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자유 평범한 삶을 위한 조건

[컬처]by 예술의전당
슬픔의 자유 평범한 삶을 위한 조건

평범함과 쿨함

아들의 애인이 못내 못마땅하다는 친구와의 긴 전화 통화에 심드렁했던 건 내가 아들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이 애들 놀이방 쫓아다닐 때 아들 군대 면회를 다녔던 그 친구는 언제나 우리보다 몇 년을 앞서 살았다. ‘시어머니’라는 호칭에 한 발 다가선 그 친구의 푸념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처자를 바라는 게 자기 욕심이냐며, 자기가 유난한 게 아니라며, 무엇보다 자기를 속물 취급하는 아들에게 더 화가 난다는, 모두가 예상할 만한 그런 얘기였다.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고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데다 형제 중에 치료하기 힘든 병을 앓는 이가 있는 아들의 여자친구는 ‘평범한’ 처자가 아니었던 거다.


사실 평범하다는 말은 애매하다. 평범함은 상대적 단어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별함의 반대편에서 평범함은 눈에 띄지 않는 소소함을 가리킨다. 이 평범함은 딱히 별 볼 일이 없다. 하지만 험난함의 반대편에서 평범함은 안정감을 가리킨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평범함은 더할 나위 없는 미덕이다. 극적인 사건의 반대편에서 평범함은 반복되는 일상을 가리킨다. 변화무쌍하진 않지만 그래도 소박하게 유지되는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면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거다. 이처럼 평범함이란 그 자체로는 비어 있는 단어처럼 보인다. 그 비어 있는 의미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현실의 맥락이다. 오늘날 평범함이 평균치라는 의미로 전치되는 것도 이 때문일 거다.


평범함이 평균치로 둔갑하는 순간 평범함을 얻기 위한 노력은 결사에 가까워진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사회적 자본에서 평균을 얻지 못한다면 결핍과 낙오의 아이콘이 되기에 십상이니 말이다. “많이 바라지 않아요, 그저 남들처럼만 살면 되죠 뭐.” “남들 다 하잖아요. 그만큼은 해야죠.” 소박한 말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는 ‘남들만큼도 안 되는’ 삶에 대한 경멸과 공포가 스며 있다. 평범해지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야 하는 거다. 하지만 만약 그 경쟁에서 낙오한다면? 넘어서기 힘든 현실 앞에서 ‘정신승리’의 신공을 발휘한 아큐가 떠오른다. 하지만 정신승리법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을 속인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무엇보다 그 모양새가 흉하기 짝이 없다.


‘쿨cool해져야 한다’는 강박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쿨함은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은 채 위아래를 막론하고 코웃음을 칠 수 있는 나르시시즘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세상이 어떤 기준을 들이댄다 하더라도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완벽하다는, 권위적이고도 물질적인 세계를 향한 자존감의 선언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쿨함은, 마치 힙합의 그것처럼,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힙합의 쿨함이 다른 사람을 디스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얼마나 멋지고 돈이 많은지 자화자찬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세상을 향한 시니컬한 태도에 그쳐버리는 것처럼, 현실에서의 쿨함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초연함은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경험하는 배제와 소외의 반복을 애써 외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이런 구조 위에 있는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의 처지에 아예 무관심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도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차갑게cool 만들기, 이것이 낙오자로서의 뒤처진 평범이 아니라 선택하는 자로서의 우월한 평범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쿨함을 지지할 수는 더욱이 없는 법이다.

상실이라는 상수 앞에서

인정하자. 우리는 쿨하지 않다. 아니, 쿨할 수 없다. 그리고 인생 앞에서 쿨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평범해지는 것이다. 평범함이란 뜻 자체가 그렇다. 원래 평범함은 보통平 사람들凡을 뜻한다. 영어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모든 사람이common 마주하는 처지place가 바로 평범함commonplace이다. 평범함은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만남의 공간이요 삶의 처지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인 것이다. ‘남들만큼’이나 ‘남들처럼’ 같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필연을 맞닥뜨리는 것이야말로 평범함을 이루는 절대적인 조건인 셈이다. 평범함이란 맥락 따위에 좌우되는 말이 아니다. 평범함이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진짜배기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로 모이는 공통의 장소는 어디이며, 모든 사람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처지는 무엇일까.


동서고금의 철학과 종교는 인생의 본질을 고통으로 통찰했고 예술의 상상력은 인간의 조건을 비극으로 파악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저자인 철학자 김상봉은 인간이 서로 만남을 이루는 장소는 고통의 자리라고 말한 바 있다. 고통의 기원은 죽음이다. 삶의 모든 고통은 죽음이라는 결론의 앞선 반영일 터. 삶 속에서 다른 형태로 변주되어 하루하루의 일상에 파고드는, 날마다

경험하는 작은 죽음이 바로 고통이다. 고통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아니라 언제나 일상의 시공간에 있다. 그 일상성이 확인되는 절정의 순간은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다. 나의 죽음 이전에 현실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것이니, 내 주위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현실에서 겪어야 하는 일은 내가 죽기 전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상징적인 죽음 앞에서 고통은 형이상학이 되지만 현실의 죽음 앞에서 고통은 실존의 문제가 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하필 지금, 왜 이 사람이어야 하는가. 나의 죽음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이다. 고통의 다른 이름은 상실이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수많은 감정의 골짜기를 통과한다. 아무리 준비를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느닷없는 상실 앞에서 분노하고, ‘관계 속의 나’를 잃어버리는 공허함 앞에 무기력해진다. 이제 혼자임을 인식하는 순간 불안에 빠지고, 어쩔 수 없었음을 알면서도 한없는 죄책감에 자기를 던져 넣는다. 상실은 한 사람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버린다. 어떤 말이나 눈빛으로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슬픔의 벽이 쌓여서, 폐허가 된 마음을 가지런히 정돈할 길은 영영 막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 벽을 대신 허물어줄 순 없다. 그 벽을 허물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울게 하소서, 평범해질 수 있도록!

상실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저서 「상실 수업」을 통해 그 벽을 허무는 방법은 오직 하나라고 말한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마라.” 슬픔은 넘치는 것이어서 자칫 우리를 삼킬 수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흘려보내려면 눈물이 북받칠 때 언제든 실컷 울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잠언이다. 하지만 상실 앞에서 마음껏 울지 못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약함을 바라보는 시선은 웅숭깊다. 눈물은 곧 애도이며 애도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이자 행위이다. 울 수 있음은 자기 자신과 상실의 경험을 화해시키는 시작인 것이다. 충분한 슬픔을 통해 비로소 상실은 좋은 이별로 이어질 수 있다.


오래전, 친구의 아기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셀 수 없이 많은 주삿바늘을 꽂았던 작은 몸뚱이는 마지막 순간에야 배내옷을 입은 아기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모를 걱정한 사람들은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얼른 화장을 하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부모는 아기의 상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슬픔을 감추려 하지 않았으며 상처를 덮으려 하지 않았다. 아기의 부모는 정식으로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기의 관 앞에서 아기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한 명씩 차례로 관을 쓰다듬었다. 마치 아기의 볼을 어루만지듯이 말이다. 아기의 부모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울음을 토해냈다. 아기는 부모의 가슴에 묻혔고 아기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에도 묻혔다. 그로부터 적잖은 세월이 흘렀고 아기의 동생도 태어났지만, 그 부모에게 먼저 간 아기는 말할 수 없는 금기가 아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함께 이야기할 때마다 아기는 새롭게 기억되고 있다.


상실은 피할 수 없고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상실의 상처는 슬픔의 애도로만 치유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상실의 밑바닥까지 내던질 수 있는 용기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자유이다. 우리가 삶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여기에 있다. 평안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상실과 상처가 결국은 우리를 깊음의 세계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삶은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가 되는 것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슬픔 속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과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곳이 인생에 허락된 ‘공통의 자리commonplace’임을 깨닫는다. 평범함은 이런 것이다.


뮤지컬로서 퓰리처상을 받은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은 상실과 애도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상실과 상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감성의 직설을 담아내는 음악의 언어와 얼마나 근사하게 만날 수 있는지를 세련되게 보여준다. 상실을 극복하며 평범해지기. 주제는 진중하게 무겁고 형식은 격정적이도록 몰아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뮤지컬의 정체성이 상품성이 아니라 예술성에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넥스트 투 노멀>이 흥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 때문이다.


<넥스트 투 노멀> 12.16(수)-2016.3.13(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글 정수연 (공연 칼럼니스트)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5년 1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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