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나쁜 여자는 누구인가?

[컬처]by 예술의전당

사전트 <마담 X의 초상> Vs 비제 <카르멘>

진정 나쁜 여자는 누구인가?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 X의 초상'(1884). 캔버스에 유채. 143 x 243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는 멀리서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초상이 한 점 전시되어 있다. 실물 크기의 이 커다란 초상은 검은 드레스를 입은 흰 피부의 여성을 그린 것이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림 속의 여성은 가느다란 금색 체인의 어깨끈이 달린, 가슴이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마호가니 탁자에 한 손을 얹은 채로 옆쪽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별다른 장식이나 보석으로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길고 풍성한 갈색 머리를 틀어 올려 늘씬한 목선을 드러낸 여성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검은 공단 드레스와 같은 색의 장갑을 쥐고 있는 그녀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보인다. 이 초상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와, 아름다운 여자네!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일까?’ 이런 초상은 당연히 그림의 모델이 있고, 초상의 제목에는 그 여성의 이름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독 이 검은 드레스의 여성 초상에는 모델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그림의 제목은 <마담 X의 초상>이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에는 한 전도유망한 화가의 장래를 망칠 뻔했던 기이한 사연이 숨어 있다.

진정 나쁜 여자는 누구인가?

존 싱어 사전트의 '엘 할레오'(1882). 캔버스에 유채. 348 x 232 cm. 이사벨라스튜어트가드너미술관, 보스턴.

<마담 X의 초상>은 미국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작품이다. 사전트는 미국인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그림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한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화가로서의 재능이 넘쳤던 사전트는 20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무려 3년을 연구한 끝에 완성한 <엘 할레오>는 플라멩코를 추는 스페인 무희와 악사들을 그린 걸작이다. 어둡고 절제된 색감 속에서 번뜩이는 안달루시아의 정열을 포착해낸 이 작품으로 살롱전에 입상했을 때 사전트의 나이는 겨우 스물여섯 살에 불과했다. 살롱전이 프랑스 정부가 주최하는 전시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외국인인 사전트의 입선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에두아르 마네와 벨라스케스를 합친 듯한 탁월한 재능의 화가에게 파리 화단은 열광했다. 이때만 해도 사전트의 앞날은 탄탄대로로만 보였다.

마담 X 스캔들: 타락한 여자를 그린 초상

사전트의 명성은 불과 2년 만에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1884년에 완성한 한 장의 초상 때문이었다. 이 초상의 모델은 버지니에-아멜리 고트로라는 미국 여성이다. 나이 많은 프랑스의 은행가와 결혼한 이 스물다섯 살의 여성은 남다른 미모와 튀는 행실로 파리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인사였다. 버지니에가 자신의 초상을 같은 미국인인 사전트에게 의뢰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1884년 살롱전에 출품된 이 초상을 보고 파리 언론은 편견에 찬 악평을 퍼붓기 시작했다. 악평의 근거는 한마디로 ‘정숙한 부인의 초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에로틱하다’는 것이었다. 언론과 대중은 기이할 정도로 이 작품을 물고 늘어졌다. 버지니에의 피부가 창백해서 마치 시체 같다느니, 가슴이 깊게 파인 의상이 지나치게 유혹적이라느니, 남자를 유혹하려는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느니, 허리가 비현실적으로 잘록하다느니, 창백한 피부색에 비해 유독 귀만 빨갛게 그려져서 선정적이라느니 등등 악평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진정 나쁜 여자는 누구인가?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1886). 캔버스에 유채. 153 x 174 cm. 테이트브리튼, 런던.

그림에 대한 악평이 그치지 않자 버지니에는 그림 인수를 거부했다. 사전트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를 떠나게 된다. 마침 영국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인 작가 헨리 제임스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임스는 여러 신문과 잡지 기고를 통해 신진 화가인 사전트를 소개했고 그의 도움으로 사전트는 비교적 수월하게 영국에 정착했다. 특히 1886년 발표한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런던 테이트갤러리가 사들이면서 사전트의 주가는 크게 올라갔다. 곧 영국의 귀족 부인들이 사전트에게 초상을 청탁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그의 인기가 높아지자 미국의 신흥 부호들에게도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사전트는 두 명의 미국 대통령-우드로 윌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시간이 흐른 후에도 버지니에의 초상으로 인해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6년 사전트는 30년 이상 자신이 보관해왔던 버지니에의 초상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넘겼다. 그림을 구매한 미술관 측이 그림의 제목을 물어보자 사전트는 버지니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마담 X의 초상>이라고만 해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이 초상을 둘러싼 ‘소문과 진실’이다.

진정 나쁜 여자는 누구인가?

존 싱어 사전트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초상'(1903). 캔버스에 유채. 101 x 147 cm. 백악관, 워싱턴 D.C.

왜 당시 파리 언론과 비평가들은 버지니에의 초상에 그토록 가혹한 공격을 퍼부었을까? 먼 뒷날에도 사전트는 이 초상이 자신이 그린 모든 여인의 초상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여겼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아도 이 초상이 관습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에로틱하거나 천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여기에는 버지니에라는 여성에 대한 당시 파리 사교계의 곱지 않은 시선이 얽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부호에게 시집온 외국인 여자였다. 이미 파리 사교계는 버지니에를 ‘나쁜 여자’로 점찍어둔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사전트의 그림이 그러한 시각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나쁜 여자’ 카르멘

진정 나쁜 여자는 누구인가?

예술의전당의 오페라 '카르멘'(2007)

‘나쁜 여자’란 어떤 여자일까? 재산을 노리고 부자에게 시집가는 여자? 정숙하지 못한 여자? ‘감히’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 외국인 여자? 고급 예술은 이런 ‘나쁜 여자’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처럼 우아하고 고귀한 여성만 등장시켜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이 ‘나쁜 여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한 화가의 앞길을 망칠 뻔했던 것은 분명하다. 1875년 초연된 오페라 <카르멘>의 경우는 그 편견의 영향이 더욱 심각하게 작용했다. 사전트는 요행 영국으로 이주하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카르멘>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1838~1875)는 나쁜 여자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정열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과 그녀에게 매혹되어버린 순진한 병사 돈 호세의 이야기를 담은 <카르멘>의 원작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중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오페라 대본으로 선택한 이는 비제 자신이었다. 작곡가는 유명한 ‘하바네라’를 열세 번이나 고쳐 쓸 정도로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정작 비제에게 새 오페라를 청탁한 오페라코미크극장은 이 대본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양한 관중이 보기에는 부적합한 내용–불륜과 살인–이 포함돼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비제는 대본을 고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갈등이 계속되었다. 가수들이 무대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연기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등 여러 해프닝이 겹치면서 1874년으로 예정된 초연은 그 이듬해로 미뤄졌다. 1875년 봄의 초연은 결국 대실패로 끝났다. 관객과 언론은 일제히 <카르멘>을 비난했다. 주인공 여성이 담배공장 직공이라는 비천한 신분이며 착한 남자를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 무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카르멘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부도덕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는다. 비평가들 역시 <카르멘>에 담긴 열정적이며 색채감 넘치는 멜로디, 대담하고 풍부한 리듬 등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나쁜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데만 집중했다.

 

비제는 원래 병적으로 예민한 성향이었던 데다가 헤비 스모커였다. 이미 건강을 많이 해친 상태였던 작곡가는 <카르멘>의 실패와 혹평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1875년 3월, 비제는 심장의 이상으로 쓰러졌다. 다시 회복되는 듯했으나 5월 말 치명적인 심장 발작이 일어났다. 비제는 자신의 결혼기념일인 6월 3일, 겨우 서른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6월 5일 열린 장례식에서 비제와 파리 음악원 동기인 샤를 구노는 너무도 운이 없었던 친구를 회상하는 조사를 읽다 울면서 쓰러졌다고 한다. 이 비운의 작곡가가 반년만 더 살았더라면 <카르멘>에 대한 세간의 평이 호의적으로 바뀌는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해 10월, 이 작품은 빈에서 공연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876년 오페라코미크극장에서의 재공연을 본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카르멘>은 모든 면에서 걸작입니다. 비제는 다만 뛰어난 작곡가가 아니라 진정 깊이 있는 거장입니다… 저는 10년 안에 <카르멘>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차이콥스키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나거나 진보적인 작품을 내놓는 바람에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한 예술가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비제도 그런 경우였다. 그는 말 그대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였다. 무엇보다도 <카르멘>에 퍼부어진 혹평은 너무도 편견에 차 있으며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 비평가들의 얄팍한 시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르멘>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프랑스 오페라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필자소개 전원경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시티대학교 런던에서 예술경영 및 비평 전공으로 석사를, 글라스고대학교 에서 문화콘텐츠산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객석」과 「주간동아」 문화팀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예술의전당 인문아카데미와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 예술과 역사,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수원SK아트리움의 마티네콘서트 <미술관옆 음악당>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예술, 역사를 만들다」, 「런던 미술관 산책」,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클림트」 등의 책을 썼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7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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