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가 성소수자 연기를 하는 모습이 필요한 이유

[컬처]by 오마이뉴스

[리뷰]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던져준 두 가지 생각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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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레이가 한 말처럼,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액션 영화 광인 남편의 성화와, 배우 박정민 팬인 딸애의 부추김에 못 이겨 영화관을 찾게 되었다. 액션 영화는 좋아하지만, 피바다로 점철되는 장면을 보는 것은 힘겹다 보니, 큰맘 먹고 이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액션의 박진감에는 한 표를 던진다.

아빠의 구원 서사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인남(황정민)과 레이(이정재)의 악과 악의 대전장이라 해야 할까? 일찍이 몇 영화평에서 레이가 오래 인연을 끊고 살던 형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건 결전을 불사한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레이의 형제애(?)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더 불가사의한 것은, 인남의 가뭇없는 부성(父性)이다. 살아있는지도 몰랐던 딸의 존재가 갑자기 드러나고 그 아이의 안위가 위기에 처해졌다 해서, 과연 인남처럼 딸아이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인남과 같은 구원자 아버지의 등장은 한국 영화에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일까?


구원자 아버지의 사례는 지면이 모자라 다 예시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 예로 지난해 상영된 영화 <백두산>을 보자. 리준평(이병헌)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살며 아내와 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 아내에게 배신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배신에 대한 징벌을 마약에 절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으로 영화는 대신한다. 이 나쁜 엄마를 대신해 위기에 처한 딸을 구해내고, 그 딸의 생존을 위해 아버지는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고 산화한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다. 조국과 자식을 구원한 주체로 다시 한번 아버지(남성)가 호명되는 것이다.


영화마다 위기에 처한 여성, 그것도 어린 소녀는 강인한 아버지(남성)의 숭고한 희생으로 구원받는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것이 '소녀'인 이유는 무엇일까? 최후의 생존자로 선택된 소녀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여자로 상징되는 일종의 성녀여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순결 이데올로기를 감춘 아버지의 헌신으로 구사일생한 딸이 평생 아버지를 경배하며 행복하게 살 것으로 영화는 추정하지만, 이 결말은 진실일까? 그럴 리 없다.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인류의 종말이든, 한 인간의 최후이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인류나 자신의 DNA를 보존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소녀'라는 사실은, 재생산에 집착하는 집단 무의식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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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이런 부류의 남성 서사의 영화에는 여성 배우는 거의 또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으며, 오직 남성 배우들만 대거 등장해 자신을 희생해 조국이나 가족을 구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대체 희생이란 무엇인가? 희생은 본질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희생을 이상하리만치 숭고하게 자리 매긴다. 누구의 희생이든 그 희생을 미화해서는 안 되며, 그 희생에 기대 살아야 하는 것을 결코 아름답게 말해서도 안 된다.


영화를 본 후 딸과 나는 인남의 '갑툭튀' 희생에 공감하지 못했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일하게 공감하며 흐뭇해한 사람은 남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기가 어린 딸 유미를 구한 것도 아니면서 매우 의기양양해 보였다. 유미를 구하고 장렬히 떠나는 인남에게, 아버지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보냈던 것인가?

왜 영화 속 트랜스젠더는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같이 본 딸의 초미의 관심사는 배우 박정민이었다. 연기 대변신을 했다는 떠들썩한 입소문 때문이었을 텐데 과연 그랬다. 딸애는 팬심을 담아 박정민의 연기를 칭찬했지만, 난 평가를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나는 주위에서 트랜스젠더를 본 적이 없다. 해서 이들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행태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 여성의 면면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과도한 화장, 요란스런 헤어스타일, 여성임을 짐작하게 하는 묘한 손짓이나 몸짓 등이 그런데, 매우 획일적이다. 박정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트랜스젠더를 쉽게 볼 수 없는 것은 배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주위에 쉽게 관찰할 모델이 없다면 연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배우 박정민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그의 말대로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배역"을 해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다양한 트랜스 여성을 만나 보았을까? 물론 그들을 만난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표상이 대부분 관념적이라고 한다면, 트랜스 여성의 표상 역시 그럴 것이기에, 실제 경험을 통해 관념을 해체하고 살아있는 인간상을 구축하는 것은, 맡은 배역을 성실히 해내야 하는 배우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겪어보지 않는 한, 낯선 영역의 사람은 평생 오해의 대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정민의 경우처럼, 남성 배우가 트랜스 여성 역을 하는 한계는 트랜스 여성이 트랜스 여성 역을 한 영화를 보면, 그 재현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영화 <판타스틱 우먼>은 실제 트랜스젠더 배우(다니엘라 베가)가 트랜스 여성 '마리나'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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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 포스터 장면, 황정민이 최희서의 유골함을 가져와서, 방콕으로 떠나기 전 장면을 촬영한 북성포구 ⓒ 장순심

'좋은' 연기라고 말한 이유는 그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인데, 앞서 말한 관성적인 트랜스젠더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 영화에서 보이는 과한 치장이나 과장된 몸짓, 손짓 따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체격 좋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과도한 치장이나 야릇한 몸짓을 하지 않는 것처럼, 트랜스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획일적인 표상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최근 이와 관련 공감 가는 기사를 보았다. 지난 7월 12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는 '왜곡되고 부정적인 트랜스젠더 이미지의 출처는?'이란 기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 이 기사를 토대로 볼 때 트랜스젠더 재현의 문제는 '어떻게 재현되느냐'도 문제지만 '누가 표현하는가'도 문제다.


<판타스틱 우먼>을 보면, 그가 실제 트랜스 여성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트랜스 여성이기에 트랜스 역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이상의 메시지를 전한다. 예를 들어 박정민이 트랜스 여성 역을 잘 해낸다면, 사람들은 계속 트랜스 여성을 그저 '남자면서 여자인 척 하는' 남자로 오해하게 된다. 실제 트랜스 여성의 삶이 여성의 삶을 흉내 내기 위한 것이겠는가? 남성 배우가 계속해서 트랜스 여성을 '연기'함으로써 관객들은 트랜스 여성이 가상의 세계에 '배역'으로만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실제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트랜스 여성의 실체를 지우게 된다.


<판타스틱 우먼>에서 남성 배우가 아닌 실제 트랜스 여성이 트랜스 여성을 재현한 일은, 단지 가상의 세계에 '연기'로만 존재하는 트랜스젠더를 밀어내고, 현재하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식 깊숙이 들여놓게 되는 일이다. 그랬을 때 관객은 단지 '연기'만이 아닌 실존하는 트랜스젠더를 인지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트랜스젠더를 '누가 표현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남성 역을 남성이 하고 여성 역을 여성이 하는 게 당연시되고, 그럼으로써 그 역할이 살아있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것을 상식이라고 본다면, 트랜스젠더 역은 트랜스젠더가 함으로써 더 나은 캐릭터를 구성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트랜스젠더 재현의 왜곡을 걷어내기 위해 영화계도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변태적으로 보이는 캐릭터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성소수자 캐릭터를 창조하고, 성소수자 역할은 성소수자 배우에게 맡겨보면 어떨까? 이미 미국에선 2018년 드라마 <포즈>에 트랜스젠더 배우를 적극 등장시키고 있다. 트랜스젠더가 하는 미디어 재현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왜곡된 트랜스젠더상을 조금씩이라도 바로잡아나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대상화되었던 인간상은 비로소 나의 가족, 친구, 이웃의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어디서나 부딪칠 수 있는 사람으로 다가온 <판타스틱 우먼>의 '마리나'처럼 말이다.


필자의 의견에 이렇게 야단하실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 장애인 역할은 장애인만 해야겠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렵다. 바깥출입도 쉽지 않은 장애인들이 험난한 연기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가능한 사회였다면, 위의 질문은 생성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장애인이 장애인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이 또한 단지 비장애인이 '연기'하는 장애인이라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이 실제 삶으로 걸어 들어 온 이상 실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오히려 왜 내 주위에는 장애인이 이렇게 안 보였을까를 깊이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성소수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을 비정상이라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성소수자 배우들을 무대에서 보게 되고 찾게 될 것이다. 배우가 성별을 뛰어 넘어 모든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성을 띤 배우가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연기지만 꼭 연기이지만은 않은 그 '무엇'을 드러내는 일말이다. 관객은 그 '무엇'이 내포하는 것을 포착하게 될 것이고, 이 과정들을 경유해 발굴된 예민한 감수성으로 내가 모르던 얼굴을 아는 사람으로 위치시키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더 나은 상상력과 재현으로 더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인류의 공존에도 기여하면서 말이다.


윤일희 기자(jupra1@naver.com)

2020.08.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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