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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내 눈에 띄지 마라"... 아버지가 반대한 귀농으로 성공하다

by오마이뉴스

[지역을 바꾸는 사람들] 이영수 사람 사는 농원 대표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다. 동네 수재라고 칭찬이 자자하던 아들을 서울대학교에 보냈더니 고향에 내려와서 농사짓겠다고 하는데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얼굴도 안 보겠다는 극심한 반대에도 고향에 돌아와 14년째 농사를 지으며, 이제는 마을 이장을 무투표로 3선째 할 정도로 지역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으로 성장했다. 영천시 임고면 '사람 사는 농원' 이영수 대표 얘기다.


이영수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효리에서 1974년 2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땅 한 뙈기 물려받지 못했지만 하천에서 자갈을 골라내 과수원을 만들어 동생 넷을 치송하고, 5남매를 훌륭히 키우셨다고 한다. 지금은 폐교된 10리 떨어진 금대초등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의 높은 교육열과 학교 선생님들의 권유로 6학년 때 대구시로 전학을 가게 되어, 대구중학교와 덕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서울대 농촌사회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1998년 대학 졸업 후 공익근무를 마치고, 2003년부터 2008년 초까지 5년간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에서 상근활동가로 활동하였다. 전농에서 함께 활동하던 방현경과 2005년 결혼하여 2008년 함께 고향에 돌아와 14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그에게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물어봤다.

전농에서 보낸 5년

- 보통 사람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농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성적에 맞추어 과를 선택한 거 아닌가?


"중학교 때부터 희망대학 란에 서울농대라 기재한 걸 보면 농업・농촌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같다. 농촌에서 자란 행복한 기억과 함께 우리 부모님처럼 열심히 사는 분들을 위해 뭐라도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 대학 다니면서 공부도 꽤 잘해 교수들이 대학원 진학을 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농민단체 실무자로 들어간 계기가 있나.


"장학금을 받을 만큼 농업관련 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다. 서울대 농대 부학생회장 활동으로 수배되어 1997년 조계사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졸업 후 수형생활로 인해 현역을 갈 수 없어 공익근무 요원으로 근무하였다.


2002년 공익 근무를 마칠 무렵 지도 교수님이 대학원 진학을 권유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농에서 활동하던 선배의 부탁으로 11월 13일 농민대회에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자원봉사를 했다. 준비과정에서 느꼈던 현장의 역동성에 감명 받아 공부를 해도 현장을 알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전농의 상근 활동가로 결합하게 되었다. 2003년 3월부터 2008년 초까지 5년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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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농 활동 시절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농민대회. 맨 오른쪽이 이영수 대표 ⓒ 이영수

전농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해방 후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2002년 11월 13일 농민대회를 잘 기억하고 있다. 나도 참여할 정도로 당시 열기가 뜨거웠다. 쌀 수매가 하락,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2004년 세계무역기구(WTO) 재협상을 앞두고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농민들이 16대 대선 직전에 '30만 농민대투쟁'을 벌였다. 실제로 13만 명의 농민이 여의도에 모였다. 해방 후 농민운동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농민들의 반대에도 2002년 12월 한·칠레 FTA 협상이 타결되고 국회 비준을 거쳐 2004년 4월 1일 발효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WTO 재협상에서 밥쌀용 쌀 수입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2005년 11월 15일 쌀 수입 개방에 반대하기 위한 10만 명 전국 농민대회가 열렸다.


이때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전용철·홍덕표 두 농민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고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정부는 2006년 1월 '평화적 집회·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 공동위원회'(공동위원장 이해찬 총리, 함세웅 신부)를 출범시키고 6개월간 한시적으로 운영하였다. 나는 당시 농민단체 추천으로 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위원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났다.


이 무렵 농민단체의 투쟁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해외로 나갔다. 2003년 9월 WTO 5차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농민투쟁단을 멕시코 칸쿤에 파견하였고, 이때 이경해 전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장이 "WTO가 농민을 죽인다"(WTO kills farmers)를 외치고 자결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5년 12월 WTO 6차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1000여 명의 농민이 홍콩투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100여 명의 농민이 회의장 인근 바다에 뛰어들며 "DOWN DOWN WTO"를 외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평화시위 투쟁을 벌여 한국농민에 대한 찬사가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농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에도 신자유주의 농정을 막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 이 시기에 전농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일을 주로 하였나. 그리고 소회를 간단히 말해 달라.


"한·칠레 FTA로 유치원생도 FTA란 말을 안다고 할 정도로 전농의 투쟁이 치열했다. 전농에 들어가자마자 외교통상부에서 만든 자료가 터무니없어 밤새 '한·칠레 FTA의 오해와 진실'이라는 자료를 만들었다. 이것이 한·칠레 FTA 반대 투쟁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나 농과대학 등 수많은 농업학자들이 있는데 도대체 뭐 하는지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FTA와 WTO 반대 투쟁으로 국제협력 사업이 많아 그 뒷바라지를 하였다. WTO 각료회의 전농 원정 투쟁단을 위한 항공표와 숙소 예약 등 실무는 물론이고 국제조직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맡았다. 특히 홍콩 투쟁은 기획 회의부터 마무리까지 전체 기획과 실무를 담당했다. 홍콩에는 본 대오가 오기 전에 미리 가서 준비를 했고, 투쟁기간 본 대오와 함께했고, 마지막 구속자 재판 투쟁까지 3개월을 더 추가로 홍콩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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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투쟁 구속자 재판에서 모두 무죄 선고를 받은 뒤 홍콩법원 앞에서 홍콩시민들과 기념 촬영(2016년 3월) ⓒ 이영수

홍콩에서 한국 농민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연말 홍콩 시민의 인기투표에서 2위를 할 정도였다. 또 한국 농민 투쟁을 지지하는 자발적 홍콩시민 그룹이 생겨 구속자투쟁 3개월을 동료처럼 지냈다. 그때 '농민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홍콩에 전수되어, 지난 2019년 홍콩민주화투쟁에서 많이 불려졌다. 역사적인 홍콩투쟁으로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어 미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지만, 투쟁을 기획하고 실무를 책임졌다는 것이 뿌듯하다.


정책과 국제연대의 전문 일꾼이 되어주길 바라는 분들도 있었지만 현장일꾼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5년간 근무한 전농 상근활동을 정책국장으로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귀농했다."

"복숭농사 지어가 굶어죽지는 않겠다"

- 귀농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잘 극복하고 최고의 복숭아 농사꾼이 되었다. 농사 규모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다. 힘들게 공부시켰더니 농사지으러 온 아들이 괘씸해 '농사짓고 싶으면 내 눈에서 안 보이는 데서 지어라'라고 하실 정도로 반대하셨다. 그런데 귀농하면서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았고 자연스레 아버지가 짓던 농사를 거들게 되었다. 복숭아, 살구 농사가 주였다.


아버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말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겨우내 전정(剪定)을 배우러 다녔고, 선진 영농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첫해부터 직거래를 시작하여 부모님이 농사지을 때보다 소득을 배 이상 내니 내심 좋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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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스러운 복숭아 ⓒ 이영수

2008년 봄 귀농할 당시 부모님은 하천을 개간한 과수원 2500여 평과 논 다섯 마지기를 농사 지었다. 현재 나는 복숭아 8000평, 포도·살구·사과 등 1만 3000평 정도의 과수 농사를 짓고 있다. 절반 정도는 자가 소유고 절반은 시유지와 임차다.


부모님한테 550평을 물려받았고, 귀농과 함께 후계자 자금 등 정책자금을 받아 농장 인근의 농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귀농 인구가 거의 없어 농지가격이 지금의 절반수준도 안 되었고, 또 지주들이 젊은 농민을 도와준다며 기꺼이 땅을 팔아줘서 현재의 과수원을 한 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초기 매입가는 평당 5만 원 선이었으나 점차 올라 8만 원, 10만 원에 매입했고 현재는 배 이상 가격이 올랐다.


매출은 2억 원이 넘지만 정책자금상환과 생산비를 제하면 순소득은 생활해 나가기 빠듯한 상황이다. 생산물의 70%는 직거래로 그리고 30%는 생협에 판매하고 있다. 현재 가공분야 쪽에 관심을 갖고 조각과일 시장을 눈여겨보고 있으며 내년 초 작은 규모의 공장이 완성될 예정이다."


- 복숭아를 친환경적으로 재배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친환경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가?


"복숭아 수확기는 고온다습한 여름이다. 고온다습은 벌레와 균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조건이기에 친환경적으로 재배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우리 복숭아를 믿고 껍질째 먹을 수 있다는 걸 자랑하면 뿌듯하다.


농사도 과학이다. 하늘이 준 조건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평생 공판장에서 일등 하는 사람은 일등 하고 꼴찌 하는 사람은 꼴찌 한다. 아버지한테 인정받기 위해 정말 열심히 배웠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국내 최고의 복숭아 고수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복숭아 전국 고수들이 모인 복숭아사랑동호회에 가입해 현재 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복숭아에 미쳐 자비로 일본 야마나시(山梨)로 복숭아 견학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단순히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지역 복숭아 농가들의 기술 향상을 위해 면사무소 회의실을 빌려 6개월간 복숭아 학당도 운영하고, 농민회 회원들 10여 명과 전정단을 꾸려 겨우내 전정도 하고 복숭아 공부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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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고농민회에서 주최한 복숭아 학당 ⓒ 이영수

- 복숭아 농사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 일손 부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현재 농촌은 일손을 구하는 게 최고의 능력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상시적으로 도와주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지만 많은 인원이 필요한 적과(摘果)와 봉지 씌우기 작업을 할 때는 일손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일손 구하기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다.


지금 대부분의 젊은 농민들은 규모화를 지향하고 있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는 또 규모가 큰 농가를 인력 사장들이 우대하므로 외국인 일손 구하는 데도 소농에 비해 유리하다. 일손 문제 해결책으로는 도시의 유휴 노동력을 농촌으로 유도하는 방법이 있는데 현실은 '전문성이 결여된 도시 노동자들이 촌에 바람 쐬러 오는 마음'으로 노동을 하기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나름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진 도시 인력팀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에서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도시민들에게도 소득으로 이어지는 정책을 정착시키면 좋겠다. 또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규제를 완화해 농가별로 영농 작기에 맞게끔 몇 개월씩 입국해 일하다 돌아가 매년 다시 입국할 수 있는 농업 계절근로자 제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 이영수씨와 부인 방현경씨는 이른바 농투신(농촌 투신) 세대이다. 어떤 각오로 귀농을 하였고, 귀농 후 농민운동을 어떻게 하였나? 영천농민회와 임고면 지회가 모범적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농촌에서 태어나 영원히 농업・농촌・농민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현장 활동가가 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내는 경남 함양 농촌 출신이지만 나름 부잣집에서 자라 농사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농에서 함께 활동하여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손이 재빠르고 손재주가 있어서 농사일을 잘 한다.


영천으로 내려와 우선 부모님께 인정받는 일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농민회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기반을 잡는 일에 집중했다. 귀농 4년 차 되는 어느 날 나무 한쪽에 앉아서 전정을 하고 있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아버지가 "복숭농사 지어가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한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나를 인정해 주신 거였다.


그때부터 사고 지회로 있던 면지회의 총무를 맡아 임고면 지회를 본격적으로 결성했고, 당시 7명이었던 회원이 현재 76명으로 늘어났다. 임고농민회를 조직하면서 내 건 기치는 농민들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몸에 좋은 제철 음식을 먹으며 농업・농촌 이야기 해보자는 것이었고, 그 덕에 코로나 전까지 매월 첫째 수요일 월례회의를 해왔다.


임고 지역의 성과가 다른 면지회에 퍼져나가고 10여 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영천시 농민회 회원들도 젊고 새로운 신입 회원들이 점차 가입하면서 현재 군농민회의 회원은 20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점차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한때 농민회가 지역 단체장들이 모이는 금요회에 가입하려 해도 단체들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농민회원들이 주요 단체장들을 맡아가고 있다.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농민회는 정치적이고 과격하다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물러서지 않아야 될 것에는 분명하되, 생각이 유연하고 행동이 폭넓은 농민회 기풍을 만들 필요가 있다."

어떤 이장이 되느냐에 마을 달라져

- 귀농해서 지금껏 면지회 사무장과 군농민회 정책실장 사무국장을 계속 맡아왔고 지금은 농민수당추진집행위원장을 맡아서 타 농민단체와 연대를 도모하고 있다.


이장 하기가 대통령 하기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장을 무투표로 3선째 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마을에서 이장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


"귀농해 보니 동네 산기슭에 27홀의 영천CC가 들어설 예정이었고 이미 도지사 허가를 받아 공사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같은 성씨가 많고 품성이 온화해 점잖기 소문난 동네였는데 골프장 찬반 때문에 동네가 사분오열 직전이었다. 도지사 허가까지 난 상황이라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고 피해 최소화와 보상이 관건이었다.


동네 어른이 마지막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데 그래도 많이 배운 자네가 와서 한 번 보라고 하셔서 마지못해 참석했다. 합의서를 보니 가관이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을 동네 주민들이 진다는 둥 전적으로 주민들에게 불리한 내용이었다. 골프장대책위 총무를 맡아 원점에서 투쟁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에 골프장과 합의하여 상수도 설치 등 16억 원 가까운 합의금을 받아 동네 총회를 통해 만장일치 박수로 기분 좋게 승리하였다. 골프장 투쟁은 소중한 경험이었고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였다.


귀농하면서 언젠가는 내 고향 동네에서 이장만큼은 꼭 한 번 해보리라는 큰 뜻이 있었다. 골프장 투쟁을 마치고 어른들은 곧바로 이장을 하라고 하셨지만 농민회 활성화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양하고 마을청년회 총무, 골프장대책위 총무, 새마을지도자로 일을 도왔다.


그 후 생각보다 빨리 44살에 동네 어른들의 추대로 이장이 되었다. 그전에는 3년씩 했는데 영천시 조례에 따라 동네 어른들을 설득해 2년씩 3선까지로 변경했다. 지붕 개량, 방충망 전수 교체, 벽화 그리기, 한글 교실, 음악 교실 등 여러 사업을 했다. 다행히 마을 주민들이 좋아라 하고 지지해 주시니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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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행사에 모인 동민들 ⓒ 이영수

마을이장 하면 해마다 한 명씩 원수가 생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골 마을의 이장 역할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이장만큼 보람된 일도 없는 것 같다.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은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요구인 반면, 이장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장 우리 마을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주민들이 바로바로 혜택을 받고 반응이 온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어른들은 더 하라고 하시지만 조례가 정한 대로 그만큼만 하고 그만둔다고 말씀드렸다. 남은 임기 잘 마무리해 성공한 이장이 되고 싶다. 그래서 우리 마을 어르신들이 더 행복하고 우리 마을이 더 살기 좋은 동네가 되는 길에 힘을 보태고 싶다.


동네 이장 선출이 정말 중요하다. 어찌 보면 시의원보다 이장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원은 일을 적게 해도 표시가 덜 나지만 이장은 일을 적게 하면 당장에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 어떤 이장이 되느냐에 따라 마을이 달라지고 지역이 달라진다. 차기 대통령은 이장에게 월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주고 그만한 역할을 요구했으면 한다."

농협개혁의 핵심은 조합장 선출

- 농협은 농촌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이지만 농민들의 농협에 대한 불만이 많다. 농협개혁이 중요한 과제인데 잘 되지 않고 있다. 농협 이사로서 농협개혁에 대한 생각을 들려 달라.


"농협개혁은 농민들의 오랜 숙원이다. 대학 졸업논문을 농협개혁에 대해 쓸 정도로 농협개혁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고 전농에서 협동조합개혁위원회 실무도 잠시 봤지만 주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불을 지피고 싶어 괴산 불정농협 남무현 조합장을 영천에 초청해 강연을 듣고 뒤풀이 하면서 우리도 불정농협처럼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한 임고공부방이 2013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월 3자 달린 날에 모였다. 복숭아 수확기 때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 공부방에서는 모일 때마다 임고농협 정관을 같이 읽고 토론하였으며 괴산 불정농협의 선진 사례를 공부했다. 3년을 진행하면서 250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참여한 교육과 대의원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고 점차 영향력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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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고공부방 정기 모임 ⓒ 이영수

임고공부방의 활약이 커지면서 회원들이 이·감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돈 선거에 패했다. 두 번의 임원선거에서 떨어지고 나니 회원들의 기세도 꺾이고 견제가 심하게 들어왔다. 그때 회원들이 '뒤에서 그러지 말고 이번에는 자네가 직접 한 번 나가봐라'고 해서 생각지도 않게 등록마감 사흘을 남기고 이사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당시 형님이 농협 상무로 근무해 반대가 심했지만 등록했다. 내가 등록하니 몇 번 이사를 한 지역 형님이 '영수 자네가 나오면 내가 양보하겠다'라고 해서 몇십 년 만에 투표 없이 당선되었다.


사실 농협개혁의 최대 문제는 대의원 선출 방식이다. 마을별로 이장, 새마을지도자, 총무 등 고생한 사람들에게 회의비라도 받아서 쓰라고 대의원을 시킨다. 젯밥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로 총회가 구성되니 농협 임직원들과 조합장을 견제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대의원 선출 방식을 직위와 상관없이 조합 대의원으로서 역할을 잘할 수 있고 마을 총회 때 보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선 선정하고 사람이 많으면 마을총회에서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몇몇 분들이 반대했지만 한번 겪고 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농협 총회 때도 우리 마을 대의원들이 가장 왕성하게 발언한다.


올해로 이사 4년 차인데 나름 이사회마다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한계를 분명히 느꼈다. 농협개혁의 핵심은 개혁의지와 능력을 가진 조합장 선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농협개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현재도 이·감사 선거에 수천만 원을 쓰고 조합장 선거에 수억 원을 써야 당선되는 풍토에 맞서 당선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곳곳에서 시도하고 도전해야 한다. 현재 임고공부방은 휴식기에 들어가 있다. 조만간 차기 조합장 선거를 앞두고 새롭게 모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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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고공부방에서 주최한 농협 공명선거 캠페인 ⓒ 이영수

농협만 제대로 개혁하고 농민 조합원들이 주인이 되면 삼성을 능가하는 자본과 네트워크로 세계 최강의 농민 조직을 가질 텐데, 수십 년째 농협개혁의 구호만 무성하고 더디기만 하다. 그 이유는 좋은 생각과 계획을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바꾸어나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농촌의 핵심 활동가들이 마을의 리더가 되고 지역의 리더가 되어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고 더디다. 어떻게 보면 더디고 힘든 일이기에 당장에 나서는 대정부 투쟁과 상경투쟁이 차라리 쉬울 수 있다.


농촌현장에 내려온 지 어느덧 14년 차다. 농사가 힘들기는 하지만 보람도 있을 것 같다. 이른바 지역소멸 위기 운운하지만 지역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 한 절대 소멸되지 않는다. 지역이 소멸하면 대한민국이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 특히 농촌 지역이 국민총행복을 위해 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사람의 마음 얻어야

- 농촌에 사람이 들어오고, 농촌주민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실 귀농이라 표현하지만 우리 부부는 마지막 '농투신' 세대라 봐야 할 것 같다. 농사보다 농민운동에 더 관심을 갖고 농촌에 들어왔는데, 농사를 지을수록 의외로 농사의 매력을 느낀다. 지금은 우리 인생에서 농사짓기로 결심하고 내려 온 것이 가장 잘 한 선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농사는 자연과 천지의 기원을 함께하는 일이다보니 철학이 있어야 하고 없던 철학도 생긴다. 종합예술인이다. 농사를 지으면 안 듣던 클래식이 좋아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해질 무렵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라디오를 들으며 일할 때다. 그 시간은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힐링하는 시간이다. 힐링하면서 돈을 버는 일이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 얼마나 있을까? 우리 아들이 농사짓는다면 적극 도와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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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 맛집으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맨 오른쪽이 이영수 대표 ⓒ 이영수

그렇지만 농촌생활은 쉽지 않다. 우선 매년 달라지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과는 이상기후로 인한 결실 피해로 3년째 빈 밭이고, 복숭아도 수확기 동안 지속적인 비가 내리는 등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농민들은 기후위기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해결자가 되어야 한다. 정부에서 이 지점을 주목하고 향후 농업・농촌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지역소멸위기가 심각하다. 내가 귀농한 14년 전만 해도 5년 정도는 귀농하는 인구가 없어 내가 면의 막내였다. 하지만 이후 귀농 바람이 불어 현재는 나와 관계를 맺는 또래만 50여 명이 넘는다. 그렇지만 이들 대부분은 현재 경영인자금, 귀농자금 등 정책자금 원금 상환 시기가 도래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간에 농촌생활을 희망하는 도시민들이 제법 있다.


탄소중립화 시대에 친환경농업이 매우 중요하다. 보조금 중심의 농업예산을 대대적으로 손 봐 공익적 기능에 대한 사회적 보상 차원에서 직불 금액을 대폭 확대하여 친환경농업에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토목건축 사업을 줄이고 불요예산을 활용하여, 농어촌주민 수당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지역경제를 활성화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또한 지역주민자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관료와 학계에서 계획한 농업・농촌정책이 대부분인데, 마을과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논의하고 추진하는 농업・농촌정책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마을별 활성화 자치기금을 마련하여 일정 정도의 계획과 발표 등을 통해 타당성이 있으면 선정하여 연차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정책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로써 지역 특성의 문화와 전통에 기반한 먹을거리와 유통, 축제 등을 지역민 스스로 발굴하고 활성화는 게 중요할 듯하다."


- 영천은 매우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텐데 잘 극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될 말을 부탁한다.


"처음 내려왔을 때는 옳은 주장을 하면 내 의견에 동조하고 편이 되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옳은 주장과 행동을 넘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 농협개혁의 논리와 정당성만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농협을 개혁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농민운동 진영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한 것은 활동가들이 자기 마을과 지역의 리더가 되어 마을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겠다는 장기적 비전을 갖고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화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박진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