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만들어나가는 미래, 잊을 수 없는 오디션

[컬처]by 예술의전당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이번 연재는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을 다룹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연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아티스트들의 목소리를 관객분들께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기획했습니다. 예술가들의 인생에서 크게 힘이 되었던 공연이나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공연을 여러분께 소개함으로써 위기 극복에 대한 희망이 여러분께 전해지길 바랍니다.


이번 호에서는 유럽과 한국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바리톤 이응광이 드라마틱하게 유럽 무대에 데뷔하는 계기가 된 오페라 <라 보엠> 공연을 회고했습니다.

유럽 데뷔 무대였던 오페라 <라 보엠>의 리허설 모습. ⓒ이응광

베를린 유학 시절, 극장 오디션을 보기 위해 스위스 바젤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낡은 숙소에 가방을 풀고 나와 낯선 도시를 배회했습니다. 스위스 사람 특유의 친절함과 여유 그리고 아름다운 라인강이 흐르는 바젤이라는 도시를 둘러보며 속으로 외쳤습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오디션 무대에 올라 아리아 두 곡을 불렀습니다. 오페라 감독은 모차르트 아리아를 더 요청했고, 세 번째 곡이 끝나자 그분이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다음 시즌부터 나와 함께 일할 수 있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서 “아직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지못한 상황이니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애써 침착하게 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Ja(네)”라고 대답해야 했을 테지만, 그런 나의 반응에도 그는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조만간 정식으로 연락할게. 고민해보고, 내 스위스 전화 받아”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렇게 바젤오페라극장에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1년 계약직’으로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 기회

오페라 <라 보엠> 중 연인 무제타와의 재회(좌), 로돌포와 불을 붙이는 장면(우). ⓒ이응광

입단의 기쁨도 잠시, 바젤오페라극장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몇 작품에서의 조역뿐이었습니다. 1년 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내 힘으로 만들어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나를 정단원으로 데려가줄 극장장을 찾아 타국의 어느 콩쿠르에 참가했습니다. 본선 날, 당시 바젤오페라극장 감독이었던 디트마르 슈바르츠(Dietmar Schwarz)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오페라 <라 보엠> ‘마르첼로’ 역의 가수가 부득이 하차하게 되었으니 ‘점핑(독일어로 Einspringen)’, 소위 ‘대타’로 와달라는 급한 부탁이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아니 선배 가수들의 드라마틱한 데뷔 스토리들을 구전되는 전설로만 여겼던 나에게 오페라 감독의 연락은 그저 반갑고 설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바젤로 돌아와 리허설 무대에 가보니 이탈리아 지휘자 마우리치오 바르바치니(Maurizio Barbacini)와 연출자 다비드 헤르만(David Hermann) 그리고 극장 주요 관계자들이 모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만 바라보고 집중하는 불편한 상황에 주섬주섬 대본을 꺼내 들었습니다. 지휘자는 바로 전체 스코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첼로의 모든 부분을 다른 배역 없이 알아서 혼자 불러보라고 주문했습니다.


다행히 반년 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국립오페라단 프로덕션 <라 보엠>의 마르첼로 역으로 데뷔했던 터라 로돌포, 쇼나르 그리고 콜리네가 없는 상황에도 저의 마르첼로 파트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 무사히 음악연습(Musikalische Probe)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26세의 젊은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덕에 연주한 지 반년이 더 지났음에도 가능했던 일이었겠지요. 지휘자는 연출자 이하 극장 관계자들에게 “이 친구로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지요. 속으로 무척 기뻤지만 말입니다.


사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데뷔 당시 불미스러운 화재 사건으로 인해, 계획했던 마지막 공연이 무산되었습니다. 무척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새로운 기회를 통해 당시의 아쉬움은 감사로 채워졌습니다.

유럽 데뷔, 나에게 보내준 믿음에 대한 보답

바젤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야나체크의 오페라 <죽음의 집으로부터>에서 ‘알렉산더 페트로비치 고리안치코프’ 역으로 열연하는 모습. ⓒ이응광

원래 입단하면서 맡았던 작은 역할들은 <라 보엠> 공연 일정과 겹쳐져 취소되었습니다. 드디어 ‘마르첼로’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유럽 무대에 데뷔하게 된 날, 소중한 기회에 보답하고자 최선의 열정으로 영혼을 갈아 넣다시피 하며 무대 위를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로돌포와 종이를 찢는 장면에서는 마술과 같은 불꽃 쇼를 펼쳤고 쇼나르, 콜리네와는 죽마고우 같은 편안한 호흡으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깔맞춤’ 춤도 선보였습니다. 미미하고는 가슴 미어지는 2중창을 진심을 다해 불렀지요. 특히 무제타와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연출자의 요구로 오랜 시간 입맞춤을 해야 했는데, 유럽에 처음 데뷔하는 동양인 같지 않게 노련하고 과감한 키스신을 이끌어냈습니다. 동양인의 수줍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정색 스키니진과 화이트, 블랙으로 이뤄진 무대의 극적인 색감, 그리고 현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연출로 베테랑 가수들과 무대 위에서 신나게 즐겼던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마르첼로 커튼콜 사인을 받으며 무대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날 관객들이 보내준 엄청난 환호와 박수는 오늘까지도 잊을 수 없는 울림입니다


극장이 나에게 보내준 믿음에 대한 보답이자 어쩌면 무대 위에서 계속 오페라 가수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절실함, 바로 그 절실함이 그날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대에서 인사를 마친 후 오페라 감독은 무대로 올라와 저를 번쩍 안아주었고 제 얼굴에 따가운 키스를 한 후 다음 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계약, 또 다른 시작

통영국제음악제에서 공연된 음악극 <귀향(Returning Home)>에서 율리시스 역을 맡아 페네로페와의 키스신을 연기하는 모습. ⓒ김시훈/TIMF

왠지 좋은 일로 나를 부른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계속 좋은 기회를 주려는 게 아닐까?’ ‘아니면 어제의 성공적인 공연을 그저 축하해주려는 것일까?’ 혼자서 수만 가지 생각으로 기뻐했다가 다시 마음을 비웠다 하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페라 감독의 방을 찾았지요. 감독은 저에게 “응광, 어제 넌 무대에서 최고로 빛났어”라고 격려하며 주역 전속 가수로 정단원 계약을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피가로, 샤플레스, 아모나스로, 레나토, 오네긴, 에스카미요 등 오랫동안 꿈꿔왔던 배역들의 아리아를 무대 위에서 부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된 겁니다.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게 된 것이죠. 얼마 후 그는 가난한 초보 오페라 가수가 생각하지도 못한 극장 내 최고 조건의 계약서를 보내왔습니다. 매 시즌 두세 작품만 맡게 되었으며 극장장과 오페라 감독의 배려 속에 국제 콩쿠르에 참여하고 다른 극장에서도 게스트 가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가수들에게 기회는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문득, 갑자기, 툭 찾아옵니다. 많은 인생이 그렇듯 말이지요.

내 인생의 공연, <라 보엠>

보헤미안들의 삶,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표현했던 마르첼로. 나의 인생과 닮은 이 배역. 어쩌면 저는 평생 보헤미안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은 가난하고 절박해야만 더 좋은 것이 나온다’고들 하지요. 물론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아니 어쩌면 모든 이들이 힘들어하는 이 시기에 예술은 위로의 도구로서 더 큰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헤미안의 삶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가치를 향해 여전히 박수를 보내며 그 길로 걸어가려 합니다. <라 보엠>, 나에게 첫 배역으로 다가와준 고마운 내 인생의 오페라입니다.

이응광 바리톤

스위스 바젤오페라극장의 주역 전속 가수를 역임했다. 현재 유럽 에이전시의 매니저 ‘Rita Ahonen’ 과 한국의 ‘봄아트프로젝트’ 소속 가수로서 유럽과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2020.04.2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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