴가철이 다가오지만, 발길을 붙잡는 건 코로나19 바이러스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바다가 아니라 인적 드문 산으로 가는 건 어떤가. 국립 김천 치유의 숲에 조성된 25년생 자작나무숲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연출하는 침묵의 합창을 들어보는 것은 또 어떤가.

덧붙이는 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김천 치유의 숲에 입장료는 없다. 힐링센터 주차장은 장애인에게만 개방되고 일반 방문객은 산 아래에 차를 대고 10여 분쯤 걸어 올라야 한다. 숲으로 오는 갈림길 반대쪽으로 가면 수도산 청암사의 산내 암자 수도암이 있고, 인현왕후가 폐위된 뒤 3년간 마음을 다스렸다는 유래가 내려오는 인현왕후 길도 있다.

장호철 기자(qq9447@gmail.com)

2020.07.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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