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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일본 조경의 원류, 충분히 자긍심 가져도 좋은 곳

by오마이뉴스

[세상을 잇는 다리] 용의 아들, 무왕의 꿈이 서린 부여 궁남지 널다리


부여는 사비백제 도읍지다. 부여로 천도한 성왕에서부터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123년간이다. 성왕(聖王)은 '동북아 중심제국'이라는 웅대한 꿈을 꾸었다. 사비성은 왕의 꿈이 서린 곳으로, 국가비전이 복합적으로 축약되어 만들어진 '계획 신도시'다.


백마강가 부소산에 둥글게 산성을 쌓고, 그 아래 3개 공간으로 구획된 궁궐을 지었다. 궁 남측은 저습지로 홍수가 염려되어, 주변 낮은 산을 헐고 백마강 모래를 가져다 제방을 높이고 저습지를 매립하여, 백성들이 살 땅을 마련한다.


궁성 방어에 넘치는 자신감으로 동-북-서측을 빙 둘러 3면으로 '나성(羅城)'을 쌓고, 도성 가로망을 격자형으로 구획하였다. '격자형 가로망'은 우마차 왕래가 자유로울 만큼 넓었다.


도성 내 곳곳에 '외적을 방비'할 시설을 배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발달된 상·하수도 체계를 구축해 냈다. 백성들 생활터전을 곳곳에 만들어 도성방비가 가능한 인구수를 상시 유지했고, 도성 주변 경작지도 잘 관리하였다. 이 시기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 '아스카문화의 원류'가 된다.


백제 30대 무왕(武王)은, '백제 중흥'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신라에게 잃은 넓은 영토를 회복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오랜 기간 많은 공적을 쌓는다. 나라의 기운을 융성시키기 위해 익산으로 천도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이젠 전쟁을 멈추고,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고 싶었나 보다. 무왕 35년(634년) 3월에 궁성 남쪽에 연못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곳은 무왕 어머니가 살았다는 전설이 서린 곳으로, 무왕의 탄생설화와 관련이 있다.

무왕의 탄생설화와 관련 된 궁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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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전경 ▲ 궁남지 주변으로 넓은 연꽃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2002년 이후 변화된 풍경이으로, 매년 7월 이곳에서 '서동연꽃축제'를 벌인다. 전북 익산 왕궁리에도 궁남지가 있다는 주장에, 부여군과 익산시가 팽팽한 긴장을 보인적도 있었다. 대결 보다는, 심층적인 연구와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 부여군청

설화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다. '그의 어머니가 과부이고 궁성 남측 연못가에 살면서, 연못에 사는 용과 통정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 이름이 서동으로 큰 재주와 넓은 도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는 궁남지를 만든 내용이 나온다. '3월에는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는 내용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과부 어머니에게서 서자로 태어난 백제 왕자가 자기 본래 신분을 모르고 자랐을 개연성이 높다. 마(麻)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신라 공주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는다.


서라벌로 가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혹자는 간자(間者)였다 주장한다. 혹세(惑世)하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다. 결국 흉한 소문에 시달리던 공주가 귀양을 가고 만다. 서동이 찾아가 간절한 구혼을 한다. 결국 선화공주는 서동과 결혼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서동은 자기가 백제 왕자임을 알게 된다. 짧은 재위기간을 거친 혜왕과 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그리고 처가의 나라 신라에 맹공을 펼친다. 나라가 안정되자 궁궐 남쪽에 연못을 만들고, 뱃놀이를 즐겼다. 모모는 이를 방탕한 중국 진시황을 본뜬 행동이라 말하기도 한다.


말년에는 전북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운다. 미륵사를 짓는다.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2009년 서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선화공주 설화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였을 뿐임이 드러났다. 탑신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무왕 후(后)는 백제 귀족 사택(沙宅)씨 딸로 밝혀진 것이다. 여러 말들이 분분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궁남지는 굉장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만들어진 연못 모양은 밝혀지지 않았다. 무왕은 큰 연못을 파고 자연수로와 인공수로를 잇대어 8km 길이 물길을 만들었다. 못에서 파낸 흙으로 주변 4곳에 큰 언덕을 쌓는다. 언덕 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한다. 못 한가운데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선산을 형상화한 섬을 만든다. 연못이 만들어지자 왕과 왕비가 신하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정자를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현지 주민들은 궁남지를 '마래방죽'이라 부른다. 궁남지 규모는 고증사료가 부족해 정확히 추정하긴 어려우나, 현 규모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1965∼1967년에 복원된 궁남지는 당초 규모의 1/3 수준이라 한다. 복원 당시, 섬 안에 건축 흔적과 규모, 섬을 잇는 다리 존재여부에 대한 고증 등등이 미약해 보인다.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된 궁남지 조경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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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널다리 ▲ 둥근 섬 안에 포룡정이 보이고, 이를 잇는 널다리가 힘차게 뻗어 있다. 한여름 푸른 물결과 하늘을, 널다리와 버드나무가 가르고 있는 풍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 이영천

연못은 부정형 네모 둥글한 모양으로 복원되었다. 1971년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 안에 '포룡정(抱龍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무왕 어머니가 용과 통정해 아이를 낳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 섬에서 밖으로 통하는 널다리를 같이 놓았다.


1990년대 여러 차례 궁남지 주변을 발굴하고, 2002년 이후엔 영역도 넓게 확장시켰다. 대표적으로 11.65m(동서)×3.13m(남북) 규모의 집수장이 발굴되었다. 집수장은 큰 통나무로 내·외벽을 쌓았다. 서측에는 물을 가두는 깊은 구덩이를 파고, 동측에는 물을 흘려보내는 'U형 측구'를 만들었다. 약 8km 길이 수로에는, 인공수로의 흔적도 발굴되었다.


널다리 교각은 4각 돌기둥으로, 양쪽에 세웠다. 교각을 멍에목으로 결구시키고, 그 위에 귀틀목을 길게 결구시켜 튼튼한 지지대를 만들었다. 귀틀목 위에 홑겹의 통 널빤지를 깔아 상판을 완성했다. 나무라는 재료 한계로, 끊임없는 보수와 교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난간은 향원정 남쪽에 있었던 취향교와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나무난간에 역시 단청을 하였다. 궁남지 널다리가 백제시대 모습을 되찾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 될지 상상해 본다. 사료 고증과 유적 발굴을 통해, 정확한 모습이 되찾아지기를 소원해 본다.


궁남지는 무왕을 떠나선 설명되지 않는다. 그 중 하나가 일본과의 교류이다. 일본서기에 '궁남지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한다.


일본 조경을 흔히 '축소지향의 조원(造園)'이라 일컫는다. 정원 안에 자연일부를 축소시켜 조성했다는 의미다. 규모에 관계없이 반드시 연못을 만들고, 작은 나무와 돌들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분재(盆栽)가 발달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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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아리 널다리 풍경 ▲ 낭창하게 휘어진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평화롭게 서 있는 포룡정과 널다리가 선경을 이루고 있다. 푸른 하늘과 파란 물색이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적셔주는 느낌이다. ⓒ 이영천

반대로 우리나라 조경은, 자연의 경치를 내 안으로 끌어들여오는 '차경(借景)'이 바탕이다. 문이나 창문, 누정마루에서 본래 자연이 가지고 있는 풍경 그대로를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정이나 마찬가지이나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가 대표적이다.


백제 조원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네들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남지를 보면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정원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의식세계를 반영하는 곳이다. 찬란하고 웅대·휘황한 백제조원 기술이 바다를 건너가자, 이를 축소·변형·왜곡시켜 폐쇄된 공간 안에 가둬버린 그네들의 열등감, 그 정신세계 일면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인다.


사실 고대 일본이라는 나라는 백제 없인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는 신라 설총이 만든 '이두'와 그 쓰임새가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그리 발달되지 못한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고대문화는 물론, 그들이 쓰고 있는 '한자도 백제에서 전해준' 것이다.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될 일이다.


궁남지 푸른 물과 아름다운 풍경은 찬란했던 백제제국의 위용을 품고 있다. 창대하게 뻗어나가고자 했던 무왕의 원대한 꿈이 못 깊은 물속에서 용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궁남지 널다리는 용을 품었던 백제 꿈으로 향해가는 드넓은 길의 현신(現身)이다. 가슴 쫙 펴고 건너가 보시라.


이영천 기자(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