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히 들려오는 기적소리··· 순수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래

[여행]by 서울경제

제천 진소마을-'박하사탕'

영호가 두 팔 벌린채 절규하던 철길

'굴곡진 삶의 시간 되돌릴수 있다면···'

인생의 고통 처절하게 느끼던 '그 곳'

백운면 애련리에 자리잡은 산골마을

울창한 숲 한복판으로 흐르는 진소천

20년전 영화속 풍경 고스란히 간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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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하사탕’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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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 마을의 철길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때는 1999년 봄이다. 20년 전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동료들의 모임인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에 김영호(설경구 분)가 후줄근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영호는 싸구려 반주기계를 켜고 노래를 부른다. 그가 고른 곡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다. 영호의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가사는 이 남자의 삶이 무언가 한참 잘못됐음을, 좌표를 잃고 나아갈 곳을 찾지 못해 비틀거리고 있음을 가리킨다.


주위를 둘러보니 졸졸졸 흐르는 강물도 있고 기차가 달리는 철길도 눈에 들어온다. 친구들이 대낮부터 흥에 겨워 쿵작쿵작 노래 부르며 몸을 흔들고 있을 때 영호는 대열을 이탈해 철길 위로 올라선다. “아~.” 탄식과 회한을 가득 담아 짧게 소리를 내지른 뒤 기차가 나오는 터널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뒤늦게 친구 한 명이 뛰어와 “내려오라”고 소리치지만 이미 늦었다. 영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차를 마주 보며 두 팔을 벌린 채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한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박하사탕’의 첫 장면이다. 스스로 삶을 내던진 주인공을 먼저 보여준 영화는 이후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서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 포개진 한 인간의 일생을 고요하게 관찰한다. 1999년 봄을 시작으로 사흘 전, 1994년 여름, 1987년 봄, 1984년 가을, 1980년 5월, 1979년 가을의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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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진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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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진소천 위로 철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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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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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철길.

프롤로그에 나오는 야유회 장면은 충북 제천의 진소 마을에서 촬영됐다. 백운면 애련리에 자리한 이곳은 천등산 줄기에서 이어지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앞으로는 제천천의 상류인 진소천이 흐른다.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2000년에 개봉한 작품임에도 영화에 나왔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맨발로 걸으면 지압을 받는 듯 시원한 통증이 느껴질 법한 자갈밭, 교량 위에 세워진 철길 모두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워낙 외진 마을이라 예전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박하사탕’ 개봉 이후 방문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지금도 주말이면 영화 속 ‘가리봉 봉우회’처럼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는 무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늘어난 여행객 덕분에 마을 인근에 펜션도 여러 채 들어섰다.


왜 영호가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목놓아 외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관객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현장에 투입돼 실수로 소녀를 총살하면서, 1980년대 경찰관으로 운동권 학생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면서 영호의 영혼은 망가졌다. 운동권 학생의 일기장에 적힌 ‘삶은 아름답다’는 글귀를 믿지 못할 만큼, 새하얀 박하사탕을 건네며 수줍게 웃던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을 떠나보내야 할 만큼 냉소적인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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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하사탕’의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진소 마을이다. 때는 1979년 가을이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일은 머릿속에 그려본 적조차 없는 스무 살의 영호가 공장 동료들과 함께 마을을 찾았다. 꽁꽁 싸매둔 진심을 어서 전해야 할 소녀 순임도 무리 속에 섞여 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통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말고 영호가 잠시 자리를 빠져나온다. 몇 걸음 걸어가더니 모래밭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눕고는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한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영호의 눈가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찰나, 화면이 멈추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이때 영호가 눈물을 흘린 것은 먼 훗날 자신에게 닥칠 비극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젊음의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문득 벅찬 환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다고, 삶은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바람이 속절없는 희망임을 알기에 맑디맑은 영호의 낯빛을 보는 우리의 가슴은 그만 무너지고 만다.


글·사진(제천)=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2019.07.1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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