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이슈 ]

한국 야구 초토화시킨 일본 야구 6승 투수의 '마구'

by오마이뉴스

[김은식의 야구야] 한국야구를 우물 밖으로 끌어낸 재일동포


해방 직후 한국 야구의 기술적 수준은 높지 못했다. 1946년에 한국 최초의 전국대회인 청룡기 고교야구대회(당시 명칭은 중학야구대회)가 창설되었다. 22경기가 열린 첫 대회에서는 189개의 안타와 252개의 사사구, 335개의 삼진과 270개의 도루, 193개의 실책이 기록되었고 239점이 생산되었다. 상대성의 경기인 야구에서 기록을 통해 경기의 수준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안타의 수보다 사사구와 도루와 실책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점은 기술적 숙련도가 낮았음을 방증한다.


그 무렵 이미 한국 야구의 역사는 40년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별다른 정책적 제도적 지원이나 외부적 자극을 받지 못한 채 거의 자생적으로 성장해온 한국 야구가 안고 있던 한계는 뚜렷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동경 유학생들의 방문경기를 제외하면 한국 야구에 기술적 성장을 이끌 만한 계기가 거의 없었다.


해방 전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했던 김영조와 유완식이 귀국해 선수와 지도자로서 맹활약하며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파급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었고, 두 사람 모두 포수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야구 전반의 기술 발전을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또 두 사람 모두 일본 프로야구 무대의 중심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는데,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게임과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이팔용(일본명 후지모토 히데오) 같은 정상급의 선수들은 일본에 남아서 계속 활약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모국방문경기


오마이뉴스

▲ 모국을 방문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힘든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통해 한국의 야구인들에게 많은 자극을 줄 수 있었다. 사진은 1959년 제 4차 방문팀이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 모습이다. ⓒ 국가기록원

그런 점에서 1956년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에 의해 시작되어 1997년까지 지속된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가 한국야구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30여 년 전 동경 유학생 방문경기 이후 처음 이루어진 조직적인 선진 야구기술 전수로서 한국 야구의 기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였고,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선수와 지도자를 공급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전역에서 우수한 고교야구 선수들을 모으고 한 달가량 합동훈련을 하며 팀워크를 다진 뒤 대한해협을 건넌 재일동포팀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한국의 강팀들을 연파했다. 1956년에 방문한 1회 팀이 12경기를 치러 9승 3패를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57년에는 13승 2무 1패, 1958년에는 12승 1무 1패, 1959년에는 14승 1무 2패, 1960년에는 14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1957년의 동산고, 1958년의 부산상고, 1959년의 경남고와 1960년의 경동고 등 그 해 한국 고교야구 무대를 초토화시켰던 절대강자들이 간신히 1승 1패 정도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정도였는데, 부족한 선수와 장거리 원정, 그리고 무더운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시간적 한계 안에서 쫓기며 강행되는 무리한 일정과 일방적인 반대 응원을 감안하면 재일동포 선수들의 막강함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행사를 주관한 한국일보는 당시 재일동포팀의 경기 모습에 대해 자세히 분석해서 보도했는데, 1차 방문팀이 경기고와의 1차전에서 6대 1로 대승한 다음 날인 1956년 8월 8일 자에서 발견되는 놀라움의 요소들은 예컨대 이런 것들이었다. 투수들이 '스피드 있는 커브'를 던진다는 점, 외야수들이 큰 타구들을 여유 있게 잡아낸다는 점, 모든 타자들이 '합리적인 타격폼'을 취한다는 점, 주자가 홈에 쇄도하면서 슬라이딩한다는 점.


반대로 재일동포팀을 이끌었던 이수진 감독이 한국 선수들을 관찰하고 남긴 비평은 이런 것들이었다. 우선 투수교체를 하는 팀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모든 팀에 투수가 부족하다는 점, 투수들의 구종이 단순하다는 점, 포수가 안쪽과 바깥쪽 조절이 거의 없다는 점, 모든 타자들이 배트를 잡을 때 두 손이 벌어질 정도로 타격폼이 좋지 않다는 점, 타자들의 체격과 상관없이 모두 크게만 휘두른다는 점, 내야수와 외야수의 수비가 모두 좋지 않다는 점, 그리고 경기중에 선수들이 서로 응원하는 모습이 없다는 점.


지금 생각하면 야구의 가장 기초적인 기본기들에 대해 당시 한국의 선수들은 무지했고, 재일동포 선수들은 익숙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기본기들이 승부에 미치는 직접적인 효과들은 매우 빠르게 한국의 야구 지도에 반영되었고, 선수들의 기량도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야구의 성장을 직접 이끌다


오마이뉴스

▲ 일본 프로야구 출신의 김영덕은 한국 야구에 생소하던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며 실업야구를 휩쓸었고, 은퇴 후에는 북일고와 OB 베어스,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서 많은 활약을 했다. ⓒ 두산 베어스

1950년대 내내 1승 건지기도 쉽지 않았던 한국의 고교팀들은 1960년대 들어 조금씩 나아진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1961년에는 경기공고, 동산고, 성동고, 중앙고, 경남고가 각각 1승씩을 건지며 재일동포팀의 전적을 11승 2무 5패로 조금 낮췄고, 1962년에도 중앙고와 선린상고가 1승씩, 서울선발팀이 2승을 거두며 11승 1무 4패에 만족하게 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1968년에는 5승 6무 5패, 1970년에는 6승 2무 6패로 재일동포팀과 한국팀들의 승패 균형이 맞춰지기에 이른다. 물론 여전히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에서 싸운 재일동포팀의 실력이 조금 더 앞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0여 년을 두고 한국 고교야구의 실력이 훌쩍 향상되었음 역시 분명했다.


한국 야구의 빠른 성장이 단지 재일동포 선수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방문경기를 마친 뒤 직접 한국 야구계로 뛰어들어 선수와 지도자로서 맹활약하며 한국 야구의 발전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그 시점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수들 대부분 일본에서 나고 자라긴 했지만 일본어보다 한국어에 더 익숙한 부모와 함께 자란 이들이었다. 부모의 형제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나라에서 먹고 살길만 있다면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일본에서의 생활을 고집할 이유가 많지 않은 이들이 많았고, 더구나 일본에서 야구 선수로서 대성할 가능성이 낮은 처지라면 차라리 한국에서 야구로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1957년 2회 방문팀의 주축 투수였던 배수찬이 2년 뒤인 195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의 국가대표팀으로 참여한 뒤 1960년에 영구귀국해 교통부 실업야구팀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 3회 팀의 현성호와 박정일, 1959년 4회 팀의 김성근 등이 되돌아와 실업팀과 국가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가세했다.


특히 1962년 시중은행들이 일제히 야구팀을 창설하면서 실업야구리그가 급격히 팽창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재일동포 선수들은 더욱 늘어났다. 실업야구가 단기 대회 중심에서 리그 중심으로 재편되어 운영되면서 경기 수가 늘어났고, 선수들 역시 일반 업무가 아닌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단기간에 팀의 전력을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재일동포 선수들의 영입에 보다 적극적인 팀들이 늘어난 것도 물론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신)에서 한 8년 있었죠. 초반에 시즌 6승을 한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잘 안 풀렸어요. 선수로서 전망이 잘 안 보였죠. 그때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김성근이 한국에서 국가대표와 실업야구에서 에이스로 잘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한국에서 야구 선수로서의 길을 다시 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때 일본에 와 있던 백인천에게 다리를 좀 놓아달라고 부탁을 했죠." (김영덕, 전 OB 베어스, 빙그레 이글스 감독.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대표 에이스 신용균, 실업야구의 지배자 김영덕


오마이뉴스

▲ 신용균은 일본에서 사회인야구(실업야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1963년 모국방문경기 직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대표팀에 참가해 일본팀을 상대로 2승을 거두며 한국의 국제대회 역사상 첫 우승을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실업야구 선수를 거쳐 기아와 한화 등 여러 프로팀에서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 기아 타이거즈

그렇게 대한해협을 건넌 이들 중 특히 선수로서 큰 활약을 한 것이 신용균과 김영덕이었다. 1963년 6월 재일동포 성인모국방문팀의 일원으로서 한국을 방문했던 신용균은 같은 해 9월 21일부터 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국 국가대표팀에 참가해 에이스 투수로서 활약했고, 특히 일본을 상대한 예선리그전에서는 2실점 완투승, 결승 2차전에는 완봉승을 거두며 사상 첫 우승을 이끌고 대회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김영덕은 일본에서 이미 프로야구선수로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국가대표팀에 가세할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다른 재일동포 선수들보다도 한 수 높았던 기량을 한국 실업야구 무대에서 과시했다.


1964년 해운공사 야구부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에 등장한 김영덕은 48경기밖에 치러지지 않던 그해의 실업리그에서 무려 33경기에 출전해 혼자 255이닝을 던지면서 단 9점만을 허용함으로써 0.32라는 무시무시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한 번의 퍼펙트게임과 두 번의 노히트노런, 54이닝 연속 무실점기록, .994의 실업야구 통산 최고 승률(17승 1패) 등의 전설적인 기록 등을 쏟아냈다.


신용균과 김영덕이 국가대표팀과 실업야구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한국 타자들이 알지 못했던 신종 변화구들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빠른 공과 커브, 두 가지 구종 외에는 알지 못했던 한국 야구계에 슬라이더, 싱커, 포크볼을 처음 소개한 것이 두 선수였는데, 타석 앞에서 갑자기 휘어나가고 가라앉고 뚝 떨어지는 그런 변화구들은 처음 경험하는 타자들로서는 '마구'라고 통칭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오마이뉴스

▲ 1954년 필리핀 라핀 경기장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석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더위키

1960년대까지 한국의 야구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국제무대였던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회 대회(1954년)에서 6대 0으로 완패한 것을 시작으로 3회 대회(1959년)에서는 20대 0으로 대패하는 등 한국대표팀은 일본에 1962년의 4회 대회까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5패를 당했다. 특히 그 5패 중 4번은 단 한 점도 빼앗아내지 못한 채 당한 완봉패였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의 투수들이 자유자재로 던지는 '마구'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용균과 김영덕을 통해 그런 마구들의 정체가 알려지고, 한국의 타자들은 수년간 농락당하면서라도 반복해서 경험하며 공략법을 찾아갈 수 있었다. 1963년의 첫 승리 이후에도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을 상대한 국제대회에서의 대부분의 경기를 패배하긴 했지만, 조금씩 점수를 얻어내며 격차를 줄여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재일동포 투수들을 통해 얻은 변화구에 대한 면역과 대응 능력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 야구는 일본에서 성장한 한국인 2세 청년들의 시범과 지도, 직접 앞장서서 만들어낸 성과를 통해 1950년대 후반 기본기를 익히고 1960년대 초반에 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한계들을 극복하면서 비로소 개구리가 살던 우물 밖으로 조금씩 나올 수 있었다.


김은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