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애달픈… 유배지서 꽃피운 로맨스

[컬처]by 세계일보

죄인들의 서글픈 사랑


정조 시해음모사건 연루 된 조정철

당시 목사, 조에 누명 씌우려 하자

정인 홍윤애 모진 고문 당한뒤 자결

조, 훗날 제주 목사로 와 비문지어


함경도 부령 쫓겨난 김려 모진 생활

기생 연희 옷 지어주며 말벗도 해줘

유배지 진해로 옮긴 뒤 그리움 커져

연희에 대한 감정 290편 시로 지어

세계일보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성 추사 김정희 유배지. 조선시대 제주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가장 자주 활용된 유배지였다.

고려, 조선의 ‘오형제도’(五刑制度·사형, 유형, 도형, 장형, 태형)에서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일단 유배에 처해지면 기약없는 임금의 용서와 부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니 오늘날의 무기징역과 비슷했다.


누구에게나 유배는 근거지에서의 축출, 구금, 격리를 의미했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은 유배인의 신분, 유배지의 관리 혹은 주민들과의 관계, 경제적 능력 등에 따라 크게 달랐다. 지방관과 더불어 지역 명소를 찾아 유람을 떠나는가 하면 동행한 가족이나 제자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이런 일들 중에는 ‘러브 스토리’도 있었다. 유배인들 중에는 현지의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른 이들이 적지 않았다.


최악의 유배지로 꼽히는 곳에서 절절한 로맨스를 꽃 피운 두 선비가 있었다. 제주도에 감금된 조정철(1751∼1831)과 함경도 부령으로 쫓겨난 김려(1766∼1822)가 주인공이다.

비극적 사랑에서 태어난 ‘유배문학의 꽃’

“영원한 세월에 아름다운 이름 족두리풀처럼 강렬하고/한 집안에서 난 높은 정절은 아우 언니 뛰어났으니…”

조정철이 제주 여인 홍윤애를 위해 지은 비문 중 일부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지난달부터 열고 있는 특별전 ‘제주 유배인 이야기’에서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해 세워준 유일한 이 비문은 유배문학의 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비문이 암시하듯 조정철과 홍윤애는 슬프면서도 극적인 반전까지 더해진 로맨스의 당사자들이다. 정조 시해음모사건(1777)에 연루된 조정철은 조선의 ‘최장기수’로 무려 29년의 유배 생활 중 27년을 제주도에서 보냈으며, 그 시간은 유독 혹독했다. 제주목사 김영수는 불을 때지 못하게 하고, 쌀밥도 금지했으며, 외부인과의 접촉과 서책의 소지를 금지했다. 다른 제주목사 김시구는 조정철에게 역모죄를 씌우려 했는데, 이 때 조정철, 홍윤애의 사랑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김시구는 국왕 시해와 관련된 중죄인이 외부인과 접촉하고 축첩을 하였다는 죄를 씌우기 위해 홍윤애를 모질게 고문했다. 그러나 홍윤애는 끝내 조정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했고, 결국 “공이 사는 것은 이 한 몸 죽는 것에 있습니다”라며 스스로 목을 맸다.


1805년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은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내다 1811년 제주목사를 자원해 부임했다. 홍윤애의 무덤을 단장하고 비문을 지어준 것이 이때였다. 27년의 제주 유배생활을 기록한 문집인 ‘정헌영해처감록’에는 홍윤애의 발인이 있던 날 참담한 심정으로 시은 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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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정치인이 조정철이 제주에서 만난 여성 홍윤애를 위해 지은 비문을 새긴 묘비 탑본의 앞 뒷면. 국립제주박물관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해 세워준 유일한 이 비문은 유배문학의 꽃으로 평가받는다”고 소개했다. 제주문화원 제공

“귤나무 우거진 성 남쪽 석자 분묘/젊은 혼 천년토록 원한 남으리./초장 계주를 누가 드릴까/한 곡조 슬픈 노래에 절로 눈물이 고이네”

유배지에 만난 여인에게 바친 290편의 시

김려는 서학을 이야기하면서 서해의 어떤 섬에 진인(眞人)이 있으며, 병마(兵馬)가 대단하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1797년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길로 내몰리던 그날은 아내가 막내를 낳던 날이었으니 그의 황망함이 더했을 것이다.


양반 출신의 유배인들 중에는 유배지의 관원, 유지들과 가깝게 지내며 중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호사라 할 만한 생활를 누린 이들이 있었다. 상소가 문제가 돼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를 간 철종대의 정치인 김진형(1801∼1865)은 그 곳 양반들은 물론 기생들까지 대동하고 칠보산 유람을 떠나기도 했다.


김려의 상황은 달랐다. 지방 수령과 아전, 보수주인(保授主人·유배인의 거처와 음식을 마련해 돌보는 한편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던 현지인)의 핍박과 모멸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생 연희를 만났으니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년 여의 부령 유배생활 동안 연희는 김려의 말벗이 되었고, 직접 옷도 지어주었으며 부모의 기일에는 제사상까지 차려주었다. 그러나 김려가 신유사옥(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탄압사건)해 얽혀 유배지를 경상도 진해로 옮기면서 두 사람은 이별을 해야 했다. 진해에서 김려는 부령을 그리워하며 290편이나 되는 시를 지어, ‘사유악부’란 책으로 묶었다. 여기에 실린 시의 2수부터 289수까지가 연희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대 무엇을 생각하나요, 생각하는 곳 저 북쪽 바닷가’로 시작하는 사유악부의 모든 시는 솔직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앵두)한 알을 깨물며 연희가 말했지/“앵두가 붉어요? 제 입술이 붉어요?”/늙은 몸으로 변방에서 귀양 살면서/삼년 동안 그 열매로 배를 채웠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2019.12.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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