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400만 원 빚이 5억 원으로…합법의 탈을 쓴 '공증 사기'

[이슈]by SBS

1998년 외환위기 당시 34살 정 모 씨는 어려운 부탁을 받았습니다. 작은 의류 공장을 운영하던 손위 동서가 원청 업체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했습니다. 원청 업체가 물건값을 안 주니 직원들 월급이며 갚을 빚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2천만 원만 빌려주면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 씨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부탁을 뿌리치기 어려웠습니다. 정 씨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동서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공장은 반년을 못 가 폐업했습니다. 손위 동서는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정 씨는 졸지에 2천만 원의 빚을 떠안았습니다. 당시 월급은 1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줄여가며 아껴도 빚은 줄지 않았습니다. 신용카드를 여러 장 만들어 빚으로 빚을 막아봤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사채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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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처음 만난 사채업자 A 씨는 선한 인상이었습니다. 첫 만남에서 100만 원을 빌렸고 4번에 걸쳐 모두 400만 원의 빚을 졌습니다. 이런저런 명목의 비용과 이자를 모두 합치면 법으로 정해진 이자율 한도를 훌쩍 넘겼지만 업계 관행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사채업자는 정 씨에게 1억 원의 약속 어음을 쓸 것을 강요했습니다. 나중에 정 씨가 사채업자에게 1억 원을 줘야 한다는 내용의 증서였습니다. 실제로는 정 씨가 건네받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이유를 묻자 사채업자는 "100만 원을 떼일 수 있으니 만약을 위해 쓰는 것이다. 원리금만 잘 갚으면 이 증서는 문제 될 것 없다."라고 했습니다. 꺼림칙했지만 서명하지 않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말에 정 씨는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시키는 대로 빈 종이 몇 장과 공정증서라는 문서에 지장을 찍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 씨는 공정증서가 어떤 힘이 있는 문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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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이 지난 어느 날, 정 씨는 회사로부터 월급 절반 가까이를 압류당할 것이란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채업자가 1억 원짜리 약속어음을 근거로 정 씨의 월급을 압류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정 씨는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돈만 갚으면 문제없을 것이라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둘째 치더라도,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법원이 압류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 씨는 나중에서야 공정증서가 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 씨가 사채업자와 공정증서를 작성했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정 씨가 작성한 적 없는 2억 500만 원짜리 어음이 더 있었습니다. 내용란이 빈 서류에 찍었던 지장들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 서류들에 존재하지 않는 채무 관계를 적어 넣었을 것이라고 정 씨는 짐작했습니다. 정 씨가 작성했던 어음과 작성하지 않았던 어음의 빚을 모두 더하니 5억 500만 원이 됐습니다.사채업자 A 씨에게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파악된 것만 30명이 넘습니다. 피해자들이 설명하는 사채업자의 수법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300만 원 정도의 돈을 빌려주면서 수천만 원의 약속 어음을 쓰게 하고 변호사에게 공증을 받습니다. 300만 원은 미끼입니다. 갚든 갚지 않든 공증 받은 약속 어음을 집행해 채무자의 자산을 압류합니다. 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 공증은 중간 절차 없이 채무자의 자산을 바로 압류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는 셈입니다. 미리 지장을 받아놓은 빈 공증 위임장이나 어음 서류를 꾸며 무제한으로 빚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피해자들은 주장합니다. 한 번 걸리면 평생 헤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피해자들은 사채업자가 '기생하기 위해' 공무원이나 공기업, 대기업 직원 등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돈을 빌려준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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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라도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걸까요. 빌리지 않은 돈을 갚으라는 것이니, 소송을 걸면 해결할 수 있을 듯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한 피해자는 사채업자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걸었습니다. 3년 넘는 다툼 끝에 대법원까지 끌고 가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사채업자에게 급여를 압류당하고 있습니다. 사채업자가 대법원 판결이 난 공정증서가 아닌 다른 공정증서로 급여를 압류하기 시작해서였습니다.


피해자들 주장대로라면, 사채업자는 10분 만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채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한두 개쯤 효력이 없다는 판결을 받더라도 다른 문서를 만들어내 자산을 압류합니다. 피해자가 이 문서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데는 3년이 걸립니다. 변호사를 고용해 지난한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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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공증 사기'라고 부릅니다. 현장에 가면 사채업자가 수백 장의 문서를 들이밀어 혼란스럽게 만들고, 돈이 급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피해자들은 호소합니다. 조금 더 침착했다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당하지 않았을 피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급하고 부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400만 원 빚이 5억 500만 원이 될 수 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허술한 공증 제도가 이런 범죄를 성립시킨 밑바탕이었습니다. 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는 문서가 10분 만에 작성됐습니다. 법원은 공정증서가 형식을 갖췄는지만을 평가했습니다. "신용불량자에게 담보 없이 1억 원을 빌려줬다"는 상식 밖의 내용은 공증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실로 여겨졌습니다.


정 씨는 자식들 대학을 졸업 시키고 정년 이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버텨왔지만 준비된 미래는 없다고 정 씨는 말합니다. 버티며 살아온 인생이었고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빼앗긴 채 살아온 인생이었다고 합니다. 20년이 넘는 세월이었습니다. 정 씨는 이번 달 월급도 압류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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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근 기자(geu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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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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