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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김대중에 대한 열등감, '4.19 영웅'의 초라한 말로

by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이기택 vs.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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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 유성호

때가 덜 묻은 이미지로 1990년 3당 합당 이후 김대중과 함께 걸은 인물이 이기택이다. 2016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된 이기택은 노태우·김종필과 함께 민주자유당(민자당)에 합류한 김영삼과 갈라선 뒤 노무현 등과 함께 민주당(꼬마 민주당)을 만들고 1991년 9월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 민주당을 만들었다.


3당 합당 당시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이끌었던 김대중은 재야세력을 끌어들여 1991년 4월 신민주연합당을 만들었다. 이 당이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합당해 새로운 민주당이 됐다.


1937년 지금의 경북 포항에서 출생해 1957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 이기택은 1960년 4·19 혁명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로 부각됐다. 4월 19일이 다 되도록 정문을 나서지 않던 대학생들을 거리로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는데도 대학생들은 당국의 감시 때문에 거리로 나오지 못했다. 어린 학생들이 '대학생들은 왜 저래?' '비겁하다'라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서울 성북경찰서의 집중 감시를 뚫고 '고려대 4·18 의거'를 성사시킨 주역 중 하나가 이기택 상과대학 학생회장이다. 2014년에 장덕환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쓴 <한국의 4월혁명>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17일 저녁 재학생 동원을 책임지고 있던 이기택 하숙방에 몇몇 학생회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음날 학생 동원 문제를 숙의하고 있었다. 서슬이 퍼런 자유당 정권하에서, 그리고 명문 고려대학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최후 통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를 주도한다는 것은 곧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현실적 고민에, 참석한 임원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녘 이기택은 5개 단과대학 회장단이 죽음을 각오하자고 다짐한 대로 유서를 써놓기도 했다.

30세 되던 1967년 제7대 총선 때 신민당 공천으로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이기택은 1992년 제14대 총선 때까지 7선을 기록했다. 이 중에서 다섯 번은 부산에서 지역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것이었다. 전국구 당선은 첫 당선인 제7대와 마지막 당선인 14대 때 일이다. 1981년 제11대 총선 때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정치 규제 때문에 출마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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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 연합뉴스

유서까지 써놓고 4월 18일에 거리로 나선 이기택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불굴의 야당 투사로 살았다. 그 결과, 그는 1976년(39세)에 신민당 사무총장이 되고 1979년(42세)에 부총재가 됐다.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굽힘이 없었던 그는 1987년 6월항쟁과 1988년 제13대 총선 참패로 위기에 빠진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이 3당 합당을 추진했을 때도 자기 노선을 굳건히 지켰다.


이런 궤적을 발판으로 3당 합당 뒤에 김대중과 함께 야권을 이끌며 김대중·김영삼 양김 이후를 내다보는 유력한 지도자로 부각됐다. 그랬던 그의 운명은 1996년을 기점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두 개의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노무현도 지지하고 이명박도 지지하고

첫째는 그에게 낙선이 일상화되는 상황이다. 출마가 불가능했던 제11대 총선을 제외하고 1967년부터 1992년까지 연속으로 당선된 그였다. 그랬던 그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떨어지더니, 고향인 포항에서 치러진 1997년 7·24 보궐선거에서도 패했다. 다시 부산에서 치른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9세 때인 1996년부터 3연속 낙선을 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계속 추락한 것이다.


둘째는 그에게서 민주투사의 선명성이 사라진 상황이다. 3당 합당 때 김영삼과 갈라섰던 그가 합당의 결과물인 민자당을 계승한 신한국당과 합세해 한나라당을 만들면서 이런 상황이 초래됐다.


4·18 의거 직전까지 정부 당국은 고려대를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인근의 안암파출소에는 이 학교를 감시하기 위한 임시 지휘소가 만들어졌다. 성북경찰서 사복경찰들도 고려대를 자주 들락거렸다. '성북서 사복경찰들은 고대로 출근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이런 속에서도 용감하게 의거를 결행했던 이기택이 1979년 12·12 쿠데타 및 1980년 5·17 쿠데타에 역사적 기원을 두는 민정당의 후계 정당을 만드는 데 가담했던 것이다.


그는 2002년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2007년에는 이명박을 지지했다. 한나라당 창당과 결이 다른 이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이 있다. '될 사람을 밀었다'도 공통점이 되겠지만, 개인적 연고로 정치적 선택을 내렸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꼬마 민주당 때의 노무현과의 인연, 포항과 고려대를 매개로 한 이명박과의 인연이 그런 선택을 추동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그는 상당 부분은 개인적 연고에 기초해 2002년에는 진보 후보를 밀어주고 2007년에는 보수 후보를 밀어줬다. 정치 행보의 원칙이 실종된 것이다.


1996년 이후로 그가 그렇게 된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인연이 있다. 이 인연의 또 다른 주인공이 그를 그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 인물과 부딪히면서 그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다. 1990년판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으로 일대 위기에 빠진 야권을 구하고자 이기택과 손을 잡은 김대중이 인연의 다른 쪽 당사자다.

"이기택처럼 고집 센 사람 처음 봤다"

이기택과 김대중의 조합은 1990년의 위기로부터 야당을 건져내는 데 기여했다. 가깝게는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사실상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멀게는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조합은 평화적 정권교체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한국 현대사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객관적 성과 속에서도 이 조합은 많은 갈등을 드러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김대중을 겨냥한 이기택의 선제적 자극에서 비롯됐다. 이기택은 김대중의 1992년 대선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러면서도 김대중을 상대로 기질적인 이질감을 많이 느꼈다. 이것이 이기택이 김대중을 자극하도록 한 원인이 됐다.


작고 1년 뒤에 나온 회고록 <우행, 내 길을 걷다>에서 이기택은 "애초부터 김대중씨와의 동거가 순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라면서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강한 야당을 만들기 위해 통합은 했지만, 그분과는 정치적 기반이나 스타일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너무 달랐다"며 '너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김대중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순탄치 않게 보였던 동거가 그럭저럭 유지된 것은 김대중과 동교동계(김대중계)의 양보 덕분이었다고 이기택 자신도 인정했다. "김대중씨가 양보를 많이 한 편이었고, 동교동계 의원들도 협조를 잘해줬다"고 말했다.


이기택은 김대중이 자신의 색깔을 받아주기를 원했다. 13세 많은 나이를 포함해, 여러 면에서 만만치 않은 김대중을 상대로 이기택은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 애썼다. 김대중이 양보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정치 시작한 후 지금까지 이기택처럼 고집 센 사람 처음 봤다"는 김대중의 한탄이 이기택의 귀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이기택이 김대중을 자기에게 맞추려 한 데는 자신감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대선에 대비한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이기택이 김대중을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기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김대중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고록에서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라며 "김대중씨가 대세인 것을 부인할 순 없지만, 원래 선거란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 뒤 "경선 과정에 돌입해보니 의외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만약 이기택이 '김대중은 내가 넘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면,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체제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수도 있다. '의외로 해볼 만하다'라는 이기택이 공동대표로 있었기에, 당시의 민주당이 김대중의 의도와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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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가 2007년 7월 16일 오전 여의도 캠프에서 자신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1992년 대선에 패한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날아갔다. 이것은 이기택에게 새로운 기회를 의미했다. 그는 '포스트 양김'을 희망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자기만의 정치구상도 세워뒀다.


하지만 영국으로 날아갔던 김대중이 얼마 뒤 다시 날아오면서 정계복귀가 가시화되자 그는 벽에 부딪혔다. 그가 준비한 정치 구상은 휴지 조각이 됐다. "내가 구상한 미래 지향의 정치는 김대중씨가 정계복귀를 시도하면서 당내 분란으로 이어져 그 결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그는 한탄했다.


그때부터 그는 김대중의 영국행 이전 때보다 더 강도 높게 김대중을 견제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때 김대중이 필승 카드로 내놓은 '조순 서울시장, 이종찬 경기도지사' 구상을 김대중과 동교동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순 서울시장, 장경우 경기도지사'로 바꿔놓았다. 이런 민주당의 분열로 인한 어부지리는 민자당 경기도지사 후보 이인제에게 돌아갔다.

김대중을 꺾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기택은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을 견제하고자 유포하는 양김 청산론과 세대교체론에도 찬동했다. 김대중은 <김대중 자서전> 제1권에서 "이기택 대표의 행보는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라고 한 뒤 "여당에서 구호처럼 외치던 세대교체론을 다시 들먹거렸다"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기택과 김대중은 갈라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해 9월 5일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기택은 12월 21일 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의 개혁신당과 함께 통합민주당을 만들었고, 이 당은 이듬해 6월 민주당으로 개칭됐다.


일련의 일들은 이기택을 종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김대중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칠 만했다. 이기택이 이회창의 대선 승리를 돕기 위해 한나라당을 창당한 것도 김대중의 영국행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대중과 결별한 뒤 이기택은 처음에는 조순 서울시장을 민주당 후보로 세우려 했다. 조순이 대선 출마 의지를 피력하자 "내심으론 다행이다 싶었다"라고 회고록에 썼다.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려면 그 길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조순 후보를 밀기 위해 대권후보 자리뿐 아니라 당권까지 순순히 내주었다. 김대중한테는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던 그가 조순에게는 두 말도 없이 아낌없는 양보를 했던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이기택은 조순이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순에 관한 기본적인 체크도 해두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양보를 했던 것이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런 뒤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조순씨만 기대하고 있던 나는 무척이나 황당하고 난감했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새로 후보를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공당이 대통령 후보를 안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찾은 대안이 이회창씨였다.

이기택은 이회창의 법질서 회복 의지가 마음에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만하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한다. 부조리한 법질서에 맞서 싸운 야당 투사가 법질서 회복이란 구호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기택의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김대중과의 만남 및 결별은 4·19 영웅이자 야당투사인 이기택이 한나라당 창당 주역으로 돌변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김대중과 틀어진 것은 이념적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상당 부분은 기질적인 요인이었다. 그는 김대중이 자신과 기질적으로 다르지만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품었다. 이런 인식은 그와 김대중의 공고한 연대를 방해했고, 이는 그와 김대중의 결별에 이어 그와 보수정당의 제휴로 이어지는 원인이 됐다.


김종성 기자(jkim08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