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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나이 오십 대 초반,
저는 '탈염색' 파입니다

by오마이뉴스

건강한 흰머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게 뭐가 문제인가요



오마이뉴스

여배우 문숙 ▲ TV 프로그램에 나온 문숙 ⓒ KBS

도원결의처럼 시작한 '탈염색'이건만

흰머리를 그대로 두면 십중팔구 "왜 염색을 하지 않으세요?"하는 인사를 받는다. 얼마 전 나의 언니들 두 명은 그 인사를 너무 많이 듣는 바람에, 큰 결심 끝에 몇 달 동안 하지 않았던 염색을 재개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언니들은 염색 없이 두어 달은 잘 버텼다. 그 기간 동안 언니들은 각각의 활동 공간에서 "왜 염색을 하지 않으세요?"하는 인사말을 수없이 듣게 되었단다. 그 인사말이 핵폭탄만큼이나 타격이 컸던 탓일까. 마침내 두 사람은 그 맹렬한 인사말 폭격에 그만 가뭇없이 전사(?)하고 말았다.


언니들의 '탈염색' 결심은, 고백건대 나 때문에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오십 대 초반인데 흰머리 염색을 하지 않는다.


(감히 비교할 순 없지만) 여배우 문숙씨보다 20센티미터쯤 더 길게, 흰머리를 파마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길러서, 올림 머리·땋은 머리·풀어헤친 머리까지 '나름으로' 다 소화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나이니만큼 머리 감을 때 허리가 아파오길래 지난 달에 단발로 잘랐다. 물론 흰머리는 그대로 있다. 다시 또 길러볼 계획이다. 머리 감을 때 허리가 아프지 않을 정도의 기장까지만!


처음에 언니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만날 때마다 내게 "왜 염색을 하지 않니?"라는 인사말을 수시로 건네곤 했었다. 그러나, 자주 대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나의 흰머리가 괜찮아 보이게 됐던 것 같다.


다소 낯선 현상, 그리고 보기 드문 장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잦은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언니들의 '탈염색'은 두 사람의 도원결의처럼 시작됐건만, 결과는 '다시 염색하자'로 끝났다.


사실 "왜 염색을 하지 않으세요?"라는 인사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인사말의 힘은 만유인력보다도 더 강력한 것 같다. 늙어 보인다, 머릿결이 안 좋아 보인다,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등등의 다채로운 부연설명(?)이 따라붙을 때도 있다.


그런 데다 매우 끈질기다. 처음 만났을 때에 한 번 인사로 했으니 두 번째부터는 안 할까? 그렇지도 않다. 볼 때마다 그 인사말을 건넨다. 그 인사말은 그냥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다. 염색을 설득, 나아가 강요하는 말에 가깝다.


그 와중에 어린 자녀 입에서 "엄마 머리가 하얀 거 별로야. 딴 애들 엄마는 안 그렇단 말이야"라는 말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미용실을 찾거나, 장바구니에 염색약을 추가하게 된다. 자녀들에겐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이)가 신경 쓰이겠지만, 엄마들에겐 아친엄(아이 친구의 엄마)이 퍽도 신경 쓰이는 존재들이다.


물론 흰머리는 머릿결이 나빠 보인다. 검정색 모발은 고르게 윤기가 있어 보이지만, 흰머리가 섞여있으면 윤기가 좀 덜하다. 아무리 정성껏 머리를 감고 매만져도 일단 검정색과 하얀색이 불규칙하게 섞여있으면, 좀 푸석푸석해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한 자기 머릿결 이미지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실상이 다르다는 '진실'을 어느 날 흰머리의 주인은 깨닫게 된다. 머리카락을 만져보면, 염색약을 잘 먹고 많이 먹어 까맣고 건강해 보이기만 할 뿐 실제로는 덜 건강한 동년배의 검은 머리카락들보다 확실히 흰머리들이 건강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건강한 흰머리는 잘 빠지지도 않는다. 튼튼하게 잘 붙어있다.


진짜 건강한 것이 그냥 건강해 보이는 것보다 나음을 깨닫는 순간이 "왜 염색하지 않으세요?"라는 인사말을 견뎌낼 최초의 근육이 생긴 때다. 나 또한, 그 근육이 생기고 나서부터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흰머리를 뽑지 않고 그냥 거기 놔두었다.


그러기를 몇 년, 어느 날 나는 저 인사말에 빙긋 웃을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러게요. 근데 좀 안 좋아 보일 순 있는데, 제 머리카락 건강 상태는 꽤 좋아요"라고 평화로운 어조로 대꾸하곤 한다. 그리고 "늙어 보여요"라는 평가에는 "어차피 늙어서, 늙은 만큼 늙어 보이는 건데 뭐, 잘못된 건 아니지요?"하고 천연덕스럽게 반문하기도 한다.

최종 결정권은 결국 당신에게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염색하지 마"라고 강권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굳은 결심이 있지 않고서는 좀 힘들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늙어 보이는 것도 싫고 머릿결이 덜 좋아 보이는 것도 불만인데, 주위 사람들한테 잔소리까지 듣다 보면 "내가 차라리 염색을 하고 말지"하며 포기하게 되기 십상이다.


물론 염색을 자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건강한 머릿결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염색 효과가 높은 염색약을 서너 달에 한 번씩 사용하면 아무래도 머리카락의 건강성에 문제가 생기거나 탈모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지 않을까 짐작된다(염색약 성분 중에 환경오염 물질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정기적인 염색약 도포는 사실 간단히 넘겨버릴 문제가 아니다. 가뜩이나 나이 들어가며 점점 힘이 없어지는 머리카락들에다가 염색약까지 부담시키는 건 좀 잔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흰머리 염색을 또 할 때가 되었구나' 혹시 중얼거린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좀 소심하게 (많이 말하면 잔소리가 될 테니) 딱 한 번만 말해보련다. 건강한 머릿결 vs. 건강해 보이는 머릿결, 어느 쪽이 더 자신에게 좋을지 한 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고. 최종 결정권은 아마도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이인미 기자(goodw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