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세상에 광장에서

[컬처]by 인문잡지 글월
이 미친 세상에 광장에서

돌이켜보면, 20대는 참으로 가련했던 시기였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고 거들먹거리지만, 사실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청춘은 가능성이라며, 청년이 일어서야 세상이 변한다며, 내가 세상에 주인이라며,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며 행동했던 시기가 바로 그 시기가 아닐까 한다.

 

훗날 돌이켜보면 한 때의 추억일수도 아니면 이불 속에서 발차기를 할 만한 흑역사일지도 모르겠으나, 저 시기를 거쳐 무난하게 어른이 된 이들은 행복한 축이다. 그들은 ‘어른’이라는 주류 사회에 무난하게 편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채 도태되거나, 혹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주류사회는 그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한다.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의 경우, 처음에는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있을지언정 그 사회를 거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에 어느 정도 녹아 들기 위해 소극적이나마 노력도 했었다. 그러나 사회가 가하는 폭력 속에서, 그는 갈 곳을 잃고 떠돌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시대의 청년들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 그들은 ‘광장’의 이명준보다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이들이 편입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이들은 명준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지만, 사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듯 이미 이들에게 이 사회는 살 만한 땅이 아니다.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2집 타이틀곡 <졸업>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이후 인용문은 ‘졸업’ 가사 일부)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이명준 또한 “누리와 삶에 대한 그 어떤 그럴싸한 맺음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럴싸한 종교의 경전을 들춰보기도 하고, 친구와 시답잖은 선문답을 하기도 하며, 학식과 경험이 많은 이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그 주위에 남는 것은 “댄스 파티, 드라이브, 피크닉, 영화, 또 댄스 파티”를 즐기는 주위 인물들 뿐이다.

 

명준의 고민이 자기완성을 위한 소위 ‘더 높은’ 자기현실적 고민이라면, 이 시대 청년들의 고민은 그보다 더 절박하다. 한때는 이들 또한 명준처럼 그럴싸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이제 남는 것은 스펙을 위한, 아니 더 절실하게는 시간을 벌기 위한 ‘어학연수’라는 도피처이다. 이렇게 보람 없고 팍팍한 삶에서 이들이 갖는 위안은 무엇일까.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명준이 지내던 그나마 행복했던 시간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공산주의자 아버지로 인해 서울에서의 짧은 평온이 깨진 명준은, 그대로 윤애에게 찾아간다. 그녀와 관계를 맺은 명준은 윤애에게 집착한다. 월북한 다음 만난 은혜 또한 마찬가지다. 명준이 아직 사랑에 대해 경험하지 못했을 때 그 관념은 경험 후에 모조리 깨어졌다.

 

사회에, 이데올로기에 기할 것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희망은 결국 사랑, 혹은 성애로 모아진다. 최근 이 사회에 거의 모든 부분에서 연애가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것 또한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그 연애조차 허락되지 않는 ‘삼포세대’의 현재에서는 저 가사조차 낡게 만드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러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명준은 결국 남에서 견디지 못하고 북으로 갔으나, 북 또한 그에게 내 줄 자리는 없었다. 남에서는 ‘광장’이 없다고 한탄한 그였지만, 북에서도 그가 원하는 자리는 없었다. 남과 북, 이념의 차이에서 자리의 빈곤이 그치진 않는다. 전쟁 전에 경찰에게 감금과 폭행을 당하던 명준은, 전쟁 후에는 그 권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채 사람들을 겁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맞는 자리는 남과 북, 권력의 상층과 하층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명준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소통’과 ‘꿈’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사회와 이데올로기는 그가 원하는 것 대신 힘과 권력, 그리고 그 반대 급부로 그의 지위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책정한다. 현재 사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점차 사회는 청년들의 꿈과 소통에 대한 가능성을 줄여버리고, 그들에게 성공에 대한 신화와 배제에 대한 공포만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성공과 실패의 간극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결국 회색지대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헤매게 된다. 그 중 몇몇 이들은 운과 기회를 통해 어른이라는 성공의 세대로 올라가지만, 남은 이들이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노오오오력’의 중요성 뿐이다.

 

그렇기에 명준, 그리고 청년들은 한 때 함께 꿈을 꿨거나 같은 자리에서 함께 즐거워했던 이들과의 추억을 남긴 채, 살아가기 위해 떠나거나 혹은 적응하지 못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를 나누네”

남으로, 북으로, 혹은 중립국으로. 시대가 규정한 그 지표 아래에서 힘 없는 청년들은 결국 그나마 나은 방향을 향해, 혹은 어쩔 수 없는 협박과 상황으로 인해 각자의 방향으로 떠나게 된다. 누구는 노량진으로, 누구는 자영업으로, 그리고 대다수는 직장인으로. ‘전쟁’이라는 시대의 학습장 을 졸업하는 그 당시 청년들의 미래처럼, 이제 청년들의 앞에 펼쳐진 것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이 밀려간 미래밖에 없다. 그 중 몇몇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명준처럼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곤 한다. 올해 자살률이 전체적으로는 6년 만에 감소했다 하지만, 20~30대의 자살률은 오히려 증가했다.

 

한 때 고민이 많은 순수한 청년이었던 명준이 걸었던 길을 걷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명준의 비극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자신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20대 청년은 완벽과는 거리가 먼 존재다. 하나의 청년이 시대적 비극으로 인해 어떻게 죽어갔는지 기억 해야, 우리는 비로소 비극의 재연을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 있다. 우리 주위도 마찬가지이다. 그 청년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지만, 너무 당연하거나 혹은 화려한 불빛에 가려 잘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또 하나, 이 작품과 노래가 이렇게 비극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하여 공적인 영역에서 쫓아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 2집의 타이틀곡이었던 이 노래는 결국 KBS 방송 금지곡이 되 었고, 최근에는 이 『광장』이 남한 사회의 모습을 ‘왜곡’하여 전달한다 하여 교과서에서 퇴출시켜 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잊혀지지 말아야 할 존재들을) 기억해야 하는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이들에 대한 불신 또한 기억해야 한다. 사실 2개 작품을 봉인한다 하더라도, 소설이나 예술이 사회에 존재하는 만큼 공적인 영역에서 사라질지언정 사회 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그 작품들은 우리 주위에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 이미지 출처 : SCENE PLAYBILL

 

글 A씨(氏) 편집 박성표

2020.04.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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