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욕망을 횡단하는 두 명의 클라우디오

[컬처]by 예술의전당

허구와 실재, 결핍과 욕망. 이 미묘한 경계를 넘나드는 자가 있다. 연극 <맨 끝줄 소년>의 17세 소년 클라우디오다. 소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경계 위에 호젓이 서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관객을 강렬하게 매료시킨 클라우디오가 2년 만에 돌아온다.

(좌) 배우 안창현 (우) 배우 전박찬 ⓒ김희진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 원작의 연극 <맨 끝줄 소년>은 2015년 초연에 이어 2017년 재연에서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독창적인 서사 구조와 연극적 화법으로 관객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클라우디오가 있다. 소년은 늘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교실 맨 끝줄에 앉아, 남들이 보지 못하는, 보지 않는 모든 것을 관찰한다. 특히 같은 반 친구 라파 가족을 주목하며 글을 써 내려간다. 그러다 점차 자기 글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위험한 욕망을 드러낸다.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클라우디오는 어떤 모습일까. 가장 큰 변화는 첫 더블캐스트로, 배우 전박찬과 안창현이 무대에 오른다. 연극 <에쿠우스>, <7번국도>, <이방인> 등에 출연한 전박찬은 <맨 끝줄 소년>의 초연부터 흥행을 이끌어 왔고, 안창현은 <감자콘서트>, <뿔>, <리어왕> 등을 통해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였다. 두 배우가 무대에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마요르가의 또 다른 연극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이후 6년 만에 같은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게다가 동일한 역할에 캐스팅된 우연 같은 운명. 그래서인지 두 배우는 인터뷰 내내 서로를 응원하며 허심탄회하게 역할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이들은 “클라우디오를 함께 맡게 돼 신기하고 기쁘다. 비슷한 듯 다른 두 명의 클라우디오는 <맨 끝줄 소년>을 기다려 주신 관객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치열함과 냉정을 오가는 고독한 외줄타기

손원정 연출에게 처음 더블캐스트 이야기를 들은 전박찬은 크게 환영했다고 한다. “안창현 배우의 더블캐스트에 대한 의견을 물으셨는데 1초의 고민도 없이 ‘정말 좋다’라고 얘기했어요. 안창현 배우는 정직하고 노력하는 사람인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안창현도 화답하듯 소감을 말했다. “2017년 <맨 끝줄 소년>공연을 봤는데 조금도 손볼 게 없어 보일 정도로 짜임새 있고 재밌더라고요. ‘나도 언젠가 이 작품을 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찾아올 줄 몰랐어요. 게다가 배울 점이 많은 형과 함께 연기하게 돼 영광이고 더욱 기쁩니다.” 전박찬은 삼연, 안창현은 초연의 부담을 갖고 있을 법하지만 두 배우는 이를 과감히 떨쳐내고있다. 전박찬은 이전과 다른 연기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초연 땐 조급한 마음에 빠른 템포로 연기를 하고, 위험한 시도도 종종 했어요. 재연 땐 그런 걸 다 거두고 글 쓰는 연기에 집중했죠. 그런데 이젠 인위적으로 더 성숙해지거나, 덜 성숙해지려 하지 않아요. 더블캐스트로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왔으니, 좋은 기운을 환기하며 감각을 자연스럽게 열어두고 있을 뿐이죠.”

2019년 연극 <맨 끝줄 소년> 연습 장면

안창현도 일부러 전박찬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달라야 한다고 의식하면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까요. 제 느낌대로 자연스럽게 연습할 뿐이에요. 그렇게 해도 조금씩 호흡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시작하자 두 배우의 눈빛이 더욱 진지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소 연습하며 느낀 클라우디오의 내면과 연기에 대한 고민을 찬찬히 털어놓았다. 클라우디오가 라파 가족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안창현 배우는 아마 공연이 끝날 때까지 치열하게 고민할 것 같다고 고백했다.


“지금까지로 보면 ‘결핍’ 같아요. 처음엔 자신의 결핍을 채울 재료를 찾기 위해 세상을 바라봐요. 그래서 자신한테 없는 걸 가진 라파 가족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들 또한 다른 결핍을 안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결핍을 깨달으며 클라우디오는 라파 가족에 더욱 몰입하고, 그 세계에 직접 개입하려 한다. 그런데 클라우디오는 치열한 몰입 과정에도 서늘할 정도로 냉정하다. 두 배우는 이 냉정함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전박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연습할 땐 감정이 격해져 연기 도중 울거나 화를 내기도 했어요. 그런데 클라우디오가 관찰한 것을 고스란히 글쓰기로 표현하기 위해선 보다 차갑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도 흔들릴 때가 있다. “저도 사람이라 연습이나 공연을 하며 냉정함을 잃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이 또한 클라우디오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아마 조금은 더 불안한 소년의 모습이겠죠.”

2019년 연극 <맨 끝줄 소년> 연습 장면

안창현도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연출님이 늘 저에게 ‘속은 뜨겁게, 표현은 차갑게’라고 말씀하세요. 그래도 연습할 때 순간순간 감정이 뜨거워져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보니 차가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더 고민하며 열심히 찾아가고 있어요.” 두 배우는 또 다른 외줄타기도 한다. 클라우디오의 개입이 관객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에 대한 고민이다. 안창현은 어떻게 하면 클라우디오의 행동이 관객으로 하여금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항상 염두에 둔다.


“속마음은 순박한데 그 안에 깃든 뭔가가 살짝 나오면 악한 아이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맨 끝줄에만 앉아 있던 소년이 앞으로 나온 것 자체가 ‘용기’를 낸 거잖아요. 이 의미를 최대한 살려 표현하고자 합니다.” 전박찬도 마찬가지다. “결핍으로 인한 클라우디오의 행동이 흉악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관객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접점을 찾으려 합니다.”

느낌 그대로의 문학처럼, 답이 없는 허수처럼

배우 전박찬 ⓒ김희진

클라우디오를 연기하는 데는 문학 교사인 헤르만과의 관계를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헤르만은 소년의 글에 점점 매혹되어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 한다. 그러다 그의 위험한 글쓰기를 눈치채지만, 멈출 수 없다. 헤르만은 초연 때부터 함께해온 배우 박윤희가 원캐스트로 연기한다. 전박찬은 “헤르만은 클라우디오가 처음 마음의 문을 여는 상대로 좋은 선생님이자 문학적 동지입니다. 박윤희 선배님도 어떤 선생님의 모습을 보일지 고민하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안창현도 “헤르만과 단둘이 만나 작문 수업을 받는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장면 등을 통해 함께 호흡을 맞추고 관계를 깊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그리고 싶어요”라고 전했다. 클라우디오의 관찰과 글쓰기는 점차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 아버지 라파의 아내 에스테르의 일상을 파고든다. 여기엔 문학과 예술에 대한 메시지도 켜켜이 겹쳐 있다. 그 메시지는 이 작품이 관객에게 주는 울림이기도 하다. 안창현은 이를 담은 대사를 소개했다. 후아나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이후 비슷한 대사가 또 한번 나온다. 클라우디오는 에스테르에게 쪽지를 주며 말한다. “아무 뜻도 아니에요. 그냥 느끼는 거예요, 읽는 사람이.”

배우 안창현 ⓒ김희진

안창현은 “모든 문학과 연극은 하나의 답과 해석이 있는 게 아니듯, 관객마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공연을 본 뒤 느끼는 것도 다 다른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전박찬도 작품에 자주 언급되는 ‘허수’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클라우디오는 문학에 소질이 있지만 수학도 잘해요. 그는 현실에서 정말 보기 힘든 케이스죠.”라며 웃었다. ‘허수’는 그런 클라우디오가 소설에 붙인 제목이기도 하다. “좌표니 적분이니 하는 어려운 수학 개념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 답이 정해져 있는 수학 문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요. 수학 이야기는 계속 나오지만 정작 해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들인 거죠.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관점만 발생할 뿐 엄청난 상징과 은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관객들도 굳이 답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 편안하고 쉽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또다시 강렬한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시킬 <맨 끝줄 소년>이 기다려진다.


글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기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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