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글쓰기’ 속 현실과 상상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컬처]by 예술의전당
‘위험한 글쓰기’ 속 현실과 상상의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연극 <맨 끝줄 소년>은 고등학교 문학 교사인 헤르만과 늘 맨 끝줄에 앉는 17세 소년 클라우디오에 관한 이야기다. ‘맨 끝줄’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는 자리다. 같은 반 친구인 라파  가족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 클라우디오의 작문 과제에는 이들 가족을 향한 위험한 욕망이 담겨 있다. 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 헤르만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클라우디오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클라우디오는 더욱 매력적인 결말을 위 해 위험한 상상들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고,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위험한 글쓰기를 멈출 수 없게 된다. 벽에 난 구멍 사이로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듯한 클라우디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욕망과 도덕, 현실과 가상, 나아가 ‘진실이란 무엇 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2007년 <심판>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받은 뒤 <바냐 아저씨>, <개구리>, <더 파워> 등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 박윤희와 지난해 연극 <에쿠우스>의 앨런 역으로 강렬한 소년의 인상을 남긴 배우 전박찬이 이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이다. 두 사람이 같은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서로의 공연이라면 놓치지 않고 챙겨 보는 사이다. 박윤희의 아내이자 배우 강명주와 전박찬은 김동현 연출이 이끄는 극단 코끼리만보에서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만큼 사석에서 어울린 시간도 많다. 그래서일까. 박윤희와 전박찬은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작품에 대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이 작품을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해하는 순간 관객은 길을 잃게 된다”며 “배우로 서 ‘나는 무엇을 위해 연기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철학적 질문들

“김동현 연출님이 후안 마요르가의 작품을 해보자고 하셨을 때 사실 겁이 탁 났어요. 그동안 봐왔던 마요르가의 작품이 어둡고 진지해서 배우로서는 굉장히 어렵거든요. 한번 읽어보고 말씀드린다고 한 뒤 대본을 읽었는데,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끝까지 읽히는 거예요. 지금까지 본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재미있었죠.”


박윤희는 대본을 읽고 단번에 출연을 결심했다. 이 작품 때문에 국립극단 시즌 단원 계약도 포기했다. “작품 속 헤르만이 딱 저 같더라고요. 굉장히 집요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에요. 자기 생각만 하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주위 것들은 잘 보지 않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연기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클라우디오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헤르만의 모습에선 연기학원을 운영하던 때가 떠올랐다. “2002년부터 3년 반동안 생계를 위해 연기학원을 운영했어요. 연극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리만족을 했죠. 이 장면은 무조건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안 하면 애들을 막 몰아쳤어요. 결국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랬던 거죠. 헤르만처럼 말이에요.”


그가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온 건 2006년이다. 쉬어 보니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그런 그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 바로 <심판>이다. 원래 그의 역할은 조연이었다. 그러던 중 <마땅한 대책도 없이>로 거창국제연극제에서 남자연기대상을 받게 됐고, 여기에 구태환 연출과의 인연이 맞물려 주인공 요제프 K 역을 꿰차게 됐다. 배역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 길로 집을 나와 연습실 위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자신에게 온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2007년 그는 <심판>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받는다.


“극 중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에게 ‘너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니’라고 물어요. 그러면서 가벼운 것만 이야기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하죠. 꼭 저 자신에게 묻는 것 같아요. 최근 오랜만에 상업 연극에 출연했는데, 나는 누구를 위해 연극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거든요.”


헤르만과 닮은 점도 많지만,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벽을 만나기도 했다. 마요르가의 작품은 철학적이다. 극작가이기 이전에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대의 이야기를 예리한 시선으로 풍자하며, 작가의 철학적 견해들을 연극의 형태로 구현한다. 헤르만은 ‘정상적인’ 가족이란 없으며,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정상적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작품은 인정받길 원하면서 아내의 미술 작품은 평가절하 한다. 클라우디오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범죄의 공모자가 되기도 한다. 그는 “헤르만에게 어떤 상처가 있었기에 이렇게 가정을 불신하게 됐는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었기에 제자의 위험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지 등 인물의 행동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설명했다.

‘위험한 글쓰기’ 속 현실과 상상의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

처음으로 마요르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박윤희와 달리 전박찬은 벌써 세 번째 만나는 마요르가 작품이다. 자신이 출연했던 <피리 부는 사나이>, <천국으로 가는 길>뿐 아니라 한국에 번역돼 나온 그의 희곡은 모두 읽었을 정도로 마요르가의 작품에 빠져 있었다.


“<맨 끝줄 소년>은 희곡이 출판되자마자 읽은 작품이에요. 읽자마자 클라우디오 역할을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연출님이 예술의전당에서 이 작품을 하실 계획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한테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몇 달이 흘렀어요. 연출님이 이 작품을 같이 해보겠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 역할이 라파가 될지 클라우디오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클라우디오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는데, 다행히 이렇게 만나게 됐습니다.”


전박찬의 공연은 빠짐없이 찾아가 봤다는 박윤희는 “<에쿠우스>에서 앨런역을 소화하는 모습이 연출에게 믿음을 줬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그는 지난해 <에쿠우스>에서 32세의 나이로 17세 소년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 호평을 받았다. 또다시 소년 역할을 하는 데 대한 부담감은 없을까. “<에쿠우스> 때는 ‘과하게 어려 보인다’는 말을 칭찬으로 들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클라우디오가 어린아이로 느껴지는 순간 주제의식이 흐트러져 버려요. 관객들이 생각하는 소년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오히려 클라우디오가 스승인 헤르만을 조종하기도 하죠. 이 작품으로 소년을 탐하러 온관객은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항상 대답을 하기 전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떼는 전박찬은 준비성이 철저한 ‘모범생’이다. 이번 연극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수학과 친구에게 수학 과외를 받고 있다. 극 중 등장하는 허수의 개념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다. 철학자이자 수학 교사였던 작가는 작품에 수학적 요소를 담아냈다. 김동현 연출과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양민학살의 증언들을 담아낸 연극 <말들의 무덤>을 준비할 땐 석사 논문을 준비하듯 단원들끼리 모여 스터디를 했다.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5주간 인천을 오가며 현장답사를 했다.


극 중 “너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느냐”는 물음에서 전박찬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연기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말들의 무덤>에서 찾았다고 했다. “연극 준비를 하던 중 현장답사에서 월미도에 거주하는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무차별 폭격으로 마을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고 했어요. 저를 데리고 월미도 공원으로 가 여기에 집이 있었고 저쪽이 바다였다며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시는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됐죠. ‘그 어떤 참혹한 광경보다 이게 진실이구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구나’라고요. 그때 배우로서 누구를 위해 연극을 하고, 무엇을 위해 무대에 서는가를 깨달았어요. 배우로서 중 심축을 잡은 거죠.”

‘위험한 글쓰기’ 속 현실과 상상의

참혹한 미궁으로 빠져드는 결말

전박찬은 작가인 클라우디오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이야기들을 직접 필사하고 있다. “제가 대사를 정말 못 외워요. 대본을 베껴 쓰고, 커닝 페이퍼를 만들고 해서야 겨우 외우죠. 두 달 전쯤 명주 누나 이사를 도와주러 선배 댁에 갔다가 선배는 이미 대사를 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때부터 저도 ‘열공 모드’에 들어갔어요.”


그러자 박윤희는 “연극 <더 파워>를 할 때 대사가 너무 어려워 매일 밤 악몽을 꿨다”면서 “악몽을 꾸기 싫어서 일찍 시작한 것”이라며 웃었다. 전박찬은 “선배님이 좋은 자극제를 던져줬다”며 “우리 왠지 형제 같지 않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장난스럽던 두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두 사람은 작품이 결말로 치달을수록 참혹한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박윤희가 먼저 “클라우디오, 넌 선생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나를 좋아했니?”라고 물었다. “클라우디오는 기본적으로 외로운 인간이었어요. 그런 그에게 ‘글쓰기’라는 잡을 수 있는 끈을 제공한 게 헤르만이었죠. 좋아했는지까지는 아직 저도 모르겠어요.”


대답을 마친 전박찬이 연습을 하면서 고민했던 부분들에 대해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배, 왜 극 중에서 저에게 제임스 조이스의 책은 주지 않은 거죠?”, “선배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박윤희는 후배의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더 쉬워져야 하는데, 뭐가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나름대로 충분히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연습이 끝나면 100분의 1도 준비가 안 된 느낌이에요. 이렇게 질문을 받고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할 때면 ‘오늘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이 어려운 걸 뭐가 좋다고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한 부분을 채워내면 또 희열이 느껴져요. 마약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요?(웃음)”

 

글 고재연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5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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