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촬영 중 경찰에 연행... 강제징집에 고문까지

[컬처]by 오마이뉴스

부산영화운동2_영화패 살리라와 영상패 꽃다림


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몇 차례에 걸쳐 한국영화운동에 대해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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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학교 졸업 후 미술운동을 하다 꽃다림을 시작한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과 회원이었던 심정숙 를 제작하고 있는 모습 ⓒ 심정숙 제공

부산 영화운동의 출발과 같았던 부산씨네클럽과 이후로 이어진 씨네마테크 1/24이 새로운 영화와 예술영화를 지향했다면, 이들과는 다르게 사회 변혁운동으로써 영화를 선택한 집단도 존재했다. 시대적 상황을 영화에 녹여내며 영화운동에서 '운동으로써의 영화'에 방점을 찍고 활동한 단체가 있었으니 '영상패 꽃다림'이었다.


부산일보는 1990년 12월 18일자 부산문화결산 기사에서 '부산 유일의 영화운동단체인 영상패 꽃다림은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 구체적인 결실을 맺진 못했으나, 자체이론 공부에 힘쓰는 한편 장편극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 내년을 기대케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영상패 꽃다림이 1989년 말부터 시나리오반을 구성하고 자체 세미나를 통한 전문성 확보와 함께 영화적 기초가 탄탄해지면 극영화제작에도 나선다고 했던 것을 되짚은 것이었다.


운동에 방점을 찍고 영화를 통해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적 변혁을 추구했던 부산 영화'운동'의 특징적인 부분은 타 장르와의 연대였다. 미술을 필두로 한 문화운동이 영화와 결합한 것이었다. 중심인물은 부산대학교 83학번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과 안태영(한국홀덤 이사)이었다.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이 부산대와 동아대, 경성대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면, 영상패 꽃다림은 당시 부산대 학생운동의 역량이 중심이 돼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핵심인물들이 대부분 부산대에서 학생운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영상패 꽃다림'은 부산대학교 영화운동서클이었던 '영화패 살리라'가 바탕이 됐다. 부산대학교 문화 운동이 토대 역할을 한 것이었다. 숨소리문학회(문학), 미술공동체(미술)와 사전 협의를 거쳐 같은 시기 만들어진 '영화패 살리라'는 부산대학교에 있었던 풍물, 국악, 마당극, 연극 장르의 문화패가 연대하여 생겨난 학생운동 서클의 하나였다.


1985년 9월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안태영을 중심으로 이영택과 졸업생이었던 허현숙 등이 참여했다. 부산대학교에는 영화연구회가 있었으나, 영화를 통한 사회변혁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영화패 살리라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

촬영하다 백골단에 연행

1985년은 2.12 총선의 야당 승리로 전두환 군사독재 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서 학생운동이 거세졌던 때였다. 부산대학교 '마당놀이패 풀이'에서 활동하던 안태영은 부산대 활동 책임조직의 권유로 총학생회 활동도 병행하고 있었다.


안태영은 "당시 부산대학교에선 문화운동의 전성기라고 불릴 만큼 문화운동이 융성하던 시기었다"면서 "양산박 패거리라고 불리웠던 민요연구회 한소리패, 노래운동 소리터, 전통예술연구회, 마당놀이패 풀이가 운동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해 5월 부산대학교 넉넉한터에서 열렸던 문화운동패 연합공연 '벌거벗은 임금님'은 5천 명이 공연 관람 후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활동의 풍토속에서 85년 초가을 부산대 선배로 부산씨네클럽 회원이었던 박수경을 만나서 문화운동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기간제 교사로 있던 졸업생 허현숙씨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안태영은 "부산대 후문 쪽 포장마차에서 허현숙을 처음 만났는데, 대중들이 친숙한 매체인 영화로 사회가 변혁될 수 있는 운동을 해보자고 했고, 이야기는 쉽게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1985년 9월 서클을 만든 후 10월 회의를 통해 '영화패 살리라'로 이름을 정했고 대표는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았던 안태영이 맡게 된다.


이에 대해 허현숙은 "부산씨네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수경이 운동적 일에는 겁이 나서 내게 연결시켰다"면서 "1985년 대학을 졸업한 후였으나 '영화패 살리라'가 단편영화를 제작을 준비할 때 기획단계부터 촬영과정까지 참여했고, 가장 중요한 동료였다"고 회상했다.


영화패 살리라는 초반 영화감상회 등을 진행하다가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운동권에 반향이 컸던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각색한 대본으로 제작에 돌입한다. 1984년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에 연루돼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유시민은 당시 변호를 맡은 이돈명 변호사의 권유로 1985년 5월 직접 항소이유서를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했고,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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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맨 앞이 오석근(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왼쪽 첫번째 강기표, 두번째 허현숙 ⓒ 허현숙 제공

하지만 제작만 결정했을 뿐 카메라도 필름도 없었기에 쉽게 진행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허현숙이 1984년 부산씨네클럽에서 8mm 단편영화 <반지>를 만든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오석근(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안태영은 "부산씨네클럽 회원이기도 했던 허현숙과 박수경의 소개로 오석근을 만나면서 8mm 카메라를 빌릴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필름구입비는 허현숙이 사비를 털었고 문화운동을 하던 안태영의 후배들을 동원해 촬영에 돌입하게 된다. 시나리오는 공동작업으로 했고, 연출 안태영, 촬영 허현숙이었다.


그런데 영화에 들어갈 시위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허현숙이 경찰에 연행되는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 허현숙은 부산대 시위현장에서 잡히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카메라 1대로 안태영은 시위대 안에서 반대편 경찰이 최루탄을 쏘는 모습을 핸드헬드로 담았고, 나는 밖에서 카메라를 달라고 해 받은 후 롱샷이나 전체장면으로 시위현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8mm 카메라로 부산대 시위현장을 찍던 일이 한 번도 없었던 일이어서, 바로 체포조인 백골단에 잡혀서 연행된 것이다. 경찰은 내가 졸업생이다보니 북한에 시위영상을 주려한 것이라며 외부인이 개입한 아주 큰 사건이라고 협박했다. 경찰에서 크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공안 조작사건이 비일비재했던 현실에서 자칫 경찰이 사건을 확대시킬 경우 8mm 카메라를 빌려준 오석근은 물론 부산씨네클럽도 소용돌이에 휩싸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부산대 교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게 된다.


"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친구 박수경으로부터 들은 지구과학과 학과장님이 곧바로 경찰서로 찾아오셨다. 학과장님이 경찰에 '재학 때 운동하던 학생이 아니고 학과 차석으로 졸업하고 충실하게 학교 생활한 학생이다. 내가 모든 책임 다 질테니 데리고 나가게 해달라'고 해서 바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허현숙은 당시 연행된 후 "예술영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후배들 촬영을 도와주려고 왔지 시위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강조했는데, 알리바이를 강조하기 위해 김지석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부산 프랑스문화원에 보관돼 있던 부산씨네클럽 활동하면서 찍은 단편영화 <반지>와 자료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적 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던 탓에 김지석은 다소 겁을 먹은 듯 "너를 위해 배려를 할 수는 없고, 부산씨네클럽을 안다고 하지 말라"고 했고, 이 때문에 "김지석 반응에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된 이후 아시아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가장 앞장섰던 싸웠던 김지석이 1980년대 부산씨네클럽에 활동했을 당시에는 정치 사회적 문제의식이 많지 않았음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다.


풀려난 허현숙은 다시 안태영과 만나 영화제작을 이어간다. 감옥씬을 촬영했는데, 장소는 안태영의 자취방이었다. 안태영은 "조명으로는 자취방의 스탠드 3개에 100W(와트) 전구를 끼우고 사용했고, 자취방의 벽지를 뜯어내고 감옥 세트로 쓰는 열악함 속에서 촬영하다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호되게 혼나는 경험도 했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촬영은 마무리됐으나 후반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번엔 안태영이 잡히게 된다. 1986년 3월 부산대학교 삼민투가 주도한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됐고 곧바로 강제 징집당한 것이다.


안태영은 "갑작스런 징집에 영화패 살리라의 활동은 거기서 멈췄다"며 "입대 당일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갔고 이틀간 학내 문화활동과 영화패 살리라에 대한 조사를 받으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나마 "훈련소에서 민요연구회 한소리패 회원이었고, 3월 시위를 주도한 부산대 삼민투 위원장 민경수를 만나 서로에게 큰 위안이 됐다"고 덧붙였다. 주동자였던 민경수 역시도 3월 시위로 연행된 후 곧바로 전두환 군사독재에 의해 강제 징집된 것이었다.

미술운동단체 '그림패 낙동강'

'영화패 살리라'는 공중분해 됐지만 같은 시기 만들어진 부산대학교 운동 서클 '미술공동체'는 건재했다. 1986년 당시 4학년이었던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이 이끌고 있었다. 미술운동을 지향했던 황의완은 1986년 3월 시위 때도 연행됐다가 풀려났으나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결국 2학기에 제적된다.


이후 1987년 전두환이 기존 헌법대로 대통령선거를 치르겠다는 4.13 호헌조치 발표 이후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정리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다.


경찰에 검거된 것은 6월 항쟁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던 6월 10일 직후였다. 부산대 관할 경찰서가 아닌 대공분실로 추정되는 곳으로 끌려갔는데, 노태우의 6.29 선언 직후에 풀려날 때까지 20일 정도 갇혀 있어야 했다.


황의완은 "당시 갇혀있던 게 지금껏 상당한 트라우마로 작용한다"며 "선배들의 권유로 성명을 정리하고 발표했음에도 정작 풀려났을 때는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고 다들 뒤로 빠져 서운함이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던 황의완은 부산 최초의 사회 미술운동 동인 그룹이었던 '그림패 낙동강'에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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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냔 부마민중항쟁 10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그림패 낙동강의 걸개그림 '부마항쟁' ⓒ 그림패 낙동강

배인석(화가, 전 민예총 사무총장)의 글 '부산민족민중미술운동사'에 따르면 '그림패 낙동강'은 부산에서 조직적인 사회 미술운동 활동의 필요성과 지역운동에 기반을 둔 민족자주문화의 건설에 공감한 부산 미술가들이 결성한 것으로, 1987년 봄 5개월 정도의 논의를 거쳐 1987년 9월 26일 남포동 백색화랑에서 창립 전시회를 연다.


회원은 구자상, 곽영화, 김상화(부산어린이청소년영화제 집행위원장), 권산, 황의완, 김황수, 정재명, 이상적, 김을중, 허창수 등이었다. 이들은 창립 전시회 이전에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개최한 통일문화제에 부산지역 최초의 조직적 창작물인 '한국민중100년사' 전시회를 개최했고, 1987년 8월에는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에 곽영화 회원을 파견하여 장례용 걸개그림과 영정을 제작하게 하는 등의 선행 미술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황의완은 "창립 전시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정현 감독의 애니메이션 <반쪽이> 상영을 보게 됐고, 그게 더 매력 있다고 생각해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방향을 잡았다"며 "애니메이션을 배우기 위해 최정현의 신혼집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최정현 감독은 서울영상집단에서 활동했던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과 부부다.


꽃다림은 이때 만들어지게 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쪽에 관심이 있던 황의안의 주도로 '그림패 낙동강'의 소모임 형태로 생겨난 것이었다. 이듬해인 1988년 8월에는 '그림패 낙동강'에서 '생활미술공방 꽃다림'이 분리된다.


독립한 꽃다림이 영상 쪽으로 힘을 받게 된 것은, 1988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주도한 남북학생회담 추진이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김중기(배우)의 제안으로 추진됐던 남북학생회담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 통일운동의 시발점이었다.


황의완은 남북학생회담 통일선봉대에 참여해 전남대, 한남대 등을 따라다니며 이들의 활동을 촬영하게 되는데,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집됐던 안태영과 민경수 등이 복학해 꽃다림에 합류하게 된다.


안태영은 "1988년 6월 민경수와 같은 날 제대를 했고, 8월 부산 수산대(현 부경대)에서 열렸던 민족해방제로 기억되는 집회에서 황의완을 만났다"면서 "당시 황의완이 꽃다림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업무량이 많아 일손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마침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민경수와 합류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곧바로 부산대 한소리패 출신 강주완(노무현재단)과 마당놀이패 풀이 출신 심정숙(부산시 교육청)이 합류했다"고 덧붙였다.


심정숙은 "당시 대학 4학년이었는데, 1988년 8월 부산 수산대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온 문화패 선배인 안태영(마당놀이패 풀이), 민경수(한소리패)를 만났고 함께 문화운동을 계속했던 것이다"라며, "황의완(미술공동체) 선배도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상패 꽃다림 활동을 같이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이 합류해 완성한 작품이 통일선봉대의 활동을 담은 31분 다큐멘터리 <가자 통일을 향해>였다. 안태영은 "대학가 순회 상영의 반응이 뜨거웠다"며 "이에 고무된 회원들이 고 양영진 열사 다큐 <진달래꽃 넋으로 살아>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투표를 거쳐 '영상패 꽃다림'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12월 19일 생활문화운동단체에서 영화운동단체로 전환한 영상패 꽃다림 대표는 안태영이 맡았다. 총무는 심정숙이었다. 영상패 꽃다림은 당시 부산 유일의 영화운동단체였는데, 부산지역 최초 독립영화단체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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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시월영화제 자료집 ⓒ 낭희섭 제공

영상패 꽃다림은 1989년 10월 부산민족예술대동굿 참여행사로 마련됐던 '시월영화제'를 통해 고 양영진 열사의 죽음을 다룬 8mm 영화 <진달래꽃 넋으로 살아>(44분)와 장산곶매 및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 에서 제작한 영화 등 7편을 상영했다.


양영진 열사는 1986년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부산대 문학동아리 연합체를 결성했고, 군부독재에 반발해 1988년 대학생 군사 훈련의 일환인 전방 입소를 거부하는 투쟁을 벌였던 운동권 학생이었다. 이로 인해 보복성 입영통지서를 받아 집에서 부대로 출퇴근하는 단기사병으로 입대했으나, 10월 10일 조국 통일, 반미 자주, 군 자주화를 염원한 유서를 남긴 채 교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의완은 "1988년 당시 부산대에서 열린 양영진 열사 장례식 때 문익환 목사님이 오셨다"며 "<진달래꽃 넋으로 살아>는 앞부분이 다큐멘터리고 뒷부분은 극영화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영상패 꽃다림의 주요 활동은 영화제작과 배급, 문예 활동 기록, 영화 강좌 등이었다. 전교조 결성 시기 시위에 참여했다 백골단의 폭력에 크게 다친 부산교대 학생에 대한 다큐 <이경현 양> 등 2편의 8㎜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들은 10여 편의 비디오 작품과 함께 대학가와 시위현장에서 주로 상영됐다.


최진호(감독, <집행자> 연출)는 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하면서 1989년 부산교사들의 전교조 결성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전교조결성투쟁기 (1989년)>, 1991년에는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 장례투쟁을 담은 <죽음을 넘어 노동해방으로>(1991년)>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계 현안에도 나서서 연대했다. 1989년 UIP 직배 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해 부산 서면과 광복동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89년 3월 10일 부산일보에 따르면 영상패 꽃다림과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등 회원 100여명은 10일 10시 서면 동보극장과 광복동 푸른극장 앞에서 미국 UIP 직배 영화 상영 취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부산일보는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대미 불평등 계약인 UIP 직배 철회와 민족영화 제작을 위한 영화인 각성, 반민주악법 검열 폐지 등을 요구했고, 꽃다림 대표 시리즈물 상영은 한국민의 우민화와 극우 이데올로기 및 백인우월주의를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시위에 나섰던 최진호(감독)는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에서 동원해 간 것이었는데, 농성하다 다 잡혀서 부산진경찰서 유치장으로 갔고 그날 밤인가, 다음 날 아침에 풀려났다"면서 "그때 같이 잡혀간 극단 자갈치의 선배가 조서 쓸 때 형사가 '근데 UIP가 뭐냐'고 물었는데 그 형이 모른다 해서 내가 알려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서울 영화운동과 연결시킨 허현숙

영상패 꽃다림이 존재감을 과시하게 된 것은 1989년 2월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 덕분이었다. 민주열사 관련 다큐멘터리 3편 정도의 제작을 마칠 즈음, <오! 꿈의 나라>가 개봉하면서 부산 경남지역 배급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제작과 배급을 맡았던 낭희섭은 "황의완이 서울에 올라와 러시필름을 보고 판권료 100만 원을 지불했다"고 말했다.


<오! 꿈의 나라>는 경성대 총학생회의 도움을 받아 1989년 2월 4일~12일까지 부산대 효원회관과 경성대 학생극장(콘서트홀)에서 상영했다. 황의완은 "서울은 대학교 밖에서 상영했으나 부산은 대학 교내 상영이 특징이었다"며 "직접 포스터를 만들어 서면과 남포동을 다니며 붙였는데, 저녁 9시 뉴스에 <오! 꿈의 나라> 탄압에 대한 소식이 나오면서 앉아서 홍보가 크게 됐다"고 회상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몰려들면서 좌석이 부족해 입석으로 관람할 정도였다. 경찰의 방해에 대비해 대학생들과 사수대까지 조직했으나 다행히 경찰의 침탈은 없었다. 당시 부산에서 구정(설날) 전후 4일 동안 3천만 원의 수익을 냈을 만큼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장산곶매는 부산의 흥행 소식에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오! 꿈의 나라> 상영 수익 덕분에 남포동 부산데파트에 있던 꽃다림 사무실은 연산동에 신도극장 인근으로 옮겨온다. 40평의 넓은 공간이었고 카메라와 편집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16mm 필름에서 비디오 촬영으로 전환한 시점이었다. 이후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와 <닫힌 교문을 열며>도 부산 배급은 영상패 꽃다림이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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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씨네클럽에서 8mm 단편영화 촬영 당시의 허현숙(왼쪽 첫번째) ⓒ 허현숙 제공

영상패 꽃다림이 장산곶매 등 서울 영화운동 단체들과의 연결될 수 있었던 데는 허현숙의 역할이 있었다. 부산의 영화운동에서 허현숙이 주목받는 이유는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던 씨네클럽뿐만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했던 영화패 살리라와 영화패 꽃다림에 모두 관여했기 때문이다.


부산의 영화운동에서 부산씨네클럽, 씨네마테크 1/24, 영상패 꽃다림을 모두 아우른 것은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었지만 부산대 영화연구회, 부산씨네클럽, 영화패 살리라, 영상패 꽃다림을 넘나든 허현숙의 역할도 결코 작지 않았다.


황의완에 따르면 허현숙을 통해 1988년 이효인(영화평론가)과 홍기선(감독) 등을 만나 인사하게 됐고 이들을 꽃다림의 운동 선배로 예우하면서 3세계 영화와 우카마우 집단 등의 영화 운동 자료들을 받는 등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허현숙은 "영상패 꽃다림 공간에서 황의완을 처음 만났다"며 "서울 장산곶매와 영화마당우리, 바리터 등의 모임활동에 대해 생생하게 전하며 연결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부산대 81학번인 허현숙은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1980년대 재학 시절 금서로 지정돼 출판이 금지됐던 김지하의 <오적>을 누군가가 필사한 책으로 읽으며 당시 대학생들처럼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 부산대 영화연구회와 부산씨네클럽에서 활동했던 이진수(건축가)는 "김지석 형과 나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약했는데, 허현숙은 우리와는 다르게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광이었던 허현숙은 대학에 입학해서는 선배인 김지석과 함께 부산대 영화연구회 활동을 가장 열심히 했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부산씨네클럽에서 활동할 때는 8mm 단편 <반지>를 연출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5년 부산과 마산의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다가 1986년 오석근의 요청으로 충무로 스크립터 일을 배우기 위해 충무로로 향한다.


오석근은 "당시 부산 경상전문대 지청언 감독이 부산에서 극영화를 제작한다고 해서 영화 현장을 배울 목적으로 조감독으로 들어갔고 그 작품이 1986년도 제작된 <천사, 늪에 잠들다>였다"며 "이때 허현숙이 스크립터를 맡았고, 서울에서 후반 작업할 때 같이 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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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정성진(장산곶매), 이언경(영화공간 1895), 허현숙(영화마당우리) ⓒ 허현숙 제공

1986년 서울에 올라온 허현숙은 부산씨네클럽을 통해서 알게 된, 당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부산 출신 최사규(감독)를 통해 영화마당우리에 대해 듣고 가입하게 된다.


허현숙은 "영화마당우리에서는 김영진(명지대 교수, 영진위 부위원장), 문명희, 김윤태(감독) 등과 친하게 지냈고 이언경(작고)은 부산 출신이라 가까웠으며, 같은 공간에서 자주 보던 홍기선(감독)과도 알고 지냈다"고 말했다. 또한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도 하고 여성주의 영화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모인다고 해서 갔다가 문명희 선배와 함께 바리터 결성에도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마당우리, 바리터 활동과 더불어 당시 자주 어울려 지내던 장산곶매 회원들과도 가까워지면서 서울과 부산의 영화운동가들이 연결된 것이다.


허현숙은 "장산곶매의 오정옥(촬영감독), 정성진 등과 친했고, 1986년 9월 1일 자로 서울에 발령이 나서 교사로 임용돼 전국교사협의회 활동을 하다 이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면서 적극 가담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전교조 참여로 해직됐지만 전교조 내부의 결정에 따라 6개월 지나 복직하게 됐고, 전교조 활동은 이후 1992년 <닫힌 교문을 열며> 제작 때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된다.


허현숙은 "급박한 변화 속에 학교 현실에 대해 시나리오 단계에서 사전취재를 도와줬다"며 "촬영과정에서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가 쏟아붓는 가운데 해직교사와의 이별에 몸부림치는 학생들이 필요하다는 이재구(감독)의 요청을 받고 친하게 지내던 인근 고등학생들을 모아서 보조출연자로 나서게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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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장면 ⓒ 장산곶매

이어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교사 왼편에 선 여학생은 배우였고 오른쪽 키큰 남학생은 보조 출연자로 실제 해직교사들을 지키고자 했던 열혈학생으로 기억한다"면서 "겨울에 비를 맞는 마지막 장면을 찍고 오들오들 떨며 들어오는 아이들을 수건으로 닦기 위해 뛰어들던 시간이 생각난다"고 덧붙였다.


허현숙은 부산씨네클럽과 영상패 꽃다림을 넘나든 것에 대해 "처음에는 대학 4학년 내내 예술영화를 추구했지만, 변혁운동 차원으로서의 영화에 공감하면서 동참하게 된 것이었다"며 "부산씨네클럽은 순수예술영화에만 심취하고 열정에 넘쳤던 시절이었으나. 영상패 꽃다림과 안태영 등과의 인연은 강렬한 운동가와 혁명가의 아우라에 예술적 끼를 느낄 수 있던 시기였다"고 비교했다. "장산곶매 정성진과 영화마당우리 이언경, 김윤태를 부산 꽃다림 사무실에 안내했었는데,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고 추억했다.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결성

영상패 꽃다림은 1989년 3월 문화 장르별 협의체로 결성된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초대 의장 부산대 채의완 교수, 현 부산민예총)에 참여해 영상을 담당한다. 당시 참가 단체는 놀이패 일터, 극단 새벽, 극단 자갈치, 부산미술운동연구소, 풍물패 만판, 노래야 나오너라 등이었고, 참관 단체로 남산놀이마당, 부산민요연구회, 민족춤패 춤누리 등이 있었다.


1990년에는 '동학 100주년 기념행사'및 각종 마당극과 한마당 등의 문예 활동을 비디오로 기록했고, 다른 부문의 문화 운동과 연계한 창작 활동에도 참여했다. 1991~1992년에는 대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강좌를 개설해 16㎜ 필름을 중심으로 한 영화제작의 이론과 실습을 교육했다.


이를 위해 1992년 상영공간을 갖추고 영화 감상, 영화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지도는 당시 경성대학교 영화학과 학과장이던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 맡았다. 황의완은 "이용관이 '영화보기와 영화읽기'라는 강좌프로그램을 오래 이어갔다"며 "<전함 포텐킨>, <졸업>, <버드> 등을 비디오로 보여주며 설명했는데 내용도 알찼고 상당히 수준 높은 강의였다"고 말했다.


1985년 부산씨네클럽의 지도교수를 담당했던 이용관이 씨네마테크 1/24에 이어 영상패 꽃다림 활동까지 도운 것이었다. 이용관은 "학교 강의에 여유가 있어 특강을 많이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황의완은 "연산동 사무실에 이용관이 자주 찾아왔는데,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고 회상했다.


영상패 꽃다림에서 3기에 걸쳐 진행된 영화학교는 독립영화를 위한 인력을 양산하고 독립영화 운동의 전개 방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0여명의 참가자들이 2회에 걸친 워크숍을 통해 10여편의 작품을 완성했는데, 김재준(전 부산영화영상산업협회 사무국장), 안형국(영상장비)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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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패 꽃다림 회원이었던 김재준(전 부산영화영상산업협회 사무국장) ⓒ 심정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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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마당우리 워크숍 당시 촬영현장. 오른쪽 아이 안고 있는 최낙용(제작자). 맨 앞 정윤철(감독) ⓒ 최낙용 제공

영화운동단체로서 부산지역 내 민주 단체 지원과 연대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는 1990년 12월~1991년 2월 사이에 '임투 문화학교'를 운영했다. 1991년 상반기 임금협상투쟁을 준비하는 당시 부산 양산지역 노동조합 문화부장과 문화패 등 노조 문화활동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강좌가 개설됐는데, 꽃다림은 영상반을 운영한다. 이때 연극을 지도했던 강사가 최낙용(프로듀서, <노무현입니다> 제작자)이었다.


최낙용 역시 부산의 영화운동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1989년 부산민족문화운동동협의회가 공식 결성되면서 부산 문화운동을 대표했지만 이미 1987년부터 비합법단체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최낙용도 1987년 전후로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를 오가며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영상패 꽃다림 활동에 관여했기에 회원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최낙용은 "1988년 영상패 꽃다림이 생겨났을 때부터 왕래를 하고 지냈으며 어떤 일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회원이었다고 할 자격은 없는 것 같다"며 "꽃다림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연극 쪽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연극을 중심으로 문화운동 쪽에서 활동하던 최낙용은 1990년 초 서울에서 열린 영화마당우리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영화 쪽으로 한 발 더 내딛게 된다. 당시 워크숍은 계간지 <영화언어>와 시네마테크 '영화공간 1895'에서 활동했던 이언경이 주관했고 김형구 감독이 강사였다.


최낙용은 "8mm 단편이 대세이던 시절에 16mm 단편제작을 했고, 같은 조에 당시 대학 신입생 정윤철(감독), 바리터에서 활동했던 강미자(편집감독),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촤광석(제작자) 등이 있었다"며 과 삼선교 쪽 폐허 같던 재개발 지역에서 촬영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덧붙였다.


최낙용은 1992년 대선 당시 백기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 소속으로 부산 영남 유세 기획책임을 맡았고 부산 유세 사회를 맡기도 했다. 이후 1993년 김영빈 감독 <테러리스트>의 짧은 객원 연출부에 이어 1994년 김성수 감독 <런어웨이> 연출부로 충무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구호만 있고 예술성 없어 고민

황의완도 1989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충무로에서 연출부 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는 영화운동이 비제도권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충무로라는 제도권으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였다. 꽃다림의 초기 맴버들이 영화공부 등을 목적으로 상업영화계와 방송계로 진출하던 시기였다.


황의완은 "충무로에 간 것은 영화에 데한 고민 때문이었다"며 "우리가 만든 영화는 보는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구호만 있고 예술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정지영 감독 <남부군>과 <하얀전쟁> 연출부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인연으로 영화학교 때 이충직(교수, 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카메라와 앵글에 대한 강의를 해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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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패 꽃다림 회원들. 왼쪽부터 이수빈, 왕성국, 김은희(후원자), 심정숙, 안태영, 민경수. ⓒ 심정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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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한 최진호(감독) ⓒ 최진호 제공

영상패 꽃다림은 1992년 이후 회원들이 하나둘 다른 진로를 찾기 시작했고, 1995년까지 유지된다.


최진호(감독, <집행자>)는 "1992년에 영상패 꽃다림에서 나온 후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거기에서 꽃다림 활동을 같이했던 양진일을 만났다"면서 "함께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영상분과 활동을 하며 현대지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울산, 마창 중심의 노동현장을 촬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에 결합해 전국 순회를 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1993년 여름에 노동자문예창작단을 탈퇴하고 충무로 영화계로 들어간 것"이라고 회상했다. 노동자문예창작단은 당시 '가자 노동해방' '철의 노동자' 등 노래를 발표하며 민중운동 진영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안태영은 "1989년 시작부터 1992년 6월까지 대표를 맡은 후 SBS 피디로 입사하게 됐다"며 "총무 심정숙과 민경수를 비롯해 2기 회원으로 들어온 이수빈, 최진호, 구현모, 황윤식, 왕성국 등이 꽃다림을 7년간 유지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부산지역의 거의 모든 시위와 행사를 촬영했고, 운영비 조달을 위하여 주말마다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심정숙은 1990년에 영화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울로 향한다. 1990년 12월 출판사 한길사가 설립한 한길예술연구원에서 영화감독 양성코스인 '영화예술반'(일명 한길영화아카데미)을 개설할 때 입학했던 것이다.


당시 강사는 민족영화연구소장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영상자료원장), 강한섭(서울예대교수), 주진숙(영상자료원장) 이장호(감독), 유현목(감독), 임권택(감독), 장선우(감독), 안성기(배우) 등이었고, 영화개론, 영화사, 촬영론, 기술론 등을 가르쳤다,


심정숙은 "한길예술연구원 수료 후 1991년 SBS 피디로 있는 안태영 선배의 추천으로 스크립터로 입사했다"며 "서울에서도 계속 안태영, 민경수, 이수빈 등과 함께 골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 제작을 시도했으나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후 안태영, 이수빈 등과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1994년 공연기획사 '한빛기획'을 설립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뮤지컬 부산공연을 기획하고 번 수익금으로 베타(Beta) 카메라(당시 4천만 원)를 구입하는 등 계속 영화제작을 모색했다"면서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로 인한 불황으로 '한빛기획'을 접고 각자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1995넌 영상패 꽃다림 활동을 마무리한 황의완은 "대학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있으니 정리해도 될 시점이었고, 결혼한 상태에서 수입 없는 일을 하기 어려웠다"면서 "보유하고 있던 비디오는 분량이 많아서 전교조로 넘겼다"고 말했다.


이어 "꽃다림이 7년 정도 활동하면서 각 대학 영화동아리에 자극제 역할을 했다"며 "부산대 안에 영화운동 동아리 '새벽별'이 만들어졌고, 부산공업대 등 부산지역 대학의 영화동아리 결성을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은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 안태영(한국홀덤 이사), 민경수(애니메이션 회사 이사), 허현숙(전 교사, 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심정숙(부산시 교육청), 이수빈(서대문50+ 센터장), 김재준(전 부산영화영상산업협회 사무국장), 황윤식(부산영화협동조합), 왕성국(변호사), 최진호(감독), 양진일(광고대행사 대표), 허수경, 강주완(노무현재단) 등이다.

기록영화집단 하늬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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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설립된 하늬영상 회원들과 대표를 맡은 조성봉 감독(뒷줄 가운데) ⓒ 조성봉 제공

1995년 이후 부산 영화운동에서 주목받은 것은 1994년 4월 19일 만들어진 조성봉(감독)의 '기록영화집단 하늬영상'이었다. 부산대학교 81학번이었던 조성봉은 1982년 제적된 뒤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으로 들어가 1990년까지 10년 정도 활동한다. 이후 군 복무와 결혼 등으로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1993년 영화로 뛰어들었다.


조성봉은 노동운동 당시 공단 쪽에 있던 도서원에서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도서원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부산에서 생겨난, 책을 매개로 한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문화 공간이었다. 함께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동자들에게 영상운동을 제안했고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결합하면서 하늬영상은 시작됐다. 조성봉은 "영화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이 각자 시나리오, 음악, 그래픽 등을 공부하면서 영화를 만든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성봉은 주로 씨네마테크 1/24과 협력했으나 제작했던 작품 주제는 1950년대 남한 빨치산과 제주 4.3항쟁, 5.18 광주항쟁 등이었다. 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첫 다큐멘터리 <레드헌트>(1997)는 한국영화 최초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당시 경찰은 "조성봉이 적어도 사회주의자이고 그래서 북에서 주장하는 똑같은 논리로 4.3항쟁을 미군정과 이승만의 분단정책에 반대해서 봉기한 정당한 항쟁으로 표현했다"며 영화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한다. 구속영장이 신청됐고 영장 발부는 당연 수순으로 보였으나, 영장실질심사가 도입된 초기였던 탓에 반전이 일어난다.


조성봉에 따르면 당시 영장담당판사가 4.3사건이 정당한 항쟁이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고, 학살의 책임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있냐고 묻는 것에도 그렇다고 답했다. 결국 이렇게 대답한 게 기소장에 적힌 혐의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됐고, 경찰이 영화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는 데다, 딱히 다른 데 갈 곳이 없어 도주의 우려도 사라지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불구속이 된다.


다만 이후 영화를 상영했던 인권영화제 서준식 대표가 구속되는 사태로 인해 파장이 컸다. 1986년 홍기선과 이효인이 구속된 '파랑새 사건' 이후 영화로 인해 공안당국의 탄압을 받은 두 번째 사례였다.


씨네마테크 1/24 대표를 지낸 우정태는 부산독립영화협회가 펴낸 <부산독립영화론-독립영화 계보 그리기, 첫줄>(2004년 발간)에서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가 사회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대안적인 미학에 대한 강박적인 충동으로 시작돼, 사회적인 맥락으로 1980년대 촉발된 한국독립영화와 차이가 있었으나, 조성봉이 운동으로서의 영화에 중점을 두며 이 같은 문제점을 메워나갔다"고 평가했다.


<레드헌트> 제작에는 기획을 맡았던 류위훈과 촬영을 담당한 정기평 외에 부산씨네마테크 1/24 대표를 지낸 양정화(프로듀서, 해밀픽쳐스 대표), 성균관대 영상촌에서 활동했던 임유철(감독)이 참여했다. 후속편인 <레드헌트2>(1999)에는 박미경(콘텐츠큐레이터)이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조성봉과 하늬영상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1999년 노동영상집단 공장으로 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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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 자갈치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양종곤(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 ⓒ 극단 자갈치 제공

영상패 꽃다림은 아니었으나 양종곤(프로듀서, 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도 1990년대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산하에 있던 극단 자갈치에서 활동하면서 부산의 문화운동 흐름에 동참했다.


1990년 부산대 문화패 연합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이 전개되던 현장에 동아리 회원 3명과 누비며 취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4년 군에서 제대한 후 1995년에는 부산대 총학생회 문화국장을 맡게 된다.


양종곤은 "1996년 극단 자갈치에 들어가 3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고, 1999년 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했던 최진호(감독, <집행자>) 소개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박헌수 감독이 연출한 <주노명 베이커리> 제작부에 들어와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영화로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생소해 '씬'이나 '컷'도 잘 몰랐다"고 회상했다.

영상은 민중미술 표현 위한 제 2의 도구

김상화(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집행위원장)는 황의완처럼 미술운동에서 영화로 전환한 경우였다.


1987년 6월항쟁 이전 '시월의 소리'라는 미술운동 단체에서 활동했고 '그림패 낙동강'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해 1992년까지 몸담았으며,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활동에도 적극 연대했다. 1994년에는 애니메이션을 통한 사회번혁 운동을 지향했던 '단편 실험 애니메이션 디지아트'를 만들어 30여 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김상화 연출 <꿈꾸는 날>(1996), <처용암>(1997) 허병찬 감독의 <도시인>(1997)과 <바람소리>(2000), 최민규 감독의 <잃어버린 것들>, 이태구 감독의 <유죄>(1999) 등이 만들어졌고, 이들 작품들은 해외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초청됐다.


1996년 부산예술대학교 교수가 된 김상화는 1999년 설립된 부산독립영화협회 2대 대표를 맡은데 이어, 2005년부터 부산어린이청소년영화제를 출범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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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초기 해외게스트를 맞이하고 있는 김상화 집행위원장 ⓒ 비키 제공

김상화는 2012년 부산대학교 학보 '부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중미술을 표현하기 위한 제 2의 도구로써 영상을 택했고, 민중미술을 굳이 회화로 규정짓지 않는다"며 "소통 도구는 회화에서 영상으로 변화했다. 영상이라는 매개로 신세대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장이 열리고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산의 영화운동은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힘을 받아 1999년 부산독립영화협회 창설 등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엉화에 대한 갈증으로 예술영화의 대중화를 추구했던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은 부산독립영화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인력의 배출구로써 역할을 하게 된다. 영상패 꽃다림 회원 중 영화를 선택한 사람들은 부산보다는 주로 충무로로 진출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영화를 추구했던 '영화'운동과 민족영화, 민중영화를 추구했던 영화'운동'은 부산독립영화협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전해 간다. 부산독립영화협회 초대 회장을 이성철(감독)과 함께 조성봉(감독)이 공동으로 맡았고, 2대 회장을 김상화가 이은 것은, 1984년 이후 전개된 다양한 부산 영화운동의 흐름을 잘 흡수해 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하훈 기자(doomehs@gmail.com)

2020.08.1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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