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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발 아래서 파도 치는 구름... 꼭 신선이 된 것 같습니다

by오마이뉴스

[쓰촨여행 ⑤] 진정한 신선의 세계, 어메이산(峨眉山)


이 글은 지난 2020년 1월 5일~10일(5박 6일) 중국 쓰촨 여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이른 새벽 어메이산(峨眉山)으로 향한다. 이백은 시 <등아미산(登峨眉山)>에서 "촉국에 신선이 사는 산이 많지만, 어메이산에 필적할 산은 없다(蜀國多仙山, 峨嵋邈難匹)"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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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산 입구의 패방 ▲ 새벽 어스름에 어메이산 패방이 불을 밝히고 섰다. '중국제일산'이라는 의미의 ‘진단제일산(震旦第一山)’ 글귀가 새겨져 있다. ⓒ 김대오

새벽 어스름에 어메이산 패방이 불을 밝히고 섰다. 패방에는 BC 4세기경 인도의 보장(寶掌)스님이 중국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산이라고 말한 '진단제일산(震旦第一山)'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계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은 꽃이 활짝 펴 멀리서 달려온 과객을 맞는다.


유람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CCTV에 어메이산 산정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산이 높다는 '아(峨)'와 산이 아름답다는 '미(眉)'가 결합한 '아미(峨眉)'라는 이름에 걸맞게 위로 쪽진 머리처럼 우뚝 솟은 산봉우리 아래로 초승달 모양의 길고 아름다운 절벽이 나비의 더듬이 혹은 미인의 눈썹처럼 뻗어 어우러진 풍경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득한 피안의 세계일뿐이다.


새벽 안개가 걷히지 않은 구불구불 산길을 버스는 빠르게 기어오른다. 하얀 안개 속에 언뜻 언뜻 보이는 수목과 녹음은 밀림처럼 울창하다. 3000m가 넘는 해발 고도에 따른 기온차가 커서 3200여 종의 식물과 2300여 종의 동물이 다양하게 서식한다는데 얼핏 봐도 예사롭지 않은 숲이다. 이곳이 신선의 세계임을 암시하려는 듯 안개는 여전히 산을 감싸고 있다. 면사포를 두른 신부처럼 어메이산은 안개 속에 신비로운 모습을 숨긴다. 진면목은 늘 늦게 드러나는 법이다.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는 곳까지 걸어가는데, 이곳은 눈으로 뒤덮인 설국의 세계다. 바로 전까지 녹음이 우거진 곳을 지나왔는데,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설원의 풍광이 펼쳐진 것이다. 여름에서 겨울로 순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하얀 안개와 하얀 설경이 어우러진 설경의 세계는 지저분한 것을 하얗게 가려주기에 더없이 아름답다.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갈수록 단순함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은 이런 설경이 가져다주는 단순화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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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뒤집어쓴 ‘월인천강(月印天江)’ ▲ 불법을 실천으로써 널리 보급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현보살에게 ‘월인천강’은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 김대오

눈을 뒤집어쓴 '월인천강(月印天江)'이란 글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어메이산은 보현보살(우타이산五台山-문수보살, 주화산九华山-지장보살, 푸퉈산普陀山-관음보살)의 성지다. 불법을 실천으로써 널리 보급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현보살에게 '월인천강'은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달은 불법을, 천강은 중생을 상징할 테니 말이다.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올라 접인사(接引寺)에 이르자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다. 케이블카는 안개 속 설경에서 또 다른 선계로 이어주는 범선 같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산정은 놀랍게도 쪽빛하늘이 QHD화면처럼 더없이 깨끗하다.


뿌연 안개에 갇혔던 시선은 파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탁 트인 하늘에 닿아 닿는 곳마다 탄성이 자아나게 한다. 갑자기 이렇게 맑고 푸른 세계가 펼쳐지다니. 보현보살이 탔다는 6개의 어금니가 난 흰 코끼리가 계단 왼쪽으로는 여의, 오른쪽으로는 수레바퀴를 짊어지고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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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보살이 탔다는 6개의 어금니가 난 흰 코끼리 ▲ 케이블카에서 내린 산정은 놀랍게도 쪽빛하늘이 QHD화면처럼 더없이 깨끗하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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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십방보현좌상 ▲ 세상 어디에 있는 중생이든 모두 구제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김대오

그 사이 계단을 오르자 거대한 불상이 시선을 압도한다. 높이 48m, 무게 600t, 금박 23만 장을 입혔다는 사면십방보현좌상이다. 1972년 화재로 소실된 화장사(華藏寺)를 재건하면서 2016년 만들었다. '월인천강'처럼 세상 어디에 있는 중생이든 모두 구제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적 화려함과 거대함의 극치다. 소박한 석상이라도 충분히 아름다운 자리건만, 중국인들은 보는 이의 입을 떡하니 벌려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어메이산의 최고봉 해발 3099m 만불정(萬佛頂)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해발 3079m 금정(金頂)에는 그와 이름이 같은 금정 누각이 금빛으로 우뚝 서 있다. 명대 만력 연간에 지어졌다가 소실된 것을 1989년 어메이산의 모든 불교 사찰에 대한 고증을 거쳐 완공했다는데 일출 햇살을 받으면 금빛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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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산 금정 ▲ 해발 3,079m 금정(金頂)에는 그와 이름이 같은 금정 누각이 금빛으로 우뚝 서 있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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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어메이산 최고봉인 만불정 ▲ 만불정 아래 운해는 바람에 밀려왔다 절벽에 부딪쳐 서서히 파도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물결이 되어 일렁인다. ⓒ 김대오

금정에서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방이 운해로 둘러싸여 어딜 봐도 한 폭의 수묵화다. 특히 멀리 만불정 아래 운해는 바람에 밀려왔다 절벽에 부딪쳐 서서히 파도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물결이 되어 일렁인다. 발아래 출렁이는 운해의 파도를 밟고 우뚝 솟은 인간 세계의 섬 끝자락에 이렇게 서게 될 줄이야.


이를 바라보는 모든 이는 은은하면서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生生不息), 위대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사찰 건물을 흔히 고해를 건너 사바세계로 인도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하는데 해발 3000m 단애 나루터에 운해로 둘러싸인 어메이산의 금정이야말로 반야용선에 가장 근접한 배가 아닐까.


1316년, 고려 충선왕을 대신해 어메이산 치제(致祭)에 참석했던 이제현은 이렇게 노래했다. "삼라만상이 태초의 무극으로 돌아가니, 온 우주가 스스로 고요하고 텅 비었도다(萬象歸無極, 長空自寂寥)" 이제현은 아마도 이 운해에 뒤덮인 풍경을 태초의 무극으로 돌아가 텅 비었다고 노래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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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산 출렁이는 운해 ▲ 발아래 출렁이는 운해의 파도를 밟고 우뚝 솟은 인간 세계의 섬 끝자락에 이렇게 서게 될 줄이야.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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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산 원숭이 ▲ 원숭이 한 마리가 설경의 무대 위에 ‘짠’하고 나타나 관광객이 주는 바나나를 받아먹는다. ⓒ 김대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어메이산을 내려오는데 안개, 눈, 구름 그리고 어메이산이 연출하는 대자연의 멋진 변검(變臉) 공연을 감상한 느낌이다. 이 공연에서 빠질세라 뒤늦게 원숭이 한 마리가 설경의 무대 위에 '짠'하고 나타나 관광객이 주는 바나나를 받아먹는다. 끝까지 어메이징한 어메이산이다.


우뚝 솟은 산정의 웅장함(雄)과 험준한(險) 절벽에 서식하는 빼어난(秀) 경관, 신선이 살 법한 그윽함(幽)과 하늘로 통하는 문이 있을 법한 운해의 신비로움(奇)을 간직한 어메이산. "어메이산이 천하에서 으뜸 빼어나다(峨眉天下秀)"는 말을 당분간은 가슴에 간직해야 할 것 같다.


김대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