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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영화 제목에 감독 이름 들어간, 아주 '황당한' 이유

by오마이뉴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1986년 한국영화 최고흥행작 <이장호의 외인구단>​

지난 2012년 상업영화 데뷔작 <은교>로 청룡상과 대종상을 비롯한 5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며 혜성처럼 등장한 '괴물신인' 김고은은 2016년 1월 처음으로 드라마에 출연했다.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인기리에 연재됐던 순끼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치즈 인 더 트랩>이었다. <치즈 인 더 트랩>은 10~20대 여성 독자들에게 워낙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나왔을 때 원작팬들의 기대도 한껏 올라갔다.


하지만 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의 주인공 홍설을 연기한 김고은은 원작 팬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원작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리 잡은 홍설의 이미지와 드라마에서 김고은이 표현한 홍설의 이미지가 기대만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즈 인 더 트랩>뿐 아니라 원작이 있는 드라마나 영화는 등장인물의 이미지가 원작과 벗어나면 원작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비판이 따라오기 때문에 배우는 더욱 신중한 캐릭터 연구와 연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2020년에 방송된 드라마 <이태원클라쓰>처럼 주인공의 이미지가 원작과 일치한다는 호평이 쏟아지면서 드라마의 인기와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문학작품에서 비교되는 대상들이 같거나 들어맞는 비율을 '싱크로율'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대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한국영화 중에서 원작의 주인공과 가장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했던 캐릭터는 단연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을 연기했던 최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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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멀티플렉스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80년대 중반 서울에서만 28만 관객을 동원했다. ⓒ 판영화사(주)

8~90년대를 주름잡았던 순정파 터프가이

학창시절 권투선수를 지망했던 최재성은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가 1983년 KBS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면서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잘 생긴 반항아 이미지의 최재성은 1984년 청소년드라마 <고교생일기>에 출연하며 주목을 받았고 <고향>,<초원에 지는 별> 등에 출연했다. 그렇게 드라마 위주로 활동하던 최재성은 1986년 이장호 감독이 연출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 주인공 오혜성 역에 발탁되며 스크린에 데뷔했다.


최재성은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반항아지만 사랑하는 엄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순정파 터프가이' 오혜성을 연기했다. 최재성이 원작의 오혜성과 높은 싱크로율을 보였던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서울에서만 28만 관객을 모으며 1986년 한국영화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외인구단> 이후 인지도가 급상승한 최재성은 1988년에만 4편의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렇게 청춘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최재성은 1991년 고 김종학 감독이 연출한 <여명의 눈동자>에서 일본군의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를 연기해 1992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달렸다. 최재성은 1992년 드라마 <두려움 없는 사랑>과 1994년 영화 <장미빛 인생>에 출연하며 9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90년대 후반부터 부쩍 활동이 뜸해졌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왕년의 청춘스타'로 점점 잊힌 이름이 되던 최재성은 2002년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1부의 최종보스'였던 마루오까 경부를 연기하며 길었던 슬럼프를 씻었다. 2006년 <불멸의 이순신>에서 맡았던 원균과 2007년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연기했던 지우(남상미 분)의 아버지이자 청방파 보스 마오 역시 '중년 배우 최재성'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이다.


2013년 <대왕의 꿈>에서 김유신 역에 캐스팅됐다가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부상 회복 후 계백 역으로 합류했던 최재성은 지난 2019년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국군 합참의장을 연기하며 카리스마를 뽐냈다. 최재성은 이제 환갑을 앞둔 노장배우가 됐지만 지난 3월에 종영한 KBS 주말드라마 <신사와 아가씨>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는 소시민을 연기하는 등 햇수로 40년째 대중들에게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남자의 순정 이용해 남편 승리 이끈 '빌런' 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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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계에서 낙오됐던 외인구단 선수들은 무인도에서 지옥훈련을 받고 돌아와 '야구괴물'로 진화했다. ⓒ 판영화사(주)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1983년부터 1984년까지 연재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현세 작가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멀쩡한 제목에 갑자기 이장호 감독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당시 영화의 등급을 심의했던 국가기관에서 '공포'라는 제목이 관객들에게 공포심과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공교롭게도 1986년은 국민들을 한창 '공포'에 떨게 했던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됐지만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엄지(이보희 분)라는 최악의 '빌런'이 오혜성(최재성 분)이라는 착하고 재능 있는 청년의 인생을 망치는 무서운 영화다. 실제로 엄지는 마동탁(맹상훈 분)이라는 프로야구 최고의 강타자와 결혼했으면서 옛 애인의 행복을 빌어주긴커녕 오혜성에게 '나는 단란한 가정이 있지만 너는 두 번 다시 내 곁을 떠나지 말라'는 잔인한 이야기로 오혜성의 인생을 파멸시킨다.


오혜성의 비극적인 사랑은 재미를 위한 장치였지만 원작과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지옥훈련 만능주의'는 상당히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외인구단 선수들은 무인도에서 비인간적인 대우 속에 지옥훈련을 받고 '야구괴물'로 진화했지만 이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원작에서 단행본 1권 반에 걸쳐 진행되는 서부와 유성(영화판에서는 해태)의 한국시리즈가 영화에서는 약 18분으로 압축된 것도 영화버전의 아쉬운 부분이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영화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김도향과 윤시내, 정수라 등 인기 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OST 역시 상당히 높은 퀄리티를 자랑했다. 특히 오혜성의 테마곡이었던 정수라의 <난 너에게>는 당시 유일무이한 가요 순위프로그램이었던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밖에 김도향의 <고독한 강자>와 윤시내의 <사랑의 테마> 등이 영화 곳곳에 깔리며 인물들의 정서를 잘 담아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크고 작은 아쉬움도 있었지만 1편으로 끝이 났으면 그 시절 재미 있었던 야구영화 겸 멜로 영화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1편의 성공에 고무된 제작사에서는 맹인이 된 오혜성이 초인적인 청각을 통해 야구선수로 재기한다는 설정의 속편을 제작했다. 그리고 이장호 감독을 비롯해 안성기와 이보희, 맹상훈, 조상구 등 1편의 주역들이 대거 교체된 <이장호의 외인구단2>는 서울관객 4만 명에 그치며 흥행 실패했다.

80년대 섹시스타에서 '악녀'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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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섹시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이보희는 에서 오혜성의 순정을 이용하는 '악녀'로 변신했다. ⓒ 판영화사(주)

2000년대 이후엔 주말 드라마를 중심으로 가정주부 역할을 많이 했지만 사실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이보희는 충무로를 대표하는 섹시스타였다. 1983년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영화에 데뷔한 이보희는 <바보선언>,<무릎과 무릎 사이>,<어우동> 등에 출연하며 80년대 초·중반 원미경, 이미숙과 함께 '트로이카'로 활약했다.


<야인시대>의 시라소니로 유명한 조상구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에서 외인구단의 유일한 투수이자 에이스 조상구를 연기했다. 영화 출연 당시만 해도 본명인 최재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조상구는 <외인구단> 이후 활동명을 조상구로 바꿨고 1987년 이현세 작가 원작의 <지옥의 링>에서는 오혜성을 연기하기도 했다. 조상구는 <타이타닉>,<레옹> 등 무려 1000편이 넘는 영화를 번역한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외인구단의 플레잉코치이자 한쪽 팔이 없는 최관 역은 <무풍지대>의 유지광, <야인시대>의 금강으로 유명한 배우 나한일이 연기했다. 해동검도의 창시자이기도 한 무도인 겸 배우 나한일은 전성기 시절 액션 연기와 멜로 연기가 모두 가능한 몇 안 되는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나한일은 1편에 이어 속편에도 출연한 배우 중 한 명인데 속편에서 최관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선수들을 다시 모아 외인구단을 재결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양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