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끝나지 않을 숭고한 대항 '스포트라이트'

[컬처]by 디아티스트매거진
아마도 끝나지 않을 숭고한 대항 '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과 몇 알 썩었다고 상자를 버릴 순 없지 않나.” 영화 <스포트라이트> 속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취재 팀은 썩어버린 진실을 취재하던 중, 위 대사와 대면한다. 언뜻 바라보았을 때는 전혀 틀리지 않은 이 대사의 논리에 의해 썩어버린 진실은 은폐의 당위를 얻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논리에 대해 조금은 더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부패한 사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썩어버린 사과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과를 골라내지 못하고 판매한 과일가게 주인에게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썩은 사과에 판매 허가를 내려준 식약청에 있는 것일까? 명확한 잘못의 경중은 논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사과를 먹고 탈이 난 사람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도시 보스턴은 명백히 가톨릭 중심의 사회다. 그렇다면 당연스런 결과로 보스턴은 신의 가호가 흘러 넘쳐야 정상이지만, 오랫동안 기득 세력을 형성한 가톨릭은 상자 속 사과처럼 조금씩 곪아 썩어버린다. 아마도 꽤 예전부터 존재했을 부패.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건, 썩은 사과 상자를 가톨릭이라는 힘 센 거인이 판매한 까닭이다. 은혜로운 가톨릭의 외연 속에 반인륜적인 ‘아동 성추행’이 일어나는 아이러니.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을진대, 그 중 제일은 사랑이니라’(고전 13:13)던 성경 말씀에 대한 배반. 아무도 의심치 않던 고결함은 가까이 들여다보니 사실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아마도 끝나지 않을 숭고한 대항 '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포트라이트>에 비춰지는 보스턴의 모습은 어딘가 정상적이지는 않다. 사회를 작동시키는 논리로 자본도, 법도 아닌 종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보스턴 글로브 지의 신임 편집장으로 부임한 마티 배런이 의례적으로 추기경에게 가 인사를 건넨다거나, 가톨릭 주최의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보스턴 내부의 가톨릭 중심의 사회 작동 시스템에 그가 편입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마티는 추기경에게 선언한다. ‘언론이 제 기능을 하려면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철저한 직업윤리에 따른 이 외침은 추기경이 건네는 ‘교리 선언서’에 매몰 당한다. 이 모습은 마치 <차이나타운>(1974, 로만 폴란스키)에서 제이크(잭 니콜슨)가 차이나타운의 현실에 직면하며 맞닥뜨리는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라는 친구의 말처럼, 아득하고 절망스런 현실의 벽을 통감케 한다. “여기는 보스턴”이니까.

 

어쩌면 가톨릭은 현실이 은유된 세계일 수도 있다. 천국이란 유토피아를 조건으로 추종과 믿음을 요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라는 이상에 노동력과 시간을 요구하는 현실과 닮았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이란 추악한 죄악이 비단 개인의 잘못으로만 치부 되며 악인을 처단하기 위한 주인공들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성선설’에 반하는 인물에 대한 처단 서사가 아닌 보다 더 큰 원인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이 신부들의 성추행 사실이 입증된 뒤에 섣부른 기사 작성을 하기보다 더 깊은 조사를 요구했던 것은 개인의 잘못 이면에 숨은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한 까닭이다. 이 글 서두에 나온 비유를 인용하자면, <스포트라이트>의 메시지는 사과 상자에 썩은 사과가 있다는 그 사실보다, ‘썩은 사과를 버리지 않는 과일 가게 주인’에 대한 비판이다.

아마도 끝나지 않을 숭고한 대항 '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가톨릭 사회에서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이란 추악함을 감출 수 있던 계기는 ‘일부’의 논리다. <스포트라이트>에서 심리학자가 밝힌 통계적으로 아동 성추행을 하는 신부는 6%. 물론 선량한 94%의 성직자들이 고작 6%의 ‘일부’에 의해 악인으로 매도당해선 안 되며, 또한 그들이 품은 열심의 믿음이 퇴색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94%의 무고함이 6%가 면죄받는 이유가 되진 못한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94%의 무고함을 근거로 6%의 치부를 은폐하려 시도한다. 이 대목에서의 잘잘못은 명확하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해서 문제는 가톨릭 그 자체나 가해 당사자가 아닌 ‘시스템’이라고 밝히며 비난의 화살을 명확히 겨눈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권력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다는 지점에 존재한다. 절대적 권력처럼 보이는 대통령의 행정부도 사법부나 입법부의 견제를 받고, 이들은 또한 투표로서 국민들의 견제를 받는다. 이 견제의 전제조건은 단 하나다.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평등의 가지는 절대적 가치가 있기에, 사회는 작동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가치의 무용함을 절실히 알고 있다. 이는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다.

 

부패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평등한 가치는 무시되고, 완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돈이든, 금수저이든, 주먹이든. <스포트라이트>에선 그것이 가톨릭일 뿐이다. 그들의 앞에선 언론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법은 물론이거니와 경찰도 꼼짝하지 못한다.

 

다른 의미의 독재가 실행되는 <스포트라이트> 속 보스턴. 이러한 거대한 힘에 맞서 법도, 경찰도 아닌 여론을 움직이는 언론사가 대항한다는 것은 시사점이 크다. 직접적 사법 절차나 폭력에 의한 복수가 아닌 이러한 여론 형성을 통한 대항은 신의 가치에 매몰당해 있던 인간의 가치를 밝힘과 같기에. 거대한 힘에 맞선 작은 힘의 결합. 이는 숭고하고 엄숙하다.

아마도 끝나지 않을 숭고한 대항 '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끝까지 피해자들의 고통에 객관적 시선을 유지한다. 보다 더 쉬운 감정이입의 방법인 플래시 백이나 자극적인 추행의 현장을 뒤쫓지는 않는다. 아마 제 3자의 입장에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감정적 상처를 표현할 방법이 없는 까닭일테다. 그리고 관객들과 영화배우들은 끝내 피해자의 그 아픔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끊임없이 걸려오는 피해 제보 전화처럼 끊임없이 이어질 시스템과의 싸움이 막막하고 두렵기에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허탈하다.

 

마지막 엔딩 씬은 아동 성추행 가해 신부의 이름이 나열된다. 하지만 이 빼곡한 자막이 통쾌하지 않고 마치 벽처럼 느껴졌던 건, 가톨릭 중심의 시스템을 무너뜨리기엔 여론의 힘이 너무 무력하다는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 피해자가 아니기에 안도의 한숨만 쉴 뿐.

 

글. 신동혁

2016.11.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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