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

[컬처]by 예술의전당

적어도 한국에서 서(書)를 모르면 현대미술을 말할 수 없고, 미술을 모르고 제대로 된 서예도 말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21세기 한국미술의 정체성 문제를 놓고 볼 때 동아시아 미술의 유전인자, 즉 DNA와 같은 필묵(筆墨) 전통을 빼고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3.1 독립운동 100년이 되는 오늘에도 서(書), 화(畵), 미술(美術)의 분파는 더 극심해지고 있고,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오히려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다.

당연한 사실을 회의하다

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

이세득의 '오세창 초상', 캔버스에 유채, 60 x 45.6 cm, 예술의전당 소장

2019년 오늘날 우리의 예술은 제각각 나뉘어 있다. 서예는 서예대로, 한국화는 한국화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서로 상종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반문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지금 ‘의심’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예술의 모습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융·복합 예술을 표방하며 서로 다른 장르들이 뒤섞여 놀자고 30년 전에 개관한 예술의전당도 서예·미술·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오페라 등 장르마다 여전히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흔하다면 흔한 융·복합의 축제프로그램도 보기 힘들다. 우리 예술이 본래부터 그랬던 것일까. 묵객(墨客)과 가객(歌客)이 한마당에서 놀던 시절은 정말 전설 속의 이야기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서의 몰락과 서, 화, 미술의 분리

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

이인성의 '선면화', 종이에 채색, 12 x 45 cm, 개인소장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합된다. 이후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운동이 국내외에서 들판의 불길처럼 번졌다. 같은 해 4월 11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중국의 5.4운동은 물론 인도와 베트남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그래서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꾼 일제는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어 1·2부에 서양화·동양화, 3부에 서예·사군자를 소개하는 전시를 10회까지 열었다.

 

하지만 이후 23회로 마감하는 1944년까지 서예·사군자는 제외됐다. 그때부터 조선예술의 장자방(張子房) 역할을 하던 서예는 근 100년간 주류예술에서 낙오자가 돼 오직 공모전과 서숙(書塾), 글방을 통해 연명해 오다시피 했다. 물론 그 배경에는 19세기 말 일본에서 고야마 쇼타로와 구로다 세이키 같은 서양화가들이 ‘서는 미술이 아니다. 그래서 예술도 아니다’라는 서구의 잣대를 받아들인 데 있다. 미술과 한몸이자 그 근원을 같이하던 서화를 난도질한 것이 식민지 조선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 서예와 동양화는 사실상 남남의 길을 걸어왔다. 이런 마당에 지금 다 같은 조형미술로 분류되면서도 미술과 서화를 현실적으로 한몸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초월을 잉태한 전통으로서의 서화와 현대로서의 서구미술, 또 내재적인 것으로서의 서화와 외래적인 것으로서의 서구미술의 수용과 재해석을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마당에 지금까지 남남으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따로따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돌려 근원에서부터 살펴보면 그 폐해는 서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화와 우리 현대미술의 정체성 문제까지 연쇄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독립에 대한 자문

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

유창환의 '오언절구', 종이에 먹, 132.4 x 30.3 cm, 개인소장

따라서 이번 <자화상 - 나를 보다> 전시는 이 시점에서 ‘예술에 있어 독립’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한다. 3.1 독립만세운동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예술은 식민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서는 미술이 아니다. 그래서 예술도 아니다’라고 하는 일본 제국주의, 아니 더 근원적으로 서구미술 잣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서예나 서화, 더 나아가서 미술의 현실은 이 잣대에 완전히 절어 있다. 과연 우리 예술은 진정으로 ‘독립이 됐는가’를 필묵이 소리 없는 절규로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우리 예술에 있어 ‘독립’이라는 문제에 어떤 처방이나 결론을 섣불리 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우리 예술의 전모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시라는 장치를 통해 한자리에서 우리 예술을 유기적인 맥락으로 본 적은 더더욱 없다. 사실상 이 시기 예술의 전모는 지금까지는 볼 필요도 없었고, 본다는 것 자체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당시 얼마나 많은 작가가 일본 유학을 가서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애써 묻지 않았다. 이중섭, 김환기, 이응로, 이인성, 김용준 등 20세기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치고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가지 않은 사람은 사실상 없다. 이 시대에 조선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한 사람 또한 죄다 일본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까.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라면 그 이유에 대해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 사람이 그린 조선의 모습이나 광복 후 남북 분단 정국에서 월북 작가들의 그림도 우리 스스로가 외면하고 금기시해 왔다. 일본의 최고 화가들이 금강산·경주 등 조선의 산천 풍물과 역사 현장을 그린 그림은 부지기수다. 백번 양보해서 일본 작가와 월북 작가의 경우 식민지와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의 감정과 이데올로기적인 특수성 때문에 오늘에야 거론할 여건이 됐다고 치더라도 소위 ‘민화’를 이 시대 주류 미술사에서 외면한 이유 또한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서예를 보면 일제강점기 지사와 열사의 유묵(遺墨)이야말로 조형과 정신이 일치되는 서예 중의 서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공모전에서 입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서예가 축에도 들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인물의 작품을 예술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자화상- 나를 보다> 전시의 구조와 구성

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

배운성의 '우리마을'(1958), 다색판화, 48 x 20 cm, 밀알미술관 소장

그래서 이번 전시는 ‘예술에 있어 독립 문제’를 화두로, 대변혁기 우리 예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조망하고자 한다. 1차적으로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그 이전의 개화기·대한제국, 그 이후 광복·분단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서’·‘서화’·‘미술’·‘서화미술’이라는 카테고리를 가지고 문인·화원·프로작가, 조선·일본·서양·남북, 제국주의·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지역과 사상 등 다양한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배치했다. <자화상 - 나를 보다> 전시로 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을 종횡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변혁기 우리 예술의 실상과 전모를 뒤집어 놓고 종횡하다가 보면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한반도라는 대 한민국 시공만큼 이렇게 대척점에서 다양한 예술이 싹트고 꽃이 핀 때도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1차적 토대가 서예와 서화다. 전통시대 문인과 근현대 서예가들이 교차하고 있다. 흥선대원군, 김옥균, 안중근, 민영익, 이준, 김구, 이승만, 노백린, 오세창, 한용운 등과 같은 인물이 전자다. 이들 중에서 이육사·곽재기·김진만과 같은 사람은 한 손엔 붓, 또다른 손엔 폭탄을 든 사람이다. 그리고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관전을 통해 본격 직업작가로 등장하는 인물이 김돈희, 황철, 김태석, 서병오, 유창환, 손재형 등이다.

 

2차적 토대인 화(畵)도 마찬가지인데, 장승업·안중식·이도영·조석진·박은배·채용신 등의 화원 화가는 물론 익명의 민화 작가가 등장해 기존 조형언어를 뒤집고 있다. 3차 토대로서 동양화가와 서양화가 또한 마찬가지인데, 김은호·이상범·변관식·허백련·오일영·이응로 등이 전통을 어떻게 현대로 녹여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 낸 작가라면 나혜석·김관호·구본웅·이인성·이중섭·김환기 등은 외래적인 것에 방점을 두고 내재적인 것과 하나가 될 것인 가를 고민하고 실천해 낸 작가로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는 일본 작가들이 대거 조선의 강산과 풍물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과 월북 작가와 월남 작가의 행보도 주목된다. 김용준·정종녀·이쾌대·이팔찬이 사회주의를 찾아 올라갔다면, 이중섭·정규·박고석 등과 같은 작가는 자유주의를 찾아 내려왔기 때문이다.

죽는 예술과 살아나는 예술

변혁기 우리 예술의 횡단면

서병오의 '송국화', 종이에 수묵, 17.5 x 48 cm, 성베네딕도 수도원 소장

지금까지 본 대로 따지고 보면 실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이 시기만큼 작가나 작품이 사상적으로 조형적으로 미학적으로 다층적이고 다양하게 꽃이 핀 때도 없다. 차라리 새로운 미의 질서를 찾아가는 카오스, 즉 혼돈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나라가 망했으니 예술도 망했고, 민족문화가 단절됐다고 한다면 너무 표피적인 속단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당연히 전쟁 망국이라는 극한의 환경을 따라 죽는 예술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와 동반해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강제로 지배당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실제가 그러하듯 더더욱 강건하고 아름답게 처절한 실존을 조형언어로 극복하며 표출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친일과 항일이라는 프레임 이전에 이 땅에서 꽃이 지고 거름이 되고, 그래서 다시 싹이 트고 꽃이 핀 예술의 여러 모습부터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에서 피어난 조형언어를 한자리에서 바라보고 각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를 들어보고자 한다. 실제로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 전통과 현대가 단절됐는지, 대체 전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 그림에서 일본의 영향을 ‘왜색’이라 거부했지만 실제가 그런지,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 창조 이전의 모방 문제는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지, 서예와 한국화, 더 나아가 현대미술도 지천으로 창작되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가 기 대하고 있는 진정한 모습인지….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이러한 여러 가지 자문을 하고 또 그 자답을 찾아내길 바란다.

 

글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3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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