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의 선의와 앵무새 죽이기

[컬처]by 인문잡지 글월

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의’ 발언이 며칠 동안 화제였다. 결국, 이 문제로 사과까지 했다. ‘좋은 의도’라는 뜻의 단어 하나가 왜 이리도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일까? 우선 안희정 지사가 발언한 선의라는 게 무슨 뜻인지 살펴보자.

 

안희정 충남지사는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 누구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액면 그대로 긍정적으로 선한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의 본질을 들어가기가 훨씬 빠르다. 정치 일반에 대한, 대화에 대한 저의 원칙적인 태도다.”

안희정의 선의와 앵무새 죽이기

안희정 충남지사

여기서 사람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그 누구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부분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가지고도, 창조경제니, 미르재단이니 하는 정책과 재단을 앞세우고 뒤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을 두고도 어떻게 이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가 있냐며 분노를 터트렸다.

 

이 선의 문제는 얼마 전 안희정 충남지사가 좌우 정치적 노선에 상관없이 좋은 사람, 좋은 정책이면 써야 한다는 ‘대연정’과 맞물려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기회를 짧게는 재벌과 정치권의 부패정치를 끊을 기회로, 길게는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주름잡는 친일파와 독재정권의 누적된 적폐(積弊)를 청산할 기회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절호의 기회에, 안희정 충남지사와 같은 떠오르는 대선후보가 좌우 가르지 말자는 대연정을 말하고, 뒤이어 누구의 주장이든 긍정적이고 선한 의지로 받아들이자고 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악의 축이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선한 의지 운운할 수 있냐며 비판을 쏟아 내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 논란을 보고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마침 바로 지난주에 소설 읽기 모임 GRAY구락부에서 토론했던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였다. 전 세계에서 수천만 부가 팔린 읽어보진 않아도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초특급 베스트&스테디셀러다. 최근 퇴임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이 책을 인류가 가져야 할 용기와 보편적 가치를 보여준다 하였고, 몇 년 전 작가가 사망하면서 또다시 화제가 된 소설이기도 하다.

안희정의 선의와 앵무새 죽이기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왜 선의 논란이 《앵무새 죽이기》로 이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이 소설에 대해 살펴보자. 이 소설은 1930년대 초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이라는 가상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 메이콤은 가상의 마을이지만 소설은 당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다양한 마을 사람들을 통해 아주 촘촘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상 1부는 주인공인 ‘스카웃’이 동네에서 놀고, 학교 다니며 이 마을 사람들과 마을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재미있다는 건 함정)

 

본격적인 이야기는 2부에서 시작된다. 마을에서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고 폭행했다는 죄목으로 잡히고, 그를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처 변호사가 변호를 맡는다. 핀처 집안 사람들은 그가 흑인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수치라며 손가락질을 당한다. 핀처 변호사는 법정에서 담담하게 증인들에게 질문을 던져 사실 로빈슨은 여성을 강간한 적도, 폭행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자, 그러면 로빈슨은 무죄로 풀려났을까? 하지만 그때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심하던 1930년대 미국 남부였다. 배심원들은 예상보다 합의에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배심원 중에 흑인은 당연히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에서 흑인은 당연히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고, 백인과 흑인이 화장실을 따로 썼다. 백인이 흑인과 화장실을 같이 쓸 수는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건실한 젊은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는 상황에 주인공 스카웃과 그의 오빠 젬은 충격에 빠진다. 특히 젬과 스카웃이 충격을 받았던 건 흑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배심원단들이 바로 동네에서 늘 거리에서 인사하고,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보고, 방문하여 식사도 하던 평범한 이웃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바로 소설 1부 전체를 할애해 묘사한 그 사람들 말이다.

 

스카웃은 물론 동네에 좋은 사람이 있고, 함께 하기 재미없고 좀 재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꽉만힌 편견에 갇힌 인종차별주의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혼란에 대해 오빠 젬과도 아빠 애티커스 핀처하고도 스카웃은 대화를 나눈다.

 

이때,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사형을 선고한 변호인단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스카웃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착한 사람이며, 다만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처한 입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품 초반 애티커스 핀치는 스카웃에게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정말로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야만 한다고 얘기했었다.

 

자기가 살아온 나름대로 평화로운 이 세상이 사실은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일 수도 있다는 혼란과, 그럼에도 그들 하나하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스카웃과 젬은 모든 가치가 뒤흔들린다. 그들은 이런 혼란을 통해 성장해나간다.

 

여기서 배심원이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며 그들의 선함을 믿어야 한다고 했던 애티커스 핀치는, 흑인 톰 로빈슨을 누구보다 열심히 변호했던 사람이다. 그가 그저 일이었기 때문에 로빈슨을 변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재판 전에 사람들이 로빈슨을 죽일까 봐 구치소 앞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핀치는 로빈슨을 변호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기 양심을 위해서, 자식들 앞에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로빈슨을 변호했다.

 

진심을 다해 로빈슨을 변호했음에도, 로빈슨에게 끝내 사형을 선고한 배심원들 개개인을 미워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애티커스 핀치의 입장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애티커스 핀치는 분명 《앵무새 죽이기》 속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이다. 그는 담담한 정의의 변호사였고, 인간의 선의를 끝까지 믿었다.

안희정의 선의와 앵무새 죽이기

그레고리 팩 주연의 영화 '영무새 죽이기' 중 한 장면

GRAY구락부에서 토론을 하면서 한 회원은 애티커스 핀치로 대변되는 이런 관용과 포용(백인 입장에서는 물론 흑인 입장에서도)의 입장은 아마 말콤 X와 같은 흑인 지도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일 것이라고 얘기했다. 비록 1960년대 출간 당시 흑인 사회에서 《 앵무새 죽이기 》가 어떤 평가를 받고 수용되었는지에 대해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말콤 X나 마틴 루터 킹이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그 회원의 질문을, 나는 안희정 충남 지사의 선의 논란을 보고서야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마치 애티커스 핀치와 같은 입장에서 ‘나의 판단에 따라 상대방을 선인인지 악인인지 파악하지 말고, 사람들의 말을 우선 선의로 받아들이고 그의 입장에서 파악하되,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공과는 제대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선의’에 대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 자체가 박근혜를 용서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분명 확대 해석일 것이다. 공과를 따져서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우리가, 대한민국이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미래를 향해 갈 것인가 하는 포용의 ‘태도’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연장선에서 박정희, 전두환,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와 그 주변부에 있던 세력들, 이들과 발맞추며 충실하게 이익을 추구해온 경제집단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이들이 쌓아왔던 것이 총체적 부패와 부실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런 국정농단의 핵심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당연하나, 이와 연관된 사람, 이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할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운영에서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면 그를 지지했던 사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미 일베나 태극기 부대, 노년층에 대한 조롱이 곳곳에서 보인다. 《 앵무새 죽이기 》의 애티커스 핀처의 눈으로 보자면 그들 역시 내 나라를 사랑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선의’를 통해서 마치 애티커스 핀처의 입장처럼 일단 그 사람의 선함을 인정하고 열린 자세로 대화를 시작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 범위가 어디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기본적인 태도를 관용과 포용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가 이 발언을 사과하긴 했으나 그의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변함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안희정 충남지사를 포함해 여러 대선후보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선택하는 일이다. 사실 나는 마치 《 앵무새 죽이기 》의 스카웃이 된 것처럼 혼란스럽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이하 국정농단과 관련해 결정을 내리고 실행한 책임자 라인은 잘못을 철저히 따져 그에 따라 처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때라도 그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 그들의 지지자를 우리의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 잘못을 지적하되 근본이 선한 사람이라면 포용하고 함께 나아갈 것인가. 포용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를 정해야 하는가. 적절한 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다음 대통령을 누굴 뽑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 자체가 미래를 향한 비전만큼이나 사람에 대해 태도에 대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이번 선의 논쟁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이번 논란은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란 분명 현실은 아니다. 작가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취사선택한 배경과 인물과 사건이 벌어지는 판타지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보편적 가치의 충돌과 투쟁을 소설만큼 재미있게, 또한 상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수단도 별로 없다.

 

《 앵무새 죽이기 》만 해도 193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을 중심으로 한, 어찌 보면(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논쟁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에 대한 소설이다. 하지만 《 앵무새 죽이기 》는 그 사건 자체만큼이나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특히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대한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읽을만한 소설이다. 우리는 동일한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다른 관점과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고 이에 대해 대화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이를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다수결’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글 박성표

2017.02.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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