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설렘

[컬처]by 디아티스트매거진

성큼 다가온 겨울,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떠나보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 만물이 잠시 안식을 취하는 시기, 겨울. 하얀 표면 아래 깊은 곳에서 헐벗은 채로 잠든 모든 육체들은 고요하다. 그 꿈결의 잔잔한 미동 가운데에 만물이 간직한 수많은 감정들은 잠든 육체를 벗어나 자유로이 공허하고도 추운 땅 위를 천천히 걸어간다. 그 생명의 감정들은 외롭고도 처량하다. 육체의 구속을 벗어난 감정이 불러오는 쓰린 아픔은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간만큼 긴 고난이다. 그러므로 이 감정들은 언제나 봄의 향긋함을 기다리면서, 육체의 따듯한 체온 속으로 얼른 폭 파묻히길 희망하면서 긴 고통을 인내한다.

떠나보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오프닝 시퀀스. 겨울의 고요한 바람이 휘날린다. 그 가운데 까만 옷을 입고 새하얀 눈밭에 누워있는 한 여인. 그녀의 곁을 포근히 감싸주는 눈은 마치 이불처럼 포근했고, 그 안에서 그녀는 편안한 듯 안온함을 느꼈다. 편안히 감은 두 눈은 고요했고, 다시 뜬 눈은 영롱했다. 그렇게 흰 바탕에 누운 검정은 편안해 보이지만 반대색의 대비로 인해 이질감을 띤다. 함께 공존하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흰색과 검은색의 뚜렷함은 이내 클로즈업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아득히 멀어지며 모두 하나의 프레임 속 풍경으로 동화된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모습의 은유. 그런 그녀가 참고 있던 숨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내뱉는 것처럼, 앞으로 그려질 서사는 그녀가 참고자하는 무엇과 그 인내를 지속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풍경에 동화된 여인 ‘와타나베 히로코’는 2년 전 설산에서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추모식에 와 있다. 사람들 앞에서 애써 웃고는 있지만, 죽어서 ‘눈’이 되어버린 이츠키에 대한 격렬한 그리움 탓에 그녀는 차가운 눈밭에 스스로의 몸을 뉘이고, 창 밖에 쏟아지는 눈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렇듯 잊을 수 없는 사람에게 향하는 강렬한 감정, 그리움. 그리움 그 본원에 가득 찬 ‘그 사람과 만나고 싶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갈망에 히로코는 이미 도로로 변해버린 이츠키의 중학교 시절 옛 집으로 편지를 보낸다.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소실(消失)된 건물로의 편지는 지금은 떠나버린, 상실한 인물과의 추억, 과거에 침윤된 인물의 정체된 심리를 시각화한다.

떠나보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영화 <러브레터>는 바로 이 그리움으로 촉발된 펜팔의 주고받음을 그린다. 히로코가 보낸 옛 연인을 향한 러브레터는 우연히도 죽은 연인과 이름이 같아서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는 중학교 동창 ‘후지이 이츠키’(女)에게 보내진다. 편지를 주고받는 발신자와 수신자, 히로코와 이츠키(女)는 서로의 외모가 같다는 공통점과 사랑하는 사람을 ‘눈’ 때문에 잃은 공통의 슬픈 기억을 공유한다. 그렇게 교차되는 공유지점을 통해서, 눈의 계절에 그리운 사람을 이야기하는 서로의 편지는 이츠키(男)를 가운데에 둔 채 히로코와 이츠키(女)가 느꼈던 그리움, 사랑, 원망 등의 모든 감정을 소묘한다. 이 모든 과거의 감정들은 ‘아련함’이란 이름의 현재의 감정으로 시간적 동기화를 이루며 잊고 있었던 혹은 아팠던 기억의 대상의 현전을 이룬다.

 

흔히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작동원리를 생각해보면, ‘이미 떠나간 사람에 대한 미련으로 내 마음 속에 그를 남겨 두기 위한 반발력’, 스스로 분출하는 인력(引力)에 의함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츠키(男)에 대한 히로코의 그리움의 형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움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스스로가 마음 속에 잡아두었던 사람을 정리하고 떠나보내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허감’, 의지의 척력(斥力)의 감정. 이처럼 <러브레터>의 감독 이와이 슈운지는 이 영화를 통해 그리움의 정의를 새롭게 정립한다. 억지로 내 마음 속에 잡아 두려하기에 생기는 미련의 감정이 아니라, 떠나간 사람의 기억과 추억과 향기와 시선을 조금씩 정리해 나가며 생기는 미묘한 감정. 미련이라기엔 심하고 아련함이라기엔 조금 약한, 중간 어딘가 쯤에 매몰된 아프면서 아름다운 감정. 이는 언제나 마음 속에 꿀과 같은 끈적함으로 남아 찝찝함과 동시에 아쉬움을 남긴다.

떠나보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감정에 기반을 둔 모든 행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적 행동 후에 결과로 다가올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깨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에는 다분히 의지가 필요하며, 의지에는 그것을 촉발시킬 계기가 필요함은 자명하다. 이러한 감정정리 공식에 따라 그리움이란 감정에서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멀리 밀어내기 위해서도 이 처음의 계기는 꼭 필요한데, <러브레터>에서 히로코와 이츠키(女)에게는 서로 주고받는 편지가 그 계기로써 작동한다. 따라서 편지의 소통을 통해 히로코는 그리움이란 감정 속에서 이츠키(男)를 밀어내고, 이츠키(女) 또한 편지를 통해 과거의 아련했기에 희미해지던 첫사랑, 이츠키(男)를 추억과 아련함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과거의 추억을 통한 두 여인의 이츠키(男)를 둔 감정의 줄다리기는 서로 내면의 그리움에 대한 감정적 정리를 보다 손쉽게 진행하게 만든다.

 

이 정리를 통해, 히로코는 이츠키(男)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이츠키(女)와 비슷한 외모에 있음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 원망감에 울기도 하고 화도 내지만, 아련함으로 남은 계기는 차치하고 이내 깨닫는 건 이츠키(男)가 느끼고 실행한 사랑이란 감정의 일방향성이다. 그러므로 히로코는 자신이 품고 있던 감정의 헛발질에 지쳐 오래 지속되던 집착을 체념하고 마음을 추스른다. 동시에 남아있는 그리움과 미안함에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랑의 설렘까지. 그와 동시적인 인과(因果)로 이츠키(女) 또한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함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한 남성에 대한 설레는 감정의 전이는 두 여인에게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그리움을 설렘으로 환기하는 기적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은 아주아주 유명한 장면으로 시각화, 청각화 된다.

떠나보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오겡끼데스까?)

 

‘난 잘 지내고 있어요.’(와타시와 겡끼데스)

한 여인은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설원에서 목이 터져라, 한 여인은 비좁지만 겨울의 잔상을 지워주는 햇살 가득한 병실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오랜만의 안부. 소중한 이를 앗아간 ‘눈’이라는 오브제가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원망과 그리움의 상징으로 자리했지만, 그 위에서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고 외침으로써 마음에 묶였던 사람을 마음 바깥으로 밀어내거나, 기억이란 이름으로만 남았던 사람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들이 ‘오겡끼데스까’를 말하는 장소가 그들이 그리워하던 이들이 사망한 장소라는 점이다. 죽음의 장소에 가서 마지막 안녕을 고하다. 완전한 이별을 의미하지만, 떠나간 그들에 대한 망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엔딩 씬에 그려지는 봄날의 햇볕, 그리고 햇볕 가득한 배경에 쌓인 잔설처럼 그들의 기억은 이제 그리움이 아닌 아련한 겨울의 추억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러브레터> 속 아련함은 시간이 달라서 엇갈려 버린 감정이 편지를 통한 기억의 환기로 같은 시간에 동기화되면서 발현되는 빛나는 풋풋함과 아름다움에 기인한다. 떠나버린 사람이 남은 이들의 곁에 머물렀던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흔적과 온기는 남겨진 이들의 주위에 남아있다는 사실. 그 흔적과 온기로 남은 이들이 얻는 위로는 <러브레터>에서 눈 속에 파묻힌 잠자리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잠자리의 형상은 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날아와 꽂히고, 언젠가 봄이 오면 다시 날아갈 거라는 희망을 선사한다.

 

누군가에겐 떠나보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설렘이 될 수 있다는 것. 가득했던 그리움이 언젠가는 추억이 된다는 것. 그리움과 설렘의 정의를 바꿔 놓은 날 찾아온 ‘러브레터’ 같은 영화.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을 <러브레터>다.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

 

*영화 포스터/스틸컷 출처 : 영화 ‘러브레터’ , 배급 : ㈜팝 파트너스/ 수입 : ㈜조이앤컨텐츠그룹 

2015.12.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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