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첫사랑의 집을 아시오?"

[여행]by 디아티스트매거진

한국에는 지평선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날씨가 우중충한 날 먼 바다를 바라보면 ‘지평선이 저런 느낌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날도 그랬다. 하늘과 바다와 구름의 색깔이 모두 하얀색이라, 해변의 모습은 이젤 위에 올려만 둔 채 아직 채색하지 않은 풍경화 같았다. 그리고 카페 서연의 집도 이젤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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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서연의 집'

올레 5코스에 포함돼 있는 위미해안로는 카페 ‘서연의 집’이 있어 도로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붐빈다.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의 에필로그를 장식해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인상을 남겼던 그곳. 곧바로 눈에 띌 만큼 화려한 건물은 없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알바생은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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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카페는 고즈넉하게 첫사랑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싶은 사람에겐 적당치 않은 장소였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기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인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잠깐 책이라도 읽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새 새로운 사람들로 공간이 꽉꽉 들어차 있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모두 아이를 하나 둘씩 딸린 가족이거나 젊은 연인, 혹은 동성의 친구들. 모두의 첫사랑이자 각자의 첫사랑인 서연을 생각하며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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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는 공간을 장식하는 행위다. 하지만 서연의 집은 공간 전체가 마을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카페 서연의 집은 <건축학개론>과는 다소 유리된 느낌이었다. 첫사랑의 기억을 박제하여 보관할 수 없겠지만, 서연의 집은 박제된 첫사랑의 집이었다. 영화를 볼 땐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이곳에 올 때만큼은 ‘여기가 바로 서연의 집이래.’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곳. 영화처럼 편집할 수 없는 현실의 공간은, 아무래도 영화를 보며 느꼈던 첫사랑의 감동을 전해주기에 많이 부족하다. 어쩌면 그러한 공간적 소외감은 영상이 촬영된 장소가 감수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이리라.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서연과 승민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나 관련 서적, 연필 세트 등도 그러한 분위기를 한껏 돋아준다. 정말로 서연의 집은 서연과 승민의 이야기로 가득한 것이다. 거기엔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첫사랑이 스며들어갈 구멍이 전혀 없다. 다만 넘쳐나는 셀카와 가족사진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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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기하게도 바로 그런 생각이 들 때부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첫사랑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사진을 다 찍고 할 게 없어 공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커플들을 보거나 아이의 사진을 찍으며 미소를 짓는 부모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와서 앉아 있는 걸까? 저 여자는 저 남자의 첫사랑일까? 아이의 사진을 찍는 아버지는 아이에게서 자신의 첫사랑을 보고 있을까? 

 

카페에는 서연과 승민의 텍스트로 가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영화 바깥의 첫사랑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마침내 자기에게로 향할 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는 시작된다. 북적이던 공간에서 벗어나 한적한 도로를 (혼자든 함께든) 말없이 걸어갈 때나 차에 올라타 벨트를 매는 그 짧은 순간에 말이다.

 

서연의 집에는 (당연히) 내 첫사랑의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첫사랑을 추억할 촌음조차 없다. 사진-문구-사람들의 대화로 끊임없이 재생되는 승민과 서연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이야기를 비루하게 만들 정도다. 하지만 긴 시간 박제된 첫사랑의 집에 갇혀 소외를 느끼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억눌렸던 그리고 말하고 싶었던 첫사랑의 기억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카페 서연의 집은 첫사랑을 닮았다. 밉지 않은 그 사람과 닮았다. 생각해봐야 그리움만 더하고 한숨만 나오지만, 그래도 그 생각에 찌질했던 자신도 아름답게 기억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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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의 작업실. 영화에서는 승민과 서연이 맺어지지 않지만, 촬영 세트에서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다. 이 또한 모순이 아닐지.

한 가지 더. 영화 <건축학개론>을 본 사람들은 아마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렸을 테고 카페 서연의 집을 찾는 사람들은 영화를 떠올리며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든 서연의 집이든 이들이 주는 교훈은 동일하다. ‘내 첫사랑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바로 지금 여기 내 곁에는 누가 있는가? 첫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지금 내 곁에 없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카페를 아름답게 수놓는 수많은 커플들과 가족들의 모습은 만날 수 없는 첫사랑보다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카페 서연의 집/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지근거리)

[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2015.08.2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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