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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소백산엔 천상의 화원길이 있다

by오마이뉴스

비로봉에서 연화봉까지 10여 킬로미터 화원은 계속된다

5년 만에 소백산에 올랐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소백산에 얽힌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있어 오며 가며 올려다보는 것에 만족했다. 겨울이 다가오던 어느 날 출근길에 알프스의 설산처럼 흰 눈 얹은 봉우리를 쳐다보며 정상을 상상했고, 다시 오를 날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내가 산을 오르는 이유

사람들은 누구나 안락하고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추구한다. 고통을 스스로 부르고 온 몸으로 받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하지만 역경의 가시밭길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힘듦과 고통 뒤에 따라오는 보상 -가령 성공과 성취감, 트라우마 극복, 자신의 단련, 삶의 전환점 마련 등등의 이유로-이 있다면 그것 또한 갖고 싶은 것들이긴 하다.


오른 만큼 정확히 다시 내려와야 하는 산을 오르는 이유는 성취감을 맛보는 자기만족 아닐까. 어려운 일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삶 속에서 잃었거나 잊고 있던 뭔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 맞는 친구와 둘이 오르게 된 소백산은 많은 시간의 터울만큼이나 두려움과 기대감이 겹쳐서 다가왔다.


가장 짧고 가파른 새밭계곡으로 비로봉에 올라 연화봉 중계소를 거쳐 중령으로 내려오는 계획이었다. 소백산 철쭉제 지원을 비롯해 계절별로 서너 번은 올랐던 터라 산세를 잘 알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날 내린 장맛비가 계곡을 가득 채워 힘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만으로도 이미 땀방울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냉기가 넘치는 숲 속 등산로엔 휴가철이라 그런지 주말임에도 등산객이 많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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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밭계곡에서 올라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 ▲ 정상을 향해 걷는 길은 푸른 초원의 목장처럼 펼쳐진 평원은 어느 집 정원보다도 아름답다. ⓒ 김영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때 나는 계단을 좋아한다. 지천명의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소리하면 무릎이 괜찮으니 자랑하고 싶은 거겠지 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적당한 다리 힘으로 적당한 높이를 반복적으로 오르는 일이니 얼마나 단순한가. 미끄러질까. 어디를 밟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단순 반복적인 한 걸음이 20cm 정도로 계속해서 고도를 높여주니 계단은 오르막을 오르는 아주 편리한 건축구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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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비로봉을 오르는 데크 계단 ▲ 비로봉을 오르는 계단은 마치 천국의 계단을 연상시킨다. 주변 풍광은 너무도 아름답다. ⓒ 김영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계단의 그 끝에는 푸른 제주목장 같은 고산 평야가 펼쳐진다. 중나리, 말나리, 비비추, 까치수영, 마타리, 물레 나무, 동자꽃, 물봉선, 범꼬리, 냉채, 꽃잎 진 후 더욱 짙어진 신록의 철쭉이 어우러진 초록 세상 가득한 천상화원.

하늘 아래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이는 소백 밖에 없고, 이를 본 이는 소백을 오른 이 밖에 없다.

친구와 천상의 정원을 걸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이는 진정으로 본 게 아니다. 바람과 구름과 흙내음을 몸이 맡고 눈이 봐야 비로소 소백에 오른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는 다름 아닌 바람이다. 비로봉에서 제2연화봉까지 십여 키로에 이르는 동안 정원은 계속된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안개구름이 실려와 소백을 감췄다가 열었다를 반복하며 시크릿 가든을 연출했다. 잘 정비된 데크 전망대에 배낭을 내려놓고 창틀처럼 생긴 보호대에 턱을 괴고 앉았으니 내 집 창가 풍경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손가락 콘서트도 열었다. 즐겨 듣던 소향의 바람의 노래를 비롯해 김광석과 백지영 등등 유명가수도 초청했다. 누구 하나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소백에 와주셨다.


우리의 걸음은 온갖 경치를 다 보고 느리게 걸었는데도 계획보다 빨라 연화봉 중계탑에 도착했을 때가 3시가 막 넘고 있었다. 데크 전망대에 다시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워 2차 콘서트를 진행했다. 저 멀리 산 파도처럼 마음이 물결치는 감동을 또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산 풍경에 버금가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정겹고 진중하게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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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산수국 ▲ 자잘한 원형 모양의 꽃 가장자리로 나비같기도 하고, 하얀 잇몸 드러낸 맑은 웃음같은 산수국은 피곤에 지친 등산객들에게 상쾌한 기분을 선물한다. ⓒ 김영래

이번 산행에서 제일 반가웠던 건 산수국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산행 때는 왜 몰랐을까. 길가 수풀 우거진 그늘 밑. 가운데 동그랗게 바닷가 고운 모래 같은 자잘한 연보라색 꽃이 있고, 가장자리에 하얀 나비 같은 꽃 예닐곱 개가 피어있는 모양. 나비 같기도 하고, 흰 잇몸 드러내고 활짝 웃는 웃음 같다. 길을 걷는 내내 잊을만하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산수국의 맑고 새하얀 웃음 꽃잎이 얼마나 정답던지 보고 또 봐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번 소백산행은 오랜 친구와 새롭게 만난 친구와 함께 천상의 정원을 걸으며 마음을 흠뻑 녹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을쯤에 다시 오르면 언제나 보고 있었으면서도 못 알아본 친구를 또 만날 수 있겠지. 소백은 늘 새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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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산수국 ▲ 수풀 우거진 그늘밑에서 등산객들을 활짝핀 웃음으로 맞이하고 있는 산수국의 아름다운 모습 ⓒ 김영래

김영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