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에 버려진 아이 키운 부부의 끔찍한 최후

[컬처]by 오마이뉴스

[리뷰] 영화 <비바리움>이 던진 불편한 질문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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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틸 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부모가 된 이래로 자식 기르는 일을 헤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고단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나 또한 아이들이 주는 넘치는 사랑으로 힘겨운 나날을 버텨냈던 때가 적지 않다. 아이를 길러본 경험 덕분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나마 넓혀진 것도 같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그래서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물리적 노동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기르는 자와 길러지는 자 양쪽 모두 사랑을 근간으로 좀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가는 성장의 경험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했더랬다.


그런데 여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인간의 사랑기를 쫙 빼고 SF 장르와 버무려 기괴해져 버린 육아와 인생 이야기가 있다. 자식은, 집이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부모의 탈출 수단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길러진 자식은 인간을 모방한 괴물이 된다. 부모의 역할이라는 게 자식을 길러 사회에 내보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오싹한 냉소의 질문들을 날리는 로칸 피네건 감독의 영화 <비바리움>이다.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 내뱉었음직한 가시 돋친 대사들과 상황들이 뜨끔한 기시감으로 영화 여기저기에 넘쳐나 불편하기 그지없다. 비바리움의 사전적 의미는 관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유치원 교사인 젬마와 정원사인 톰은 둘이 살 집을 찾고 있다. 우연히 방문한 부동산 중개소의 중개업자 마틴의 소개로 사방 똑같이 생긴 집들의 단지인 '욘더'라는 주거지역의 9번 집을 둘러보게 된다. 한참 뒷마당까지 소개하던 마틴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뭔가 께름칙해진 젬마와 톰은 서둘러 떠나려 하지만, 차 기름이 떨어지도록 동네를 돌고 돌아도 9번 집 앞으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남자 아기가 든 박스를 발견한다. 박스에 적힌 메시지, "아기를 키우면 풀려날 것이다"를 따라 마지못해 양육을 시작한 톰과 젬마는, 집이라는 덫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먹고, 자고, 일하고, 키우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탁란'으로 자라는 뻐꾸기를 보여준다. 둥지를 만든 어미새는 자기의 알들과 새끼를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죽게 만든 뻐꾸기 새끼를 자기 새끼인 줄 알고 연신 먹이를 주며 키워낸다. 톰과 젬마가 '욘더'라는 곳에 갇혀 박스에 담겨 온 아이를 어쩔 수 없이 키워내야 할 상황을 암시한 장면이겠다. 동시에, 뭔가 특별한 존재인 양 사랑, 성장 운운하는 인간이란 종도 사실은 자연세계의 원리를 적용받는 새와 같은 동물일 뿐이지 않겠냐고 관객에게 던지는 대담한 첫 번째 질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이는 100일도 안 되어 7, 8세 정도의 소년으로 급속하게 성장한다. 소년은 톰과 젬마를 아빠, 엄마로 부르며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그 말투와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톰과 젬마는 소년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채, 푸념의 거친 말과 짜증 섞인 말들을 주로 뱉어낸다. 당연히 소년도 그들의 거친 말과 부정적 감정만을 따라 배울 뿐이다. 그러다 소년은 원하는 게 있으면 다짜고짜 괴성을 질러댄다. 부모가 자녀를 어떤 수단으로 대할 때, 또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자녀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부모인 관객에게 "당신은 자식을 저렇게 키우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가슴 뜨끔한 두 번째 질문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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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틸 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비슷한 상황,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이 떠오른다. 박스에 배달되어 온 아기를 사랑과 인내로 기르는 이야기인 퀜틴 블레이크의 <내 이름은 자가주> 말이다. 자가주의 부모는 아기가 성장하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각종 동물이 되어도 따뜻하게 기다려 준다. 결국 아이는 털북숭이를 거쳐 상냥하고 말쑥한 청년으로 자란다. 비슷한 상황이지만, 인간미를 쫙 빼서 냉혹하게 그려내는 <비바리움>과 아주 대조가 된다.


톰은 어느 날부터 집 앞마당을 곡괭이와 삽으로 파기 시작한다. 탈출을 위한 일말의 희망이 땅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톰이 일에만 몰두하자 점점 고독해지는 젬마는 자연스레 소년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잠자리를 봐주고, 밤 시간 TV 시청 금지 같은 잔소리를 하며 엄마 비슷한 행동을 한다. 톰은 이제 소년에게 더 집중하는 젬마가 서운하고, 둘의 사이는 소원해진다. 이런 상황 또한 낯설지 않다. 으레 아내들은 반자발적으로 떠맡겨진 엄마 역할을 수행하느라 자식 돌보기에 여념이 없고, 남편은 왠지 모를 허전함과 책임감으로 바깥일에만 매진하는 상황이 우리네 삶에서 흔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루어 낸 근원이 되는 연인 간의 사랑도 자식 양육의 과정에서 어차피 퇴색되기 마련이지 않냐는, 생각할수록 마음 아픈 세 번째 물음을 이렇게 던진다.


어느 날 파던 구덩이에서 누군가의 시체를 발견한 톰은 기겁을 하며 그제야 구덩이 밖으로 나오지만 이미 몸이 많이 상해 시름시름 앓게 된다. 일에 평생을 바친 아빠들이 다 늙어진 후에야 가정으로 돌아오듯이 말이다. 반면 젬마는 차가운 어른이 된 소년을 대하기가 점점 두렵다. 어느 날 소년은 현관문을 잠가 젬마와 톰을 집 안에 못 들어오게 한다. 애정 없이 키운 자식이 으레 늙은 부모에게 매몰차듯이 말이다. 이후 영화는 충격적인 결말으로 이어진다.


톰과 젬마에게 집은 부모의 사랑 넘치는 온기 있는 집을 의미하지만, 소년에게 집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냉소적인 껍데기 공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경험에 의해 집이 가지게 되는 전혀 다른 의미, 생각해보면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 가슴 저린 일이다.


비슷한 상황의 <내 이름은 자가주>의 결말은 이렇다. 부모가 어느새 너무도 늙어버려 펠리컨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들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 이 늙은 펠리컨 부모에게 새로 사귄 아가씨를 소개한다. 그리고는 정답게 이야기하며 어딘가로 넷이 함께 걸어간다. 너무나 이상적인 결말일까?


톰과 젬마가 직접 낳지는 않았더래도 눈 마주치며 웃고, 쓰다듬고, 교감하며 사랑으로 소년을 키웠다면 어느 정도 가능한 결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젬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소년의 엄마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낳아야만 부모가 되는게 아니라 함께한 세월만큼 기른 자가 "부모"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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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 마루벌

연인이 되어 둘이 함께할 공간을 찾고, 평생 자식을 길러내는 일이 이 영화처럼 냉혹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실수할 때도 분명 있겠으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대신 목숨을 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사랑을 품고 사는 자들이 부모들일진대 말이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차가운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 이유가 무에 있나.


인간이 비록 동물의 한 종일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실수 속에서 성찰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로칸 피네건 감독이 이 냉혹한 영화를 통해 정말 하고싶은 이야기도 어쩌면 사랑을 품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기 위함은 아니었을지.


이지애 기자(urban07@hanmail.net)

2020.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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