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소녀 성학대, 침묵의 공범들 있었다

[컬처]by SBS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는 평생 자신의 노력과 세월을 다 바쳐온 꿈을 포기해야 할 때다. 더 치열하게 노력한 만큼 그 고통은 더 커진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이 아닌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라면, 게다가 그 외부가 온통 부조리로 이루어진 경우라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절망이다. 평생 꿈꿔온 꿈은 물론 자신의 치열한 노력까지 무가치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트라이애슬론 최숙현 선수의 안타까운 선택은 모든 이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그에게 가해진 폭행이 훈련만으로도 고되었을 그를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럽게 짓눌렀을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더 분노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매번 종목만 바뀔 뿐, 비슷한 뉴스가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Athlete A)는 이것이 비단 한 종목, 한 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미시건대 체조팀과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의 팀닥터로 일한 래리 내서르는 어린 여자 체조선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 그의 학대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졌고, 현재까지 밝혀진 피해자만 500명이 넘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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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감춰질 수 있었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작품은 래리 내서르 개인의 범죄보다 그의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를 파헤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성인 여성이 주를 이루던 체조계는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선수 연령대가 낮아졌다. 1976년 전설적인 10점 만점 연기를 보여준 나디아 코마네치를 기점으로 10대 소녀들이 주요 선수층으로 고착화된다. 작고 마른 아동 같은 몸매가 체조 선수의 가장 이상적인 몸매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게다가 루마니아나 소련 같은 동구권이 올림픽 메달을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그들의 엄격한 훈련 방식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 루마니아에서 망명한 카롤리 부부는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 코치가 되어 엄격한 훈련 방식을 고수한다. 국가대표 및 상비군으로 선출된 선수들은 부부가 운영하는 캠프에서 몇 달씩 훈련을 받았다. 인적이 드문 산속 캠프에 부모들의 접근은 금지되었다. 래리 내서르는 그곳에서 선수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팀닥터로 일하며 소녀들을 유린했다.


선수들은 대체로 대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체조를 시작한다. 국가 대표급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학교도 가지 않고 홈스쿨링을 해가며 오로지 체조에만 매진한다. 그들의 인생은 체조와 하나였고 올림픽 메달은 그들이 포기한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장시간 강도 높은 훈련으로 늘 부상과 통증에 시달렸지만 코치들은 선수의 상태보다 기술의 완성과 더 높은 점수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다.


"대표팀에서 래리 내서르만이 유일하게 친절한 어른이었다"는 한 선수의 눈물어린 고백은 소녀들이 처해있던 상황의 폭력성과 정서적 피폐함을 보여준다. 내서르는 따뜻한 격려와 사탕 몇 개로 소녀들의 마음에 쉽게 파고들 수 있었다. 그의 치료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문제를 제기한 소녀들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이상한 아이로 낙인찍혔다. 철저한 무시로 소녀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사실인지를 의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침묵하게 만든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자신의 꿈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될 수 있다는 처참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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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어린 여자 선수들을 유린한 팀닥터 래리 내서르. 징역 175년을 선고받았다.

2015년 내서르의 치료가 이상하다는 것을 협회에 신고한 매기 니콜스는 조사 기록에 익명의 '선수 A'(Athlete A)로 표기되었다. 매기와 부모의 신고는 코칭 스태프에게 무시되었고, 체조협회도 은폐했고, FBI조차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선수를 유린한 것은 내서르였지만 그것은 결코 단독범행이 아니었다. 체조 선수들의 이미지를 활용한 마케팅에만 집중했던 체조 협회장과 자신들이 성취한 결과에 취해 선수들의 인권에는 관심도 없었던 코칭 스태프도 모두 그의 범죄를 은닉해 준 공범이었다.


내서르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영화의 한글 제목은 피해자 중 한 명의 발언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자라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올 것이다"라며 피고인석에 앉은 내서르를 응시하였다. 판사와 방청객의 격려가 뒤따랐다. 피해자들을 대신해 기소한 검찰은 그들을 범죄의 희생자(victim)가 아닌 생존자(survivor)로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매기도 '선수 A'에서 벗어나 자기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선수들은 내서르의 폭력은 자신이 선수로서의 경험, 성취 심지어 올림픽 금메달까지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피해자들의 고통과 분노를 귀담아 들어준 법정과 175년형이라는 판결이 수치심에 잠식된 자신의 노력과 그 결실을 조금씩 제자리로 돌려놓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최숙현 선수의 죽음이 의미 있게 기억되려면 이 사건이 모든 스포츠 협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표면적으로 거론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상적인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이 규제될 수 있도록 적법한 처벌이 가능한 사회라는 믿음의 회복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 애초 한국에서 아동 포르노 범죄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나마 대안으로 기대되었던 범죄자의 미국 인도가 좌절되었다. 성범죄로 구속된 정치인의 모친 장례식에는 공직자들의 직함이 새겨진 조화가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다.


가해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무심한 사법 정의와 정치 사회의 구조는 피해자 보호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뀌어야 비로소 피해자들이 더 이상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사법정의와 제도적 개혁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고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찾는 생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지미 | 영화평론가

2020.07.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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