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 신혼여행에서도 생방송…33년 뜨거운 안녕

[라이프]by SBS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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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게 세뇌된 사람, 김혜영>

1.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그의 집안도 어려웠다.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가평, 양구, 원주를 떠돌며 살았다. 내가 군인이면 내 가족들도 준군인이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6남매는 아침마다 구보를 했고 한겨울 개울가에서 얼음장 깨고 세수를 했다. 정리 정돈은 기본이었다. 아버지가 군인이라고 내가 왜 군인처럼 살아야 하느냐는 반항심이 있었다. 표현은 못 했다. 그러기엔 너무 착한 아이였다. 술을 마시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에게 오래도록 마음을 열지 못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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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사관학교인 서울예전 출신이니 어렸을 때부터 꿈이 연예인이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 연예인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제가 먼저 손 들고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어요. 그냥 착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 존재감이 전혀 없는 아이였어요. 좋게 말하면 긍정적인 아이, 나쁘게 말하자면 줏대가 없는 아이였어요."


어머니가 너는 커서 얼굴을 팔아먹고 살 팔자라는 말을 자주 했단다.


"어머니가 태몽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붉은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며 떠오르는 꿈을 태몽으로 꾸셨대요. 그래서 너는 얼굴로 먹고 사는 일을 할 거라는 말을 들으며 컸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한 계기로 CF모델 활동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연예인을 꿈꿨다. 1981년 MBC코미디언으로 시작한 연예계 생활은 순탄했다. 동기들은 24명이었다. 동기 몇 명이 자기보다 앞서 기회를 잡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다. 이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동기 중 하나를 키운다는 느낌이 오더라구요. 그때 제 생각은 그랬어요. 샘 난다가 아니고 이 친구가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우리 동기 중 누군가 큰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네 번째쯤 제게도 기회가 주어지는 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때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TV는 한층 더 강력한 매체로 도약 중이었고 국내 방송계는 언론 통폐합으로 KBS와 MBC 양대 방송 체제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시절 이 사람은 방송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코미디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베스트셀러 극장 같은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코너를 맡으며 활동 폭을 넓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 <싱글벙글쇼> 진행자로 발탁됐다. 스물여섯 살,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4개월 만이었다.


2. 김혜영은 강 석의 네 번째 짝이었다. 강 석은 1984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최미나, 권귀옥, 오미희가 그의 파트너였다. 김혜영은 전임자들처럼 자기 역시 짧으면 6개월, 길면 1~2년 정도 이 프로그램을 맡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33년 4개월, 1만 2,169일의 시간을 여기에서 보냈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 국회는 12대 국회였다. 그 이후 대통령이 7번 바뀌었고 국회의원 총선거가 9번 있었다. 88올림픽 한 해 전이었고 싱글벙글쇼를 시작하던 바로 그 전날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이 터졌다. 스물 여섯 살에 시작해서 결혼을 하고 딸 둘을 낳았고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시작할 때는 '혜영아!'라고 불렸지만 이제는 '김혜영 선생, 김혜영 여사!'라고 불린다. 무엇보다 호칭의 변화에서 세월을 실감한다.


싱글벙글쇼는 1980년대 후반부터 2천년대 초반까지 라디오 전체 청취율 부동의 톱이었다. 그 이후에도 톱3를 벗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광고가 폭주해서 광고를 가려 받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창 때는 협찬이 34개나 들어와서 소개 멘트를 한 사람이 못 읽고 두 사람이 나눠 읽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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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마치는 날 MBC 간부 한 분이 그러더라구요. 저희들이 MBC에 돈 많이 벌어다 줬다고요. 그때서야 그랬구나 했지요."


영향력도 대단했다. 신문으로 치면 시사만평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3김 패러디를 포함해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풍자가 이 프로그램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시사만화를 보는 듯한 쾌감을 주었다. 메인 작가로 23년을 일한 박경덕의 표현을 빌면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성역이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고 이만섭 국회의장이 사우나에서 우연히 만난 강 석에게 "그렇게 세게 말해도 됩니까"라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뉴스가 제 할 말을 못 할 때 이 프로그램이 뉴스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외압 같은 것은 없었을까.


"우리끼리 콩트 가지고 시비를 걸면 더 대박일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MC 입장에서는 그런 거 못 느꼈어요. 강석 오빠와 제가 할 말과 못할 말을 너무 잘 구분했고 무엇보다 작가들이 얄미울 만큼 선을 넘지 않으면서 대본을 잘 썼어요. 그래서 그런 것으로 우리가 지적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작가들이나 피디들은 그런 게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박경덕에게 물으니 어떤 때는 방송 끝나면 무조건 연락 끊고 사라지기도 했고 청와대, 검찰에서 한두 번 전화가 온 적도 있긴 하지만 노골적인 압력은 없었단다.


이 사람이 프로그램을 맡는 동안 한국 사회는 정치, 사회적 격변기였다. 이 프로그램은 민감한 이슈들을 때로는 우회하기도 했지만 피해가지는 않았다. 그런 프로그램의 안방을 지키고 있었으니 일종의 '정치적 각성' 같은 것은 없었을까. 그런 쪽으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이끌었지만 김혜영은 정치, 역사와 같은 거대 담론에 대해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개별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 관심이 컸지만 그 개인의 삶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공동체의 이슈를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조심스러움이 몸에 배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싱글벙글쇼>는 어떤 프로그램도 넘볼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작가, 진행자, 제작진의 역량과 용기, 전성기 시절 MBC라는 언론사의 추진력과 도전정신이 함께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김혜영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김혜영이 들어오면서 이 프로가 서민들의 방송, 없는 사람, 힘든 사람들의 친구가 됐어요. 김혜영은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고,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며 청취자와 완벽하게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게 쉬운 거 같아도 세상일에 공감하지 못하면 절대 안 되는 건데 김혜영은 그게 되는 사람이에요. 김혜영 없었으면 오늘의 싱글벙글쇼는 없다고 봐야 돼요." <박경덕/ 전 싱글벙글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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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은 슬픈 사연에는 꺼이꺼이 울고 기쁜 사연에는 자기 일인 양 박수 치며 함께 웃었던 것을 장수 비결이라고 했다.


"라디오는 거짓으로 안 돼요. 다른 프로는 대본이 있으니 대본대로 하면 되지만 라디오는 그게 안 돼요. 라디오는 말하는 사람이 진심이 없으면 듣는 사람이 바로 알아요. 꾸민다고 꾸며지지 않아요. 제가 여우가 아니라서 변신을 못 해요. 라디오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삶이 바로 제 삶이에요. 그걸 청취자들이 알아주신 거 같아요."


결혼하던 날도 웨딩 드레스 입고 방송했고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서도 생방송을 했다. 아이 출산하고 보름 만에 퉁퉁 부은 얼굴로 스튜디오에 나왔다. 다리 부러져 수술받고도 그다음 날 자기 자리를 지켰다. 신장에 구멍이 나 단백질이 그대로 빠져나가는 병을 앓아 숟가락 겨우 들고 화장실 가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며 5~6년을 살면서도 마이크만은 놓지 않았다. 그런 독한 열정이 전설을 만들었다. 이 사람에게 당연히 행복한 시절이었다.


"따지고 보면 김혜영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이 프로가 아니었다면 누가 제 이름을 그렇게 매일, 그렇게 많이 불러 주겠어요. 그래서 정말 행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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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혜영은 33년 동안 고락을 함께한 강 석에 대해 생각이 많은 듯싶었다. 지난 5월 10일 마지막 방송 장면을 유심히 보니 두 사람이 포옹하는 장면이 영 어색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이 부부 같은 관계라면, 오누이처럼 친하다면 서로에게 애썼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해야 할 텐데, 진심이 담긴 그런 멘트를 찾기 어려웠다. 프로그램과의 이별에 못지않게 33년 같이 한두 사람 사이의 이별을 아쉬워해야 할 텐데 그러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날 강 석이 김혜영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의례적인 작별 인사가 아니라 마음을 담은 사과의 말로 들렸는데 그 말에 대해 김혜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거 같지는 않더라고 말을 건넸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불편함이 시간이 갈수록 고질이 되었던 모양이다. 사람 사이의 일이란 어느 한 쪽의 말만 들어서는 제대로 알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이제 와서 두 사람 관계를 미주알고주알 알린다는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김혜영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자신보다 10살이 많고 코미디계 선배인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은 내부적으로 비밀이 아니었다.


"라디오 진행 커플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한 거 같아요. 부부가 그렇듯이 너무 속속들이 알면 단점이 보이잖아요. 그 단점이 너무 크게 보여서 장점을 가리고 단점으로만 상대방을 평가하잖아요. 편안하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상대방은 막 쏟아내고…"


자신의 불편한 마음이 프로그램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108배를 드리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모든 게 좋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불편한 대목도 있었지만 방송할 때만큼은 다시 보기 힘든 명콤비였다. 강 석이 탁월한 개인기로 콩트를 이끌었고 김혜영은 밑밥을 깔아주며 강석을 잘 받아줬다. 김혜영은 마이크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그러기는 강 석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시비를 불러올 수 있는 행동이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같았다. 정치권에서 특히 선거철만 되면 두 사람을 찾는 곳이 넘쳐났지만 누가 부른다고 해서 어디에 쉽게 얼굴 내밀지 말자고 약속했고 두 사람 모두 삼십 년 넘게 정치권 주변은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다른 방송에서 두 사람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동시에 스카우트하려고 했을 때 두 사람은 이견 없이 MBC에 남기로 했다. 그런 점에서도 두 사람은 잘 통했다. 두 사람은 궁합이 잘 맞는 커플이었다. 물론 모든 게 잘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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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야기를 시작한 지 네 시간쯤 지났을 때 김혜영이 슬그머니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것은…"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세요?" 3년 전 1억 원을 일시불로 내고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었단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던 듯한데 묻지를 않으니 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몇 년 전에 구두 닦는 분이 1억 원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읽고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그 분이 1억 원 모으려면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이분은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을 내는데 저는 전국적으로 사랑 받고 그분에 비하면 쉽게 돈을 버는데 나는 왜 못할까 싶어서 그때부터 저축을 시작했어요. 싱글벙글쇼 진행 30주년 기념으로 냈어요. 좋은 일은 따라 해도 좋은 거잖아요. 그래서 따라 했어요. 그러니 정말 좋더라구요."


월드 채널이라는 구호 단체 홍보 대사를 10년 전부터 맡고 있는데 이름만 빌려준 것이 아니었다. 매년 3천만 원 정도 기부를 하고 있고 이 돈으로 캄보디아에 학교를 지어준다. 올해는 유치원을 짓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였다.


이 사람이 미담 제조기인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니 이 지면에서 반복할 이유는 없다. 다만 한 장애인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같이 생각해 볼 만하다. 김혜영은 몇 년째 서울 대방동에 있는 한 장애인 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설악산 오색약수 온천탕에서 동해안 여행을 다녀오던 지체장애인 몇 명과 보호자를 만났다. 탕 안에서 즐거워하는 그 일행이 너무 예뻐 보여 사과라도 한 상자 보내고 싶어 보호자에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보호자는 김혜영을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혼자 여행 온 사람으로 생각하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전화번호와 주소를 남겼단다.


김혜영이 우연히 만난 장애인들을 도와 줄려고 했다는 것도 미담이지만 장애인들과 그 보호자 역시 김혜영을 도와 줄려고 했다는 것은 더 아름다운 이야기다. 김혜영은 이 사연을 말하며 몇 번이나 "너무 예쁘지 않아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김혜영은 이런 세상을 꿈꾼다.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한다.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ARS로 성금을 모으는 방송이다. 김혜영은 여기에서 부를 때마다 나갔다. 출연료는 6만 원이었다. 이 돈은 분장 한 번 받을 돈도 안 되지만 김혜영은 한 번도 출연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레이션을 자청하기도 했고 야외 녹화에 스튜디오 생방송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거 같아 좋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해요. 나누면 저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요. 사실 제가 어려운 사람의 손을 덥석 잡을 용기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다만 어려운 사람들의 손끝만 살짝 잡는 거지요. 그런데 살짝 손끝을 잡아주는 것만으로 그들은 용기를 내더라구요. 힘내서 일어서더라구요."


아버지는 김혜영이 중학교 1학년 때 군에서 제대했다. 연금이 나왔지만 6남매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는 연예인이 되어 돈을 벌자 가장 먼저 부모님의 빚을 갚고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쌀 한 가마씩 선물했다. 고마움이 무엇인지, 가난의 절실함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게 자신의 제일 큰 자산이란다.


KBS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 코너에 11년째 패널로 출연 중이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출연자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안아준다. 긴장한 출연자들 편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무명 시절 임영웅도 그렇게 안아줬다. 떨리면 자기 보며 노래하라고 말해준다. 출연자들의 시선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카메라가 자신을 잡든 말든 상관없이 출연자들을 응시하며 응원한다. 딴짓하는 법이 없다. 지난 10년 동안 이 프로그램 패널 중에서 출연자들이 제일 잘 기억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다.


5. <싱글벙글쇼>의 문법이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선하고 착하다. 악인이 아주 가끔 있는데 이들은 모두 다 회개할 운명인 사람들이다. 세상은 어렵지만 살 만한 곳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서로가 서로를 섬긴다. 이 사람은 여전히 <싱글벙글쇼>라는 프로그램이 만든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사람이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 세상인 동시에 가상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 세상은 선의를 보내면 그 선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세상이다. 선의가 악의로 오해되지도 않고, 선의가 무시 되지도 않으며, 선의가 호응을 얻지 못하는 법도 없다. 선의는 오직 선의로 반사된다.


이 사람은 선하게 세뇌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선행과 미담은 하나 같이 싱글벙글쇼 청취자 사연 감이다. 이 사람은 선의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늘 살던 동네에서 늘 만나던 사람들과 늘 하던 일을 하면서 산다. 거기에서 평화와 행복과 안식을 느낀다.


선의의 법칙이 지배하는 <싱글벙글쇼> 세상에서 33년 넘게 살면서 이 사람은 실수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이름 모르는 청취자들의 사랑을 무수히 경험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야유 대신 격려를 보내줬다. <싱글벙글쇼> 세상에서는 얼굴 모르는 타인들이 경계와 의심이 대상이 아니라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친구이자 우군들이다. 그 경험이 오늘의 김혜영을 만든 것이다. 타고난 성정도 그러하겠거니와 싱글벙글쇼라는 프로그램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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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와 담을 쌓고 산다. 악플 무서워 못하겠단다. SNS 세상은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세상이다. 익명의 가면을 쓰고 악플을 쏟아내는 세상이니 그런 세상을 이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기웃거릴 용기를 내겠는가.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자신의 집 담벼락에 악의에 찬 욕설을 쏟아내는 일이란 이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쪽 동네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세상을 반쪽만 보고 산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런 세상과는 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26년째 살고 있는데 그 아파트 동네 반장을 18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잘못 들었나 했다. 반장을 맡으신다고요? 동네 반장요? 그렇단다. 반장을 하던 이웃이 이사를 가 반장을 맡을 사람이 없게 되자 주변 사람들이 권해서 맡게 된 자리란다. 말하는 기세를 보면 동네 반장도 30년은 맡을 거 같다. 연예인이라고 동네 반장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이런 일을 상상하긴 쉽지 않다. 김혜영이 사는 세상이라 가능한 것 아닐까. 연예인인데 집에 화장대가 없단다. 반짇고리 같은 데 화장품 몇 개 넣어두고 쓴단다.


자신이 연예인이라고 유명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단다. 내가 김혜영인데 하는 생각 자체가 없단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 내가 어떻게 그렇게 작은 자리에 앉아 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매니저를 둔 적도 없다. 식당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서비스가 나올 때나 내가 연예인이구나 싶단다. 5년째 사용 중인 이 사람의 핸드폰은 모서리가 깨져 있고 액정엔 금이 가 있었다.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 같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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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집에 반짝이 옷이 하나도 없어요. 반짝이 구두도 하나도 없어요. 드레스도 없어요. 힐은 녹화용으로 몇 켤레 있지만 평소에는 늘 운동화 신고 다녀요. 제가 늘 같은 목걸이를 하고 나오니까 아침마당 진행자가 물어요. 그 목걸이에 무슨 사연 있느냐고. 그래서 제가 그렇게 답했어요.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주며) 반지도 이게 전부예요. 오늘 집에 있는 반지 목걸이 다 하고 나온 거예요."


이 사람처럼 부사를 잘 쓰는 사람도 보기 힘들다. 부사가 많은 말은 금방 질리는데 이 사람의 말은 부사의 기본 기능을 충실하게 살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감정과 느낌을 듬뿍 담아 말한다. 듣는 귀가 즐거웠다.


깔깔거리고 키득거리며 수다 떨듯 이야기를 나눴다. 말할 때 보면 타고난 연기자였다. 목소리를 낮춰야 할 때는 낮추었고 높일 대목에서는 높였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곱씹어가며 입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직문직답이었다.


6. 무한 긍정의 마력을 믿는 사람이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적이 없다고 했다. 연예계가 정글인데 -하기야 요즘 세상에 정글이 아닌 데가 어디 있을까마는- 자신은 정글 속 온실에 있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정말로 온실 속에서 살아왔을 수도 있는데 이 사람은 가시밭길도 온실로 여길 사람이다. 무한 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에게는 가시밭길도 온실로 보일 수 있다. 아니면 피투성이였던 시절 자체를 잊어버리고 좋은 시절만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심과 질투는 인간 세상에서, 특히 연예계에서는 성공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자신은 정말 그런 게 없단다. 얼마 전에 친한 후배 연예인 집들이에 다녀왔다. 정말 잘해 놓고 살더란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너무 대견해서 안아줬단다. 집에 돌아와서 둘째 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딸이 이러더란다.


"우리 엄마답네"


이제는 아주 유명해진 사람과의 관계를 꽤 길게 말한 뒤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그분이 유명하지 않을 때는 정말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그분이 유명해지고 나니 제가 멀리해줬어요. 바쁜 줄 아니까. 한가해지면 보자고 그랬어요. 그분이 그래요. 다른 사람은 잘 되면 질투하는데 김혜영 씨는 왜 그런 게 없어.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선생님이 잘돼야 제가 자랑을 하지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의 아버지는 20년 치매를 앓았다. 아버지를 돌보던 어머니가 2012년 갑자기 돌아가셨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죽음이었고 충격이 컸다. 이때 다짐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때는 후회를 남기지 말자. 엄마한테 못 한 거 아버지한테 다 하자. 아버지를 7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매주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일이 힘든 일이었을 텐데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일이 소풍 가는 일 같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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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했다면 힘들었을 텐데 언니, 동생이랑 같이 해서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자라면서 아버지한테 마음을 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7년을 그렇게 모시면서 마음에 응어리가 풀렸어요. 아버지가 우리들 마음 녹을 때까지 기다려주신 거 같아요. 부모는 돌아가시면서까지 자식을 일깨워주는 존재인 거 같아요. 아버지에게 감사하죠."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에게 기껏 한다는 복수가 그 사람 전번을 지우는 것이다. 정리 정돈을 강조하는 주임상사 출신 아버지 때문에 군대 내무반 생활하듯 산 것이 너무 억울했다. 연예인 되고 나서 처음으로 산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를 마구 흔들어서 엉망을 만드는 방법으로 '복수'를 했다. 그의 아버지 반응이 궁금했다.


"그 모습 보면서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 없는 데서 그렇게 했어요. 헤헤"


이 사람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강조를 할 때 같은 말을 세 번 하는 습관이 있다. 싱글벙글쇼 마지막 멘트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였다.


7. 싱글벙글쇼를 그만두고 나자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온 곳이 홈쇼핑 채널이었다. 원하는 시간, 원하는 요일, 원하는 품목을 말하라며 최고 대우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이들이 김혜영에게 제시한 조건을 여기서 밝히기는 어렵지만 놀라운 액수였다. 그녀는 좀 더 쉬고 싶다는 말로 거절했다. 혹시 물건 파는 일이 자신이 없어서 거절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그런 일이라면 잘 할 자신이 있는데 아직은 방송을 더 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무슨 옷을 입고 있어야 가장 빛이 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자신의 옷이 아니다 싶으면 아무리 화려한 옷이라도 내려놓는다. 10년 출연한 아침마당에서 코너가 바뀌었다. 바뀐 코너에서 자신의 역할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자 자진 하차하겠다고 했다. 조정을 해서 계속 출연하지만 자기 자리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그만둔다는 생각이다. 거액을 제시한 한 상조 회사의 CF 제안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따뜻한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진행을 맡고 있는 한 프로그램에서 쇼핑 코너가 만들어졌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는 몰랐던 내용이었다. 출연료를 비롯해 조건이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김혜영은 자기를 보고 들어온 협찬이 끝나는 대로 하차하기로 했다.


"저는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요. 그게 처음에는 손해인 듯싶지만 나중에는 이익이 되더라구요. 저는 예쁜 길로 가려고 노력해요. 그럴 때 마음이 편하고 좋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김혜영은 남편이 살림을 잘해서 자신이 방송을 하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고를 수 있는 것이라며 만약 자기가 생계를 책임져야 될 상황이면 그러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니다. 이 사람은 먹고살기 어려워도 자기에게 맞는 자리인지를 먼저 생각했을 사람이다.


"저에 대해 뭐 쓸 게 있을까요." 이 사람의 첫 마디는 이랬다. 그런데 말을 시작하니 이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말이라면 원도 한도 없이 했을 텐데 이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야기의 화수분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감당했던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자신이 이룩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세월이었기 때문일까. 기억이 분절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다. 33년이 3년 3개월 같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일 게다. 이 덩어리를 잘게 쪼개면 숱하게 많은 사연이 있다는 것, 그 사연 하나하나가 역사라는 것, 자신이 역사 그 자체라는 사실도 아직 모른다. 그런 것을 인식하기엔 자신의 분신과 이별한 시간이 너무 짧다.


김혜영은 얼마 전부터 다른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 중이다.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질까 싶어 불안하던 차에 제안이 오니 바로 응낙한 듯하다. 좀 성급하게 보일 수도 있겠는데 이 사람에게 싱글벙글쇼 빈자리가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박수받으며 명예롭게 내려왔지만 방송인에게 프로그램 하차는 이별이고 상실이 본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모양이다.


숫자에 밝은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CF모델을 하고 받은 돈이 1만 원, MBC 전속 코미디언으로 받은 월급이 18만 9천 원, MBC 경쟁률이 136:1, 처음으로 산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가 19만 원처럼 몇십 년 전의 숫자를 기억했다. 특히 돈과 관련된 숫자가 그랬다. 돈에 대해서 꽤 야무진 사람처럼 보였다. 거액을 쾌척한 것만이 아니라 작은 것도 다 기억할 사람이다. 적은 액수라도 돈을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닐 거라는 의미다.


이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이름 석 자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타로서, 공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이름 석 자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돈을 벌자고 하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는 사람이다. 기여한 게 많지만 받은 것도 많은 사람인데 그런 것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은 없을까.


"제가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예쁘게 사는 것, 나쁜 일로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 저를 아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 사람들 실망시키지 않고 반듯하게, 겸손하게, 거기에 조금 더한다면 조금씩 나누며 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거 같아요."


이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단다. 내가 힘들 때 김혜영이라면 나를 꼭 안아줄 거야, 나를 보듬어주고 위로해 줄 거야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듯하다.

윤춘호(논설위원) 기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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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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