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

[컬처]by 예술의전당

셰익스피어의 명작+맥밀란의 역작=드라마 발레의 수작!

10.22(토) - 10.29(토) 오페라극장

유니버설발레단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

1막 발코니 장면, 알레산드라 페리와 에르만 코르네호의 파드되 © Rosalie O’Connor

유니버설발레단이 드디어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공연한다. 케네스 맥밀란(1929~1992)은 프레데릭 애슈턴(1904~1988)과 함께 영국 발레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인물의 심리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맥밀란의 안무 스타일은 영국 로열 발레단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한편, 발레단을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1965년에 발표한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의 첫 번째 전막발레 안무작이자 대표작이다. 그동안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왔지만 맥밀란 버전이야말로 원작의 문학성을 가장 깊이 있게 살리면서도 인물들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로열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이 작품은 현재 세계 각지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버전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로열 발레단의 내한공연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그 후 국내에서는 맥밀란 버전으로 공연된 적이 없다가 약 30년만인 지난 2012년 유니버설발레단이 라이선스를 획득해 무대에 올리면서 국내 공연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타계 400주년인 올해, 4년 만에 유니버설발레단이 다시 공연한다. 특히 올해는 20세기 후반 맥밀란의 뮤즈로 활약했던 알레산드라 페리가 줄리엣 역으로 출연할 예정이라 더욱 기대된다.

수많은 예술가의 영원한 이야깃거리,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대명사다. 죽음으로 완성된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떠나 보편적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소재로 벨리니와 구노가 오페라를 작곡했고, 차이콥스키와 베를리오즈는 환상서곡과 교향시를 썼다.

 

무용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1938년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과 함께였다. ‘20세기의 모차르트’로 불리던 프로코피예프는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33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1934년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의뢰로 작곡을 시작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초연까지 다소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프로코피예프가 대본 작업에 깊이 참여한 덕분에 음악적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두 52곡으로 구성돼 있다. 곡마다 타이틀이 붙어 있으며, ‘잠에서 깨어난 거리’, ‘발코니 정경’, ‘티볼트와 머큐시오의 결투’처럼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곡들도 적지 않다. 여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동기 등 몇 개의 유도동기가 사용되고 있어서 음악만 들어도 바로 주요 인물과 사건이 떠오를 정도다. 댜길레프가 이끌던 발레 뤼스에서 작업한 경험이 있는 그는 스토리와 직접 연관 없는 디베르티스망(여흥적인 춤)은 철저히 배제했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으로 첫 번째 발레가 만들어진 것은 1938년 체코 브르노 극장이다. 키로프 발레단에서 프로코피예프와 안무가 레오니드 라브로프스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아 연기됐기 때문이다. 키로프 발레단은 2년 뒤인 1940년 최종 완성된 대본 및 음악으로 라브로프스키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보였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으로 첫 번째 발레가 만들어진 것은 1938년 체코 브르노 극장이다. 키로프 발레단에서 프로코피예프와 안무가 레오니드 라브로프스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아 연기됐기 때문이다. 키로프 발레단은 2년 뒤인 1940년 최종 완성된 대본 및 음악으로 라브로프스키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보였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당시 동서 냉전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방에 바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 음악에 자극받은 안무가들이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해 지금까지 50개가 넘는 버전이 만들어졌다.덧붙여 프로코피예프 외에 다른 작곡가의 음악에 토대를 둔 <로미오와 줄리엣>도 30개 가까이 된다.

원작만큼 수작으로 꼽히는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

유니버설발레단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

1막 무도회 장면

수많은 버전 가운데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사랑을 받기까지 친구였던 존 크랑코(1927~1973)의 역할이 컸다. ‘드라마 발레의 완성자’로 불리는 크랑코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의 친정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은 주역이다. 그리고 좋은 무용수였지만 무대 공포증으로 슬럼프에 빠졌던 맥밀란을 격려해 안무가의 길로 가도록 설득한 인물이 바로 크랑코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밀란은 새들러스 웰스 발레학교(현 로열 발레학교)를 거쳐 1946년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현 로열 발레단)에 입단했다. 뛰어난 테크닉과 우아한 스타일을 겸비했던 그는 오래지 않아 발레단의 주역으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무대 공포증이 심해져 발레단으로부터 3개월간 무대를 떠나 있으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쉬는 동안 그는 친구인 크랑코가 이끌던 소규모 발레 그룹에서 시간을 보냈다. 크랑코에게 안무가로의 전향을 권유받은 그는 발레단에 돌아온 뒤 신진 안무가 워크숍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물네 살이던 1953년 워크숍의 성과를 토대로 첫 안무작 <몽유병>을 발표해 호평받았다. 몇 번의 워크숍이 좋은 성과를 거두자 1955년 발레단은 그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동명 음악에 맞춰 안무한 <협주적 무곡>이 그것이다. 이후 그는 나치로부터 몸을 숨긴 유대인 가족 이야기인 <은신처>(1956), 성폭력을 테마로 한 <초대>(1960) 등 도전적이고 논쟁적인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간의 어두운 면까지 파고드는 심리 묘사와 성적인 테마까지 다룸으로써 발레를 동화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한 그의 안무 스타일이 초기부터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맥밀란을 안무가로 이끈 크랑코가 1960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떠나버렸다. 당시 로열 발레단에 애슈턴이 있어서 그에게 충분한 안무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크랑코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로미오와 줄리엣>(1962), <오네긴>(1965), <말괄량이 길들이기>(1969) 등 드라마 발레 3부작을 완성하게 된다.

 

1964년 맥밀란은 크랑코의 초청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작업할 기회를 가지게 됐다. 그 결과물이 이듬해 말러의 동명 음악으로 안무한 발레 <대지의 노래>다. 원래 로열 발레단에서 구상했지만 이사회로부터 말러 음악과 발레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당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로열 발레단에 행운으로 돌아오게 됐다. 크랑코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맥밀란이 자신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기 때문이다. 맥밀란은 그의 첫 번째 뮤즈였던 로열 발레단의 린 시모어가 크리스토퍼 게이블과 함께 고향인 캐나다 토론토의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을 위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파드되(2인무)를 만들었다. 그는 당시 세 번의 리허설만으로 그 유명한 발코니 파드되를 만들었다.

 

로열 발레단 예술감독이던 애슈턴은 이 발코니 파드되를 본 뒤 맥밀란에게 전체 작품의 안무를 완성시킬 기회를 줬다.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로열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추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맥밀란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 때 작품의 방향이나 캐릭터에 대해 시모어-게이블 콤비와 많은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두 사람을 통해 엄격한 가부장적인 사회에 맞서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로열 발레단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2월 초연에 관록 있는 스타 콤비인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를 주역으로 내세웠다.

 

캐스팅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공연 첫날 40여분간의 갈채와 43번의 커튼콜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발레단이 관객들을 겨우 설득해서 극장 밖으로 내보냈을 정도다. 그리고 맥밀란은 애슈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서 인정받으며 세계적 안무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평론가들을 비롯해 맥밀란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광장 장면 등이 작품의 일부에서 크랑코의 영향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과 광기의 연금술사’라는 그의 별명답게 전매특허인 극대화된 심리 표현, 격조와 관능을 동시에 갖춘 안무가 이미 완성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순진무구한 소녀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로 변해가는 줄리엣의 모습이야말로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로미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1막의 발코니 장면과 티볼트의 죽음 때문에 슬픈 첫날밤을 보내는 3막 침실 장면에서 줄리엣의 표정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뀌는지 보라. 또한 패리스와 사랑 없는 결혼을 강요받은 줄리엣이 자신의 침실에서 미동도 하지 않거나 로미오가 줄리엣의 시체(사실은 약에 취한 가사 상태)를 안고 춤을 추는 장면 등은 다른 어떤 버전보다도 강렬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시작된 그의 드라마 발레는 이후 1974년 <마농>, 1978년 <메이얼링> 등 또 다른 걸작들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캐스팅 문제로 로열 발레단과 여러 차례 충돌한 맥밀란은 시모어와 함께 1966년 베를린의 도이 치오퍼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4년간 떠났다. 1970년 애슈턴의 후임으로 돌아온 그는 7년간 로열 발레단을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후에도 로열 발레단의 수석 안무가로 오랫동안 활동하는 한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휴스턴 발레단,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등 해외 발레단과 지속적으로 작업하며 그의 드라마 발레를 전 세계에 뿌리내리도록 했다.그는 1992년 로열 발레단에서 오스트리아 루돌프 왕자의 사랑과 자살을 그린 <메이얼링> 재공연 중 백스테이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6주 후 국립극장에서 개막을 앞두고 있던 뮤지컬 <회전목마>의 안무를 막 끝낸 상태였다. 명실공히 평생을 무대에 바친 삶이었다.

 

글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10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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