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배우기; 제대로 복수하는 방법

[컬처]by 예술의전당

가상의 복수는 즐겁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노라면 보이는 건 온통 억울한 사람들이다. 뉴스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아침 드라마에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억울한 여자가 있고, 저녁 드라마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가족과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간신히 살아남은 억울한 청년이 있다. 뉴스 속의 억울한 사람들은 피켓을 든 채 외로이 서있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장대비를 맞으며 버틸 뿐이지만, 드라마 속 억울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복수를 다짐한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마음먹은 대로 자기 인생을 설계(?)해나간다.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거나. 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억울함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행동이 될 때 복수는 시작된다. 그리고 성공한다. 재미있는 건 앞의 내용이 좀 허술해도 복수가 시작되면 어떤 이야기가 됐든 흥미진진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복수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기도 할 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 모든 분노의 감정에는 복수하고자 하는 희망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고. 복수하려는 사람만큼 ‘목적이 이끄는 삶’에 충실한 사람은 없는 셈이다.

복수를 배우기; 제대로 복수하는 방법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와 해답을 내놓는 이야기. 전자는 문학의 이름을 얻고 후자는 대중서사로 분류된다. 문학은 명쾌한 것을 허물어 혼돈의 늪으로 던져 넣지만 대중서사는 어지러운 것을 한데 모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니, 비극과 부조리가 문학의 영역이라면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대중서사의 몫이다. 옳고 그름이 가려지고 그에 마땅한 보응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기. 이보다 아름다운 픽션은 없을 거다. 대중서사는 현실에 바탕을 둔 판타지인 셈이다. 대중서사의 복수극이 통쾌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픽션 안에서는 척척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약자이기에 억울한 일을 당해야 했던 사람이 복수를 결심하고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면 어느새 그는 복수를 실행할 수 있을 만큼의 강자가 되어 있다. 그 후 복수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의 복수를 돕고 인과응보의 시간은 앞당겨진다. 결국 원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거나 목숨을 잃거나 법의 심판을 받는다. 가상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속이 뻥 뚫리듯 후련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안다. 이것은 화면 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판타지’라는 것을. 현실의 억울한 사람들이 현실의 강자에게 복수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시내 한복판에서 일개 형사에게 흠씬 두드려 맞는 재벌 3세는 영화 속에만 있을 뿐임을. 픽션에서 뛰쳐나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시라. 권선징악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대중서사에서는 선이 승리하고 악은 심판받지만, 현실에서는 선이 짓밟히고 악이 득세하기 일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함이 힘을 가진 적도 드물거니와 악이 징계를 받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그래도 체념하긴 이르다. 더디더라도 인과응보의 순리를 믿는 수밖에 없다. 인과응보는 시간이 행하는 복수니까.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힘없는 사람들이 꿈꾸는 정의의 원리요 기대에 다름 아니다.

현실의 복수는 어렵다

복수는 자신이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는 분노의 에너지이다. 진화생물학에서는 복수란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도록 상대방의 공격 의지를 사전에 꺾는 일종의 적극적 방어라고나 할까.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겠다. 복수하려는 마음은 내재된 악함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를 지킬 ‘무기’를 갖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예나 지금이나 컸단다. 용서는 이러한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발전된 적응방식이었다는 게 진화생물학의 설명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수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인 셈이다. 무엇으로 갚는단 말인가. 복수의 방향이 엉뚱한 곳을 향하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명확하건만 거기에 ‘맞장 뜰’ 힘이 없을 때 복수의 명분은 불특정 다수를 향하기 쉽다. 굳이 ‘묻지 마 폭행’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단죄한 자본주의의 착취자는 고작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인이었으니까.

복수를 배우기; 제대로 복수하는 방법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억울함을 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체제와 시스템이 사람을 모욕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부당해고를 자행한 회사를 향해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 우리 같은 소시민은,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차마 “왕궁의 음탕”에 분개하지는 못하고 기름덩이 잔뜩 붙은 갈비를 내온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게 고작이다. 물론 요즘에야 인터넷에 올려 이런 가게 정도는 문 닫게 할 수도 있을 거다. 부당하게 돈을 벌어들인 악덕업주는 몰락하겠지. 꼴좋다,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에 슬며시 기분도 좋아질 거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마음을 가리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하는데, ‘당해도 싸다’에 해당하는 작은 복수심을 가리키는 단어란다. 하지만 분노의 초라함을 자책하는 시인의 부끄러움에 비해 여론재판의 통쾌한 복수가 더 당당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정작 분노의 대상은 왕궁의 음탕이 됐든 이곳의 자본이 됐든 여전히 건재하니 말이다.

 

복수가 어려운 진짜 이유가 이것이다. 복수는 언제나 상대방과 같아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데 똑같이 갚아주는 데 필요한 것은 권력에 맞설 만큼의 힘이나 자본에 맞설 만큼의 돈이 아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돈이 있어도 분노의 에너지가 사라지면 복수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복수의 바탕에는 분노가 깔린 만큼 그 분노를 곱씹지 않으면 복수는 불가능해지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자신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인격이 모욕 당하고 멸시당할 때 분노가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분노를 복수로 갚기 위해서는 모욕당했던 기억, 멸시당했던 순간, 고통스러웠던 때의 절망을 긴 시간 꽉 붙잡아야 하는 거다. 원한과 증오의 고리 안에서 상대와 내가 끊어지지 않은 채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니. 현실의 억울한 사람들이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는 건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지옥에 매여 사느니 연결의 고리를 끊음으로 더 이상 상대가 주무르는 관계의 끈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결심하는 용기요, 결단일 것이다.

너는 매여 있으렴, 나는 놓여날테니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전당포 노인을 죽였지만,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또 다른 주인공 장발장은 복수의 다른 유형을 보여준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잡혀 탈옥을 반복하다 결국 19년을 복역한 장발장에게 가장 잔혹한 사람은 간수 자베르이다. 자베르에게 장발장은 개선될 여지가 없는 영원한 범죄자일 뿐이다. 자베르는 장발장에게 언제나 잔혹하다. 장발장이 복수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베르일 것이다. 하지만 장발장은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똑같은 방식으로 갚지 않는다. 그는 자기와 똑같이 억울한 삶을 살았던 팡틴의 죽음을 지키며 그의 딸을 누구보다 귀하게 키울 것을 결심한다. 억울한 사람의 삶의 자리에 함께 서기. 장발장은 자기 삶의 고리를 자베르가 아니라 팡틴에게 연결했던 것이다. 그의 새로운 삶의 고리는 코제트를 살리고 마리우스를 살리고 심지어 자베르까지 살린다. 복수의 연결고리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베르이다. 그의 관심은 범죄자 장발장을 쫓는 데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장발장이 자신과의 복수의 관계에 매이지 않은채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의 삶은 동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센 강에 몸을 던진다. 장발장에게 향했던 분노의 잔을 스스로 마신 것이다.

 

현실에서 장발장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맞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렇게 살기보다는 원한 맺힌 상대를 향해 끊임없이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이 더 명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중서사의 빛나는 통찰력은 집요한 복수일수록 그 뒷맛이 씁쓸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분노의 불길이 차가운 냉기가 되도록 긴 시간 증오를 키워온 사람들이 악마를 처단하려다 스스로 괴물이 되고야 마는 이야기는 통쾌하기는커녕 비참하고 슬프다. ‘스위니 토드’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다. 빅토리아 시대의 실화를 소재 삼은 대중소설인데, 억울하게 아내를 빼앗긴 채 추방당한 이발사의 복수극이다. 길고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자기의 모든 것을 짓밟은 판사를 죽이고자 다시 이발사의 칼을 들었지만, 그 칼로 죽인 것은 애매한 다수의 사람이다. 분노는 증오가 되고 증오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에 눈을 고정하니,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에는 증오의 대상만 보일 뿐 지금 여기의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증오에 눈이 먼 이발사는 눈앞의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고 끝내 죽이고 만다. 가련한 이발사 벤자민 파커가 사라진 자리에 ‘이발사의 탈을 쓴 악마’만 남을 뿐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살렸고 스위니 토드는 판사를 죽였다. 진정 복수에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연히 모두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스위니 토드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뮤지컬이 더 유명하다. 스티븐 손드하임 때문일 거다. 뮤지컬의 속성을 대중성에서 예술성으로 확장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불세출의 작곡가. 언뜻 보기엔 진부한 대중서사이지만 거기에 입혀진 음악의 옷은 꽤나 멋있다. 엽기적인 이야기에 품위가 생겼다. 뮤지컬은 역시 듣는 맛이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 6.21(화) - 10.3(월) 샤롯데씨어터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8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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