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적 : '보스 베이비'

[컬처]by 디아티스트매거진
나의, 친애하는 적 : '보스 베이비

'보스 베이비', 2017, 톰 맥그라스

나는 악덕 언니였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복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다. 내가 4살이 되던 해 태어난 동생이 마침내 집으로 들어왔을 때, 나의 질투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고 전한다. 독차지하던 사랑을 앗아간 것에 대한 복수는 요람에 누운 동생의 얼굴을 깔고 앉거나 코를 틀어쥐는 식으로, 대체로 부모님의 시선이 소홀한 틈을 타 이루어졌다. (실제로 어머니 혹은 아버지에 의한 현장검거 순간이 찍힌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내연녀!’. 아동심리상담전문가 오은영씨는 몇 년 간 외동으로 살아 온 아이에게 처음 동생이 생긴 순간의 충격을 이렇게 비유한다. 남편과 나, 단 둘이 행복했던 가정에 어느 날 매혹적인 외모의 내연녀가 등장하고, 심지어 남편이 웃는 얼굴로 그녀와 셋이 함께 ‘잘살아보자’고 말하는 상황과 같다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이리도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그래서 공자님과 맹자님의 말씀처럼 그저 ‘건강하기만 해도’ 기쁨에 웃음이 절로 나는 우애란 적어도 이 시기의 형제에게는 존재할 수 없다.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형제란 본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투쟁에서 출발하는 애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형이라서’라는 불가항력적 당위 이외에 어떠한 합리적 근거도 없이 평생 나의 것을 (기왕이면 기꺼운 마음으로) 나눠 주어야하는 사이! 이 관계론적 숙명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유효하기에 인생은 종종 시트콤이 된다. 월급타면 가장 먼저 ‘우리 집 똥강아지들과 뭐 사먹나’를 고민하게 되지만, 함께 내가 사온 족발을 나눠 먹다가도 동생만 쌈 싸주는 엄마를 보면 무지하게 열 받거든!

 

그런 면에서 '보스 베이비'가 묘사하는 ‘아우’의 이미지, 그러니까 특별히 어린이 시절의 형(‘팀’) 눈에 비친 동생의 캐릭터는 아주 정확하고, 또 유쾌하다. 갓 태어나 집에 들어온 아기를 ‘비밀요원’으로 만든 설정부터가 그렇다. 토실토실 귀여운 외모에 장착된 검은색 정장과 007 케이스는 그 자체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영역을 침범한 ‘수상한 존재’, ‘영악한 존재’로서의 동생을 잘 표현한다. 나와 부모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모종의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그’의 등장은 결코 자연스러울 수 없다는 거부감, 혹은 경계심을 이토록 잘 구현하다니!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어린아이 특유의 상상력과 어우러져 동화답지 않은 팽팽한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상상력’!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그 이야기 속 세계관이 ‘어른의 상상력’과 ‘어린아이의 상상력’이라는 두 개의 축이 교차해가며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어른이 된 ‘팀’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형태의 서사구조, 아기들을 생산(?)하고 각 가정에 배분하는 가상의 ‘아기 회사’가 존재한다는 전제 등은 동화 밖에 있는 어른(톰 맥그라스 감독)의 논리적인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설정은 이야기 속 일련의 사건들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벌어질 수 있게 하는 안정적인 틀을 구축한다. 연극으로 치자면 극으로의 몰입이 가능해지도록 잘 설계된 무대를 만드는 셈이다. 그래서 관객은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상이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가짜임을 알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스크린 안에서 맥그라스 감독의 세계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한편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어린이(주인공 ‘팀’)의 순수한 상상력은 그런 스크린 속의 세계를 좀 더 ‘사실적’이고 ‘진짜 같은’ 곳으로 만드는 동시에, 감동과 교훈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견인한다. 사물을 왜곡하고 부풀림으로써 상황과 관계를 은유하는 어린아이들의 특성을 톰 맥그라스 감독은 훌륭한 극적 장치로 활용한다. 어딘가 수상했던 동생의 정체가 다름 아닌 ‘베이비 나라’에서 파견된 비밀요원이었음을 알게 되는 장면부터, 유모로 분장한 프랜시스의 형과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까지 극의 흐름상 중요한 사건이 등장하는 부분이면 어김없이 팀의 상상력이 발휘된다.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상황을 믿는 어린이의 순수함은 엄마아빠로부터 외출금지를 당한 스스로의 처지를 첨탑 꼭대기에 갇힌 죄수에 비유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장가를 빼앗아간 동생을 무시무시한 악마로 만들기도 하며, '강아지 주식회사'의 계략을 막기 위해 가짜 유모와의 추격전을 벌일 때에는 보조바퀴 빠진 자전거를 풍랑을 만난 한 척의 해적선으로 변신시킨다.

 

이처럼 아이만의 순수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현실의 과장은 관객에게 부모의 관심에서 멀어진 ‘팀’의 상실감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성숙하지 못한 어른과의 대결을 통해 형으로서의 성숙한 자아를 발견해가는 성장과정을 더 감동적인 것으로 승화시킨다. “나는 지금 거친 파도 위를 항해하는 선장이야!” /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해낸 거야.” /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옆에 내가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 날에도 너의 생일날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거야. 그렇게 우리는 함께 늙어가겠지? 우리는 그렇게 형제가 될 거야!”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일련의 대사들 역시 그런 동화적 상상력을 만남으로서 더욱 힘이 센 빛을 낸다.

 

결국 이 영화는 낯설음을 허물고 형제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은유다. 그런 면에서 이들이 과연 ‘어떤’ 계기로 서로에 대한 유대감을 획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야말로 전체 줄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툭탁거리던 이들을 화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공공의 적이 필수적이고, 그렇게 악당으로서 등장시킨 것이 ‘강아지’, 그것도 ‘조그맣고 귀여운 모습이 결코 변하지 않는 강아지’라는 설정은 애니메이션 특유의 해학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귀여움과 귀여움의 대결이라니! 아마도 감독은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를 잘 알고 있고, 그 이유란 바로 ‘앙증맞은 크기와 귀여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이 특유의 외모나 말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똑같은 양갈래 머리를 해도 사랑이가 하면 깜찍하지만 내가 하면 바이킹족 같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지 않나. 누구나 나이가 들고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잃어버리는 매력이기에 아이들의 천진난만함과 귀여움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것은 그처럼 곧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했던 프랜시스의 계략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친애하는 적’. 형제를 말하기에 이토록 적절한 수식어가 있을까. 나이가 차도 걸핏하면 악다구니 쓰며 싸우게 되는,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닭다리를 뜯게 되는 그런 사이. 있어도 딱히 도움은 안되는 것 같지만 없으면 이상하게 허전한 그런 존재. 내가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그더러 욕하는 걸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 20년 전 예고도 없이 찾아온 수상한 손님과 나는 어떻게 ‘형제’가 되었나? 그냥 아기가 좋아 보러갔던 영화에서 이상한 깨우침을 얻었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가끔씩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한다.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

2017.05.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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