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히 실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그들이 열광한 까닭

[컬처]by 오마이뉴스

한국 SF 영화의 무모한 도전 <바이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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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 영화 포스터 ⓒ 서울동화프로덕션

재벌 기업인 장민준(윤일봉 분)과 장남 영일(남성훈 분)은 비밀리에 연구 중이던 반도체 설계도를 괴한들에게 탈취당한다. 망나니인 차남 도일(박중훈 분)은 우연히 반도체 설계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홍콩으로 간다. 그곳에서 수지(신미아 분)의 도움을 받아 반도체 설계도의 행방을 뒤쫓다가 그만 악당 '스리랑카의 별(현길수 분)'과 그의 부하들의 총격으로 큰 부상을 입는다.


동생의 소식을 접한 영일은 한달음에 홍콩으로 와 사망 직전의 도일을 최첨단 과학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공할 힘을 가진 사이보그로 되살린다. 사이보그가 된 도일은 베트남 참전 용사 석도(신우철 분), 수지와 함께 악당들의 본거지가 있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경계 지역으로 향한다.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이 제작을 담당하고 김청기 감독이 연출을 맡은 애니메이션 영화 <로보트 태권 브이>(1976)는 서울 관객 18만 명(당시 한국 영화 흥행 2위)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일약 한국 영화 산업의 스타로 떠오른 김청기 감독은 이후 <로보트 태권 브이> 시리즈와 <고우영의 삼국지> 시리즈를 비롯한 로봇, SF, 모험, 역사, 성경, 반공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애니메이션으로 사랑을 받았다.


김청기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섞은 영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1986)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와 <슈퍼 홍길동> 시리즈로 아동용 히어로 영화 시장을 개척한 김청기 감독은 곧바로 성인용 히어로 영화에 눈길을 돌렸다. 바로 <바이오맨>(198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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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 영화의 한 장면 ⓒ 서울동화프로덕션

<바이오맨>은 '제대로 된 SF 액션 영화', '한국형 <터미네이터>'를 표방한 작품이다. 김청기 감독은 제작을 맡고 메가폰은 조명화 감독이 잡았다. 주연은 <외계에서 온 우뢰매>의 심형래나 <슈퍼 홍길동 2-공초 도사와 슈퍼 홍길동>(1988)의 김정식처럼 코미디언이 아닌, <깜보>(1986)로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을 받고 흥행작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에 출연한 톱스타 박중훈를 캐스팅했다.


그때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해외 로케이션 영화가 드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이오맨>은 무려 홍콩과 태국 로케이션을 감행했다. 당시로선 엄청난 대작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결과는 서울 관객 2445명이란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SF 영화 자체가 드물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할리우드의 <터미네이터>(1984)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바이오맨>의 열정과 도전 정신은 높이 산다. 문제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과 제작 여건, 연출력이 따라주지 않았는 점이다. 각본부터 온갖 영화를 마구잡이로 짜깁기한 수준이다.


<바이오맨>은 < 007 >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첩보물(악당 보스가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는 설정까지 나온다)로 시작해서 홍콩으로 가면 선글라스를 끼고 총격전을 벌이며 홍콩누아르를 찍는다. 주인공이 부상을 입은 후엔 <로보캅>(1987)과 <터미네이터>를 집어넣고 태국으로 무대를 옮겨 <람보 2>(1985)를 보여주다 마지막엔 이소룡의 <당산대형>(1973)과 <정무문>(1973)으로 마무리한다. 너무나 많은 영화를 뒤섞어 패러디 영화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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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 영화의 한 장면 ⓒ 서울동화프로덕션

"주로 액션장면들을 촬영했는데 거의 람보처럼 M60 기관총으로 마구 갈기는 장면들이 꽤 있다. 총알 하나에 3만 원 정도라고 하면, 화면상에서 '이야아~' 소리 지르면서 '두두두두두두'한 뒤 컷 하면 그게 30만원이다. 그렇게 한 장면 찍는 데 30만원 들고 NG 포함해서 100번 정도 찍으면 3천만 원인 셈인데 당시 한국영화 제작비로 1억, 2억 원 하면 많다고 할 때니까 엄청난 거지. 그러니까 몇 번 안 쏴도 사람들은 일단 막 쓰러져야 한다. 한방에 3명 쓰러지는 것처럼 과하게 마구 쓰러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이오맨>의 주연 배우인 박중훈이 '씨네21'과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어떤 장면을 찍고 싶어도 제작비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히어로 영화에선 피아노 줄이 보이거나 의상과 분장이 이상해도 넘어갈 수 있다. 당시엔 어린이용 영화 자체가 드물었던 탓에 그런 결점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반면에 성인들의 눈높이는 <터미네이터> <로보캅> <람보 2> 등 할리우드 대작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바이오맨>은 총알 한 방에 몇 명이 쓰러지고 전선 몇 가닥과 트랜지스터 기판으로 사이보그를 보여주는 과감함 또는 무모함을 보여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에 맞선 심형래의 <영구와 공룡 쮸쮸>(1994)처럼 말이다. 예산과 일정을 효율적으로 짜야 하는 프로덕션의 역량도 부족했다. 이것이 1980년대 한국 영화의 현실이었다.


엉성한 특수효과 외에도 문제점은 상당하다. 리듬이나 개연성 없이 편집을 해 어떤 대목은 설명도 없이 나오거나 또는 사라진다. 장면과 장면을 대충 이어붙인 수준이다. 어울리지 않는 음악도 문제다. 총알이 난무하고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이라니. 완성도가 실로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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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 영화의 한 장면 ⓒ 서울동화프로덕션

<바이오맨>에서 사이보그 도일이 악어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다. 너무나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인물의 심리 묘사나 영화 전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지가 늪에서 씻던 중에 악어가 나타나서 도일이 제압하는 게 전부다.


도일은 굳이 악어와 맨손으로 싸워 강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앞에서 진흙에 빠진 자동차를 번쩍 들고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드롭킥을 날려주어 괴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정상적인 편집이라면 잘라내야 마땅하다.


배우 박중훈은 언론 매체를 통해 이 장면을 촬영하다가 실제로 악어 꼬리에 배를 맞아 기절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에 필수적인 장면인가, 찍어야 한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배우와 어떻게 협의해야 하는가 등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자와 감독은 그저 태국까지 왔으니 뭐라도 찍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모양이다. <바이오맨>엔 그 시절 대한민국의 안전 불감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처음엔 성인용으로 기획한 <바이오맨>은 후반 작업을 하면서 결과물이 신통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어린이용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의 폭력성은 둘째치고 술, 담배, 마약, 강간 등 어린이에게 맞지 않는 수위가 높은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악당들에게 붙잡힌 수지가 강간을 당한 후 마약 중독으로 윤락녀가 되었다는 설정이나 도일이 적의 목을 180도로 꺾어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려 '전체관람가'를 준 심의가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본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나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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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 영화의 한 장면 ⓒ 서울동화프로덕션

<바이오맨>은 엉성한 졸작이며 실패한 블록버스터다. 그러나 숱한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가운데 지금까지 소수의 열광적인 팬들이 즐겨보는 컬트영화로 자리 매김을 했다. 단순히 못 만들어서 일까?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열심히 만들었으나 여건과 재능이 따라주지 않아 생긴 엉망진창, 진지함 속에서 솟구치는 의도치 않은 황당함이란 재미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스타 박중훈의 고군분투도 눈물겹다.


한편으로 <바이오맨>은 열악한 환경에서 나온 한국 SF 영화의 무모한 도전이자 <흡혈형사 나도열>(2006), <홍길동의 후예>(2009), <전우치>(2009), <초능력자>(2010)보다 앞선 히어로 영화로서 중요하다. 실패도 역사의 한 페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며 한국 영화를 한걸음씩 발전했다고 믿는다.


현재 <바이오맨>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운영하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의 <바이오맨> 페이지(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4166)에서 감상이 가능하다. 할리우드에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1958)이 있다면 우리에겐 <바이오맨>이 함께한다.


이학후 기자(hakus97@naver.com)

2020.09.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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