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난 23번, 이정은 선배는 1번"... 이 배우는 왜 '아차' 했을까

by오마이뉴스

[액터 인사이드] <미션 파서블> 속 두호 엄마로 분한 배우 박지연


작품 속 '주연'과 '조연', 그리고 '단역'의 구분은 있을지언정 연기와 인생의 주연, 조연은 따로 없습니다. 액터 인사이드는 연기를 해오며 온갖 희로애락을 겪었을 배우들을 응원하는 코너입니다.


단편과 독립영화까지 포함하면 이 배우가 출연한 작품만 100편 남짓. 16년의 연기 경력을 쌓아오면서 말 그대로 이 배우는 한 장면, 단 한 컷에 나올지언정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빛났다. 그 주인공은 배우 박지연이다.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영화 팬이라면 그가 온몸으로 표현한 캐릭터나 장면들 몇 개에 아마 무릎을 칠지 모른다.


오마이뉴스

박지연 배우 ▲ 영화 에서 두호 엄마 역의 박지연 배우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소속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단 '네 번' 등장할지라도

현재 상영 중인 <미션 파서블>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미디와 액션을 버무린 상업영화에서 박지연은 '드라마성'을 강조하는 연기를 보였다. 그가 맡은 두호 엄마는 주인공 우수한(김영광)의 과거와 관련된 캐릭터로 마냥 가볍게 보일 수 있는 우수한과 영화에 무게감을 더하는 중책을 맡은 캐릭터 중 하나였다. 그의 노력이 빛바래지 않았다. <미션 파서블>은 영화 <미나리>가 개봉하기 직전까지 국내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며 내내 상위권을 지켰다.


지난 4일 서울 성산동에 위치한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지연은 "감독님도 그렇고, 영화 자체도 개봉까지 좀 오래 기다렸는데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운을 뗐다. 연출자인 김형주 감독과는 2008년 <초감각 커플> 때 작은 역할로 출연한 인연이 있었다. 그때를 기억한 감독이 배우를 다시 부른 것. 그 사이 박지연은 드라마와 영화를 가리지 않고 필모그래피를 쌓아오고 있었고, 감독 또한 그의 꾸준함을 지켜봤다고 한다.


"감사했다. 지금도 전 계속 오디션을 보는 배운데 기회를 주셨다. 감독님이 작품을 쓰시면서 우수한이 너무 가볍게만 그려지는 느낌이 있을 것 같아서 두호 엄마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우수한과 두호 엄마의 신랑, 그리고 제 캐릭터는 동기였다. 신랑과 우수한은 특수부대를 택한 거고, 두호 엄마는 경찰을 택한 것이지. 임무 수행 중 신랑이 사망한 것에 우수한은 책임을 느끼고 두호 엄마를 챙기려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 영화 의 한 장면. 해당 작품에서 박지연은 경찰이자 한 아이의 엄마를 연기했다. ⓒ 메리크리스마스

대본을 보자마자 박지연 또한 주인공 캐릭터의 무게감을 실어 줄 캐릭터를 고민했다. 경찰로 등장하지만 아픈 아이의 엄마라는 설정에 더 집중했고, 입체감을 주기 위해 전직 특수부대 출신인 한 여군의 유튜브와 아픈 아이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캐릭터를 준비했다. 단 4장면에 등장하는 캐릭터였지만 감독의 부름을 받은 배우 입장에선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사실 저만 영화에서 너무 진지하게 나와서 감독님께 살짝 두호 엄마 캐릭터로도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지 의견을 내기도 했다. 감독님이 바로 아니라고 하시더라"며 웃어 보이는 그에게 코미디와 액션 중 혹시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는지 물었다. 영화 <코리아>에서 탁구 선수로 등장했던 경험을 들며 "일단 액션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운동 신경이 나름 좋은 편이라 액션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생애 첫 장편 영화 주인공 경험 소중해"

오마이뉴스

박지연 배우 ▲ 영화 에서 두호 엄마 역의 박지연 배우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소속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앞서 <코리아>를 언급하긴 했지만 박지연은 작품 수만큼이나 중복 역할 경험도 많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2010), <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 드라마 <호구의 사랑>과 <라이프> 등에서 모두 간호사 역을 맡았다. 6번 정도 했던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그 이상 했을 것 같다"며 "선생님이나 기자 역할도 여러 번 했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드라마 <미스 미: 복수의 여신>에선 조감독, <유령을 잡아라>에선 형사 역을 맡아 사건 전개에 기름칠을 톡톡히 했다.


그러던 그가 온전히 장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이끌어간 경험이 있으니 그 작품이 지난해 7월 개봉한 독립영화 <루비>였다. 김명진 작가의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가는 문화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박지연은 과학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국 PD로 등장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에 오래 걸리진 못했지만, 이 영화로 그는 난생 처음 부산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한 독립예술영화관이 주최한 특별전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루비>가 제게 특별한 이유야 너무 많다. 솔직히 제가 장편 영화의 첫 주인공이 됐다는 게 있고, 부산영화제도 다녀오게 됐고, 극장 개봉도 했다. 주연을 해보니 정말 다른 책임감이 들더라. 좀 더 유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다 보니 한정된 시간 안에 촬영해야 했는데 정신력 또한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작품의 주인공들을 더 존경하게 됐다(웃음).


제가 이런 경험이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홍보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다. 연기적으로 자신감을 심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제 삶과 연관성이 있어서 공감도 많이 됐고. 제겐 자식 같은 영화인데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웃음). 아, IPTV엔 풀려 있다!"


이 과정에서 박지연은 다소 놀랄 사연 하나를 전했다. <루비> 전에 이미 또 다른 장편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돼서 촬영까지 마쳤는데 그만 감독이 잠적해버린 일이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안 된다. 아마 부담감을 크게 가지신 것 같은데, 덕분에 당시 만났던 배우분들과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고 박지연은 덤덤하게 전했다.

첫 기억의 잔상

나름 산전수전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을 거쳐오면서도 박지연은 "단 한 번도 연기를 그만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나서진 않아도 누군가 시키면 해내는 성격의 아이로, 유년 시절 걸스카우트와 방송반, 응원단 등을 경험하며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대략 맛봤다고 한다. 그러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순간이 있었으니 미국에 사는 친척네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배우들의 공연 준비 모습을 본 때였다.


"이모와 이모부가 뉴저지에 사신다. 같이 라디오시티를 갔는데 나비 모양의 조형물을 배우들이 어깨에 메고 군무를 하고 있더라. 와, 나도 저런 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방송반도, 응원단도 제가 먼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다 스카우트 된 거다. 나서는 성격은 아닌데 시키면 또 한다(웃음). 앞에 서면 나도 모르는 에너지가 생기는 게 신기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 무대를 보니 전까진 정확히 뭘 하고 싶다는 게 없었던 터에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래서 연극영화과에 갔다. 목표가 생기니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더라. 막상 연기를 배우니 외적으로 에너지를 뿜어내기보단 나 자신을 엄청 바라보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대학 때 사춘기가 왔다. 연기를 그만둘 생각은 안했지만 연기로 먹고살 순 있을까 생각을 했다. 사실 학교 다닐 땐 수업 끝나면 연극 연습하고, 주말엔 단편 영화 찍기 바빴다. 오히려 졸업하고 1년간 극단에서 연기하다가 매체 연기가 하고 싶어 객원 단원으로 전환한 후에 자유시간이 많아졌다. 그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언제 작품이 들어올지 모르니 카페 등 시간이 고정적인 건 하지 않았고, 전시 행사나 모델하우스 행사장 일을 했다."


오마이뉴스

박지연 배우 ▲ 영화 에서 두호 엄마 역의 박지연 배우가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소속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최근까지도 박지연은 가족 일을 도와 아동복 모델도 하고 직접 제품 배달까지 하는 등 생활 전선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난해엔 친한 뮤직비디오 감독을 도와 뮤지션 잔나비의 뮤직비디오 스태프까지 경험했다고 한다.


대학 동문으로 이뤄진 '왕십리 액터스'는 그의 버팀목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속사를 찾기 전 박지연은 동문들과 함께 프로필을 돌리며 오디션 기회를 얻기 위해 발에 '땀나게' 돌아다녔다. 박지연은 <오빠생각> 출연 당시 일화를 하나 전했다. 임시완, 고아성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 박지연은 전쟁 고아들의 보모인 소담을 연기했다.


"감독님이 우리 팀에 시나리오를 주시면서 역할을 준비해보라 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더라"며 박지연은 "제가 그때 서른하나였는데 나이는 신경 안 쓰고 소담을 준비했다. 전쟁 중 장애가 생긴 캐릭터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난청이 있고 혀짧은 소릴 하는 걸 연기했는데 감독님께서 감동이었다며 기회를 주셨다"고 말했다.

어떤 다짐들

물론 뼈아픈 기억도 많다. 앞서 언급한 <내 사랑 내 곁에>는 모든 촬영 분량이 통편집 당했고, 힘겹게 역할을 따낸 영화 <카트>에선 대사 한마디 하지 못했다. "독립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상업영화와 공연을 꾸준히는 했지만 내 위치가 참 애매하다고 생각했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슬럼프였다. 그때도 오디션은 계속 봤다. 근데 정말 하기 싫은 때가 있더라. 왜 이런 배역만 시키지? 난 더 잘할 수 있는데 생각하면서도 캐스팅이 되면 꾸역꾸역 해냈다. 1년 넘게 그런 시기를 보냈다. 오디션을 보러 가기 정말 싫으면서도 못 간다며 핑계 대긴 싫었다. 피해버리면 뭔가 지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카트> 때 조합원 역할이었는데 그때 조합원 1부터 23까지 있었거든. 캐스팅 연락을 받고 대본을 보는데 대사가 있는 조합원은 1번부터 5번까지였다. 속으로 '난 그래도 경력이 있으니 5번 안에 들겠지' 싶었는데 23번이더라.


그때 1번이 이정은 선배였다. 이미 연극계에서 엄청 선배셨지. 60대인 한 선배도 조합원으로 연기하셨다. 그때 아차 싶었다. 이제 전 서른하나인데 대사 없는 역할이라도 최선을 다하시는 다른 선배들을 보며 힘든 마음이 훅 지나가더라. 당시 이정은 선배 차를 얻어타고 현장에 다녔는데 제가 많이 의지했다. '선배, 연기 힘들어요' 이러면 잘 버티는 것에 대해 얘기해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늘 자기반성을 하신다. 본인께서 잘하고 있는지 고민이 된다고. 거기에 위로받는 게 있다. 선배님들도 반성하시는 걸 보면 닮고 싶다. 근데 슬럼프는 또 올 것이다. 그때마다 버티는 거지! (웃음)"


박지연은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고 힘줘 말했다. 지금도 스스로를 부족한 배우로 칭하면서도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등의 작은 역할을 거치며 생기는 연기적 경험을 편견 없이 흡수하고 있어 보였다.


"되게 오글거리는 얘기지만 연기는 절 살아있게 하는 것 같다. 계속 생각하게 하고, 애태운다. 속상하다가도 잘 해내면 너무 기쁘다. 삶의 오감을 자극해주는 거랄까. 마치 롤러코스터에 탄 듯 말이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할머니가 돼서도 하고 싶다. <디어 마이 프렌즈> 같은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어렸을 때 갖고 있던 조급함이 지금은 없다고 할 순 없다. 그래도 빠르지 않게 천천히 마라톤 하듯 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선 대견하고, 또 어떤 부분에선 욕심 좀 내라고 채찍질하기도 한다. 성동일 선배 말씀이 이게 다 저축이라고 하셨거든. <미션 파서블>에서 두호 엄마를 만난 것도 지금까지 제가 한 것에 대한 보너스 같은 느낌이다. 배역에 충실하게! 초심을 잃지 말자. 이게 제 다짐이다."


박지연은 현재 영화 <출장수사>와 애니메이션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의 작업을 마친 상태다. 드라마 또한 현재 촬영 중이다. 학창시절 반 대표 계주 대회에서 마지막 주자로 항상 뛰며 생긴 그의 별명을 기억해본다. '역전의 여왕'. 박지연의 연기 인생 또한 역전을 위한 담금질 과정이지 않을까.


이선필,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