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하얀 눈밭에서 가장 뜨거운 소녀!

[컬처]by 예술의전당

1.21(목) - 2.28(일) CJ 토월극장

무대 위 하얀 눈밭에서 가장 뜨거운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가수 이종용의 ‘겨울아이’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하얀 눈 같은 피부에 순수한 미소가 인상적인 박소담을 본 직후다. ‘창백하지만 따듯함이 깃든 서정성’이 풍겨 나왔다. 그녀의 미소는 북유럽을 닮았다. ‘괴물 신인’ 박소담은 ‘겨울아이’였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여고생 ‘영신’의 섬뜩함은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쌍꺼풀 없이 깊은 눈빛을 간과했다. 그 수렁에 빠져드는 찰나 북유럽의 차가움도 밀려들어 왔다. 연극 <렛미인>의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일 수밖에 없었다. 신시컴퍼니와 예술의전당이 공동 주최하는 <렛미인>은 올해 공연계의 최대 기대작이다.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과 스웨덴 영화감독 토머스 알프레드슨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렛미인>(2008)이 바탕이다. 영화는 2010년 할리우드 버전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제작하고, 역시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원스>로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받은 존 티파니가 연출을 맡았다. 영화의 깨질 듯한 감성과 서정성을 무대 언어로 절묘하게 옮겨왔다. 일라이와 결손 가정의 외로운 소년 ‘오스카’의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에 무게 중심을 뒀다. 여기에 일라이에게 피를 공급하며 순애보를 펼치는 하칸과의 안타까운 관계도 한편에 움튼다.

 

지난해에만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베테랑>, <사도>, <검은 사제들>등 화제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대세 배우로 떠오른 박소담. 그런데도 그녀는 600여 명이 지원한 2주간의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11명에 들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 시절 소극장 무대에 수차례 올랐지만 수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 연극은 이번이 데뷔 후 처음이다. 대중이 <렛미인>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인 스웨덴 영화는 “캐스팅된 다음에 봤다”고 말했다. “오디션 전에 영상을 보면 상상력에 방해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찡긋 웃었다. <렛미인> 속 배경처럼 눈이 쏟아지던 겨울날, 서초동 한전아트센터 연습실에서 만난 박소담이 차가움 속 온기를 불어넣는 순간이었다.

소녀의 모습으로 영생의 영혼을 담고

일라이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어야 하는 뱀파이어다. 열두 살 정도의 나이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 몇백 년을 홀로 살아왔을지 모른다. 영화에서, 연극에서 사람들을 죽인다. 박소담은 “일라이가 무섭고 잔인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제일 먼저 이 여자아이가 ‘많이 외로웠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오스카를 만나면서 하는 행동들에 하칸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일라이는 누굴까.’ 나 스스로 질문을 계속했다. 오래 살았기에 짐작할 수 없는 전사前史가 많아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겠더라.” 그녀는 일라이 또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상처와 아픔이 있었을 거라며 공감했다. “하칸이 있음에도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몇백 년을 살아온 삶 자체가 행복하지 않았을거다. 오스카를 나게 되면서 스스로 치유받고, 다시 한 번 웃을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일라이의 순수함을 잘 살려보고 싶다. 그 순수함이 잘 살면 캐릭터의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을 듯하다.”

 

세 인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생각이 많아진다는 박소담은 일라이와 하칸 사이에 쌓인 세월의 켜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 “처음에는 하칸 역을 맡은 주진모 선배에게 ‘너’, ‘나’ 하기가 어려웠다. 근데 내(일라이)가 몇백 년 더 산 거 아닌가. 그래서 지금은 편하게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일라이가 오스카를 만났던 것처럼 예전엔 하칸도 젊었을 것이다. 그때 역시 풋풋한 감정이 있었을 것. 그런데 티파니 연출과 주진모 선배가 누군가와 오래 함께 살다 보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 때가 있다고 하더라. 나는 아직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웃음). 그 이야기처럼, 일라이는 오스카를 만나면서 하칸이 싫어진 게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단지 함께한 시간이 오래이기 때문에 하칸을 대하는 행동이 명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더 사납게 대하고 화도 내고.” 하칸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한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살인)까지 저지르면서. “일라이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으로 바라봤을 때 가슴이 아프다. 근데 일라이는 가슴이 아프면 안 되니 그 점이 힘들더라.” 하칸의 호의와 애절함을 당당히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지만 인간의 슬픈 감정을 못 느끼는 존재라서. 내가 확실히 하지 않으면 관객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칸에게 고마워 하지만, 지금 변화하는 것들은 ‘네 탓이 아니다’라고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하칸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럽고 어려웠지만 그러면 안 되겠더라. 일라이만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작품 <렛미인>에는 사회 문제가 자연스럽게 똬리를 틀고 있다. 특히 오스카와 일라이는 소외, 고독 등 현대의 청소년 문제를 반영하는 듯하다. 박소담은 <노란 달>로 유명한 청소년극 전문가인 영국 연출가 토니 그래함이 한예종 연극원에서 학생들과 작업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맡은 역이 자해하는 소녀였다. 오스카와 비슷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엄마가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녀는 고통을 받을 때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자해를 하는 것이었다. 살아 있음을 느끼려고. 오스카도 칼로 나무를 베거나 하며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의 뒤에는 죽음의 군대들이 표현되고.”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좋다. “당시 연극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우는 청소년 관객들도 있더라. 그런 경험이 있거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던 것 아닐까.”

무대 위 하얀 눈밭에서 가장 뜨거운

박소담에서 출발한 그녀만의 일라이

광기의 영신(<검은 사제들>)은 물론 실종된 학생들을 애써 외면하는 당찬 학생인 ‘연덕’(<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신분 상승의 욕망을 지닌 독한 여인 ‘문소원’(<사도>), 망나니 재벌 2세에게 ‘찜’을 당해 수모를 겪는 앳된 여배우(<베테랑>) 등은 하얀 미소가 잘 어울리는 평소의 박소담과 쉽사리 겹쳐지는 캐릭터들은 아니다. 그러나 박소담은 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지닌 캐릭터 모두가 자신에게서 출발한다며 눈을 빛냈다. 그래야 거짓말 같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연기 전에 다른 이의 연기나 영상물 자료는 피한다. 그런데 <렛미인>은 일라이 역이 더블 캐스팅이라 좋다며 활짝 웃는다. 긴 생머리에 처연한 표정이 일품인 이은지가 이번에 박소담과 함께 일라이를 연기한다. “언니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 저런 것도 있었지’라는 생각. 물론 나도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공부가 많이 된다. 관객은 두 배우가 연기하는 각각의 일라이를 만나 흥미로울 거다.”

 

박소담의 또 다른 장점은 순발력이다. 연기하기 전 많이 생각하고, 또 고민하지만 “특정한 것을 미리 정해놓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만의 것을 준비해 갔는데 상대 배우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는 거고. 항상 내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상대 배우와, 작품과 호흡을 맞추려고 애쓴다.” 그래서 뱀파이어답게 갑자기 정글짐에서 뛰어내리고, 기둥 위로 단숨에 올라가고, 현대무용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등 실시간으로 ‘무브먼트’가 강조 되는 <렛미인>에 어울린다. 서로 밀치고 함께 구르는 등의 장면에서 순간적인 호흡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같이 웃고 소리를 내면서 호흡을 느끼는 순간, 서로 믿음을 심어주게 되더라. 많이 웃고 즐기고 있다. 우리가 즐기지 않으면 안 되는 공연이기도 하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상대방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교감이 중요한 작품이다.” 최근 늘어가는 주목과 관심에 첫 연극 출연이 부담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특히 이목을 사로잡은 영화 <검은 사제들>의 두 선배(김윤석, 강동원)에게 느끼고 배운 건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야 책임감을 느끼고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좋은 부담감으로 바꾸면서 노력을 해왔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관심을 받을 줄 몰랐는데 즐기면서 하니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무대에 서는 게 긴장되지만 떨리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해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박소담은 휴학 한 번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가 재미있어 열심히 다닌 덕분이지만,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4년을 채우고 그냥 튕겨 나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학교 밖 세상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보는 오디션마다 떨어졌다”고 지난날을 돌아봤다. 그사이 대사 없는 역부터 시작해 점차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되면서 또 2년을 쉬지않고 달려왔다. 그래서 적잖이 지쳐 있던 상황인데 “<렛미인>이 연기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다”고 싱글벙글한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연기는 즐겁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근데 어느 순간 연기가 많이 힘들었다. <검은 사제들> 이후 쏟아진 관심에 부담스럽기도 했고. 더 강렬한 캐릭터를 보여줘야 하는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하지만 <렛미인>을 통해 학교에서 연극 연습을 하던 때가 떠올랐고 “진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눈을 이내 반짝였다. “일라이를 맡아 연습하고 몸을 계속 쓰면서 치유받고 있다”고 말할 때 하얀 볼에 빨간 사과를 품었다. “요즘 일상에 활력이 생겼다. 그걸 무대 위에서 느낀다.”

 

박소담이 말한 <렛미인>의 ‘하얀 눈밭 위의 피’에 대한 이야기가 그제야 수긍이 됐다. “그 풍경은 강렬하면서도 안에 따뜻한 느낌이 녹아 있다. 관객들이 단순히 차갑고 무서운 느낌만을 받고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소담은 하얀 눈밭에서 가장 뜨겁다. 관객들이 그녀에게 차가운 눈밭으로 ‘렛미인’(들여보내줘)이라고 외칠 수밖에.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사진 신시컴퍼니 © Jun Shim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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