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한 시절의 눈부신 음향들

[컬처]by 예술의전당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1.10(수) - 11(목) 콘서트홀

가장 찬란한 시절의 눈부신 음향들

조성진의 힘, 조성진의 영광, 조성진의 미래, 조성진의 짐. 합창석까지 빈틈없이 자리한 청중을 보며 가장 찬란한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스물네 살 젊은 피아니스트에 관한 상념이 두서없이 스쳐지나간다.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 제패 위업 이후 마음 놓고 들어보는 라이브 연주에 목말랐던 팬들의 기대에 찬 설렘으로 콘서트홀의 공기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조성진의 눈부신 ‘오늘’이 바야흐로 펼쳐질 터였다.

음악적 포만감을 만끽한 무대

베토벤 소나타 ‘비창’ 1악장의 무겁지 않되 한없이 깊은 첫 코드는 요즈음 표현으로 ‘심쿵’을 유발하는 울림이었다. 느린 도입부의 아고긱(음가 처리의 미묘한 뉘앙스)에서 쉼표의 행간을 읽는 감각까지 능숙함을 넘어 저만큼 자유로워진 조성진이 벌써부터 보인다. 전반적인 톤의 질감은 명료하되 투명했다. 연주회 후 만난 사람들은 이 희귀한 느낌을 담백함 혹은 절제미라 표현하기도 했다. 기교적 완벽성은 거기에 상승효과를 더할 뿐. 1악장 2주제가 이토록 선율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신선한 기쁨을 맛보는 순간 가벼운 질주는 2악장의 밀도 높은 앙상블로 바뀌어 있었다. 조성진의 강약 처리는 특별했다. 크고 작은 기본적 대비는 물론 섬세한 그러데이션이 켜켜이 구비된 그만의 음향 팔레트가 무수한 블랜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인터미션 후 들려준 드뷔시 작품에서 더욱 뚜렷이 증명됐다. 특히 ppiano의 영역을 마치 나노입자처럼 세분화하는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감탄하는 사이 3악장의 모든 음들도 그의 손끝이 닿자 홀연 살아 숨쉬며 움직이다 사라졌다.

가장 찬란한 시절의 눈부신 음향들

이어진 베토벤 소나타 30번의 해석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었다. 강렬한 드라마 대신 다이내믹의 첨예한 분화가 먼저 다가왔다. 베토벤의 강인하고 절도 있는 음악적 근육을 만질 수 있는 2악장의 운동감각은 직선보다는 곡선에 가까웠다. 3악장에서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오차 없이 적확한 리듬의 흐름을 비롯하여 큰 골격이 뚜렷하게 그려진 후가 부분에서 조성진의 프레이즈 구축력의 탄탄함을 재확인했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어둠 속으로부터 홀연히 떠오르듯 부각되는 왼손의 윤곽선이었다. 이날 쇼팽 소나타 3번에서도 자주 발견된, 최고수들이 구사할 만한 피아니즘이다.

 

2017년 가을, 음반으로 먼저 소개된 드뷔시 「영상」 2집은 이날 프로그램의 작지만 빛나는 보석이었다. 베토벤에서 드러난 다이내믹의 입체감은 드뷔시에서 제대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 어느 레퍼토리보다 소리의 색채와 질감이 압도적인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 ‘황폐한 절에 걸린 달’ 그리고 ‘금빛 물고기’는 낯설고 오묘한 음향의 영역으로 모두를 인도했다. 드뷔시가 인도네시아의 민속 타악기 오케스트라 가믈란(gamelan)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자체는 하나의 풍경이다. 조성진은 그 풍경에 진하고 옅은 터치의 윤곽을 만들고 황홀한 색감의 빛과 그림자를 입힌 다음 음향의 적절한 원근 배치로 ‘소리로 그린 그림’을 완성했다. 그가 드뷔시의 톤을 처리하는 방식은 치밀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소리 내기 전, 소리 냄, 그리고 소리 낸 이후의 상태가 한순간에 감지됐다. 회화적으로 다채로운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인 드뷔시 음향의 실현에 앞으로 조성진이 공헌할 부분이 분명 커지리라는 예감이 찾아들었다.

 

쇼팽 소나타 3번은 조성진의 자족적인 세계였다. 수년간 끝도 없이 몰입했을 쇼팽의 세계. 드뷔시를 들은 직후여서일까, 쇼팽 소나타에서도 소리를 둘러싼 앞뒤 정황과 함께 최고로 다듬어진 상태의 음과 그 사이의 여백까지 포착됐다. 베토벤에서 드러난 각 악장의 구조를 꿰뚫는 투시력은 쇼팽 소나타에서도 여전했다. 3악장에서 음과 음 사이 기다림의 집중력은 듣는 이들의 숨을 잠시 멈추게 했고, 객석은 침묵으로 팽팽해졌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기까지 과격함은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정제 혹은 절제된 톤. 그러나 가슴 시리게 유려한 그의 선線들. ‘조성진류’ 쇼팽이다. 소나타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청중의 쇼팽 갈증을 알아채고 작심한 듯 풀어놓은 앙코르 무대 위 네 개의 발라드 행렬은 또 다른 놀라움의 한판이었다. 잘 짜여진 만찬뒤 다시 차려진 풍성한 디저트가 가져다 준 음악적 포만감으로 청중들은 이후에도 오래오래 행복했을 것이다. 이날 확인된 조성진의 자유, 조성진의 스펙트럼, 조성진 음악의 효과를 반추하며 서른 살쯤 되어서는 몸의 살집도 불리고 싶다는 미래의 그를 생각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확장될 음악적 살집과 근육 그리고 치열한 자기 단련의 깊이가 그대로 음악에 투영되는 ‘끝까지 성공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글 김순배 (피아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크레디아인터내셔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3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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