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만연했던 '사법 적폐'

[컬처]by 연합뉴스

범죄로 들춰낸 조선의 민낯…'크리미널 조선' 출간


선조36년(1603년) 명문가 출신으로 고위관료를 지낸 유희서가 경기도 포천에서 화적 떼 습격을 받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연히 대대적인 조사와 범인 추적이 이뤄졌지만 붙잡힌 용의자 4명이 옥에서 잇따라 의문의 죽음을 맞고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었다. 이 괴이한 사건 주모자는 놀랍게도 선조의 아들 임해군이었다.


대중 역사 저술가 박영규가 펴낸 '크리미널 조선'은 조선의 범죄사건을 통해 그 시대의 민낯을 드러낸 책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살인, 성범죄, 무고, 강·절도, 위조, 폭행, 방화, 밀수 등 범죄사건의 개요와 수사, 재판 과정을 따라간다. 또 조선의 범죄 수사 및 재판 체계와 담당 기관 등에 대한 설명도 곁들인다.


책에 따르면 조선은 나름의 사법체계와 대명률 등 법률체계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법의학 지침서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법의학 전문가인 '오작인(伍作人)' 등을 활용할 정도로 범죄 수사의 전문성도 있었다. 또 현대적 법치주의에는 미칠 수 없겠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 경우 3번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등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정의를 구현하고 백성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는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권력자냐 아니냐, 양반이냐 천민이냐,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법적용이 달랐고 수사와 재판 담당자의 자의적인 법처리와 부정·비리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범죄사건에 연루되면 패가망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살인사건이 나면 무고한 이웃주민까지 화가 닥쳐 온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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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태장 맞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김영사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화적 떼에 의한 유희서 살해사건은 '조선판 사법적폐'의 실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화적 두목으로 지목돼 체포됐으나 옥중에서 의문사한 김덕윤은 임해군 수하였다. 포도청이 조사한 결과 임해군이 유희서의 첩 애생을 빼앗으려다 여의치 않자 애생과 공모해 유희서를 살해했다는 정황이 포착됐고 이를 뒷받침하는 관련자 진술도 나왔다. 자신에게로 수사망이 좁혀오자 임해군은 아버지인 선조에게 달려가 결백과 억울함을 호소했고 아들 말을 믿은 선조는 노발대발했다.


의금부가 수사를 담당한 포도대장을 잡아다 신문한 끝에 포도대장은 파직과 함께 징역 2년6개월 형에 처해졌다. 선조는 아버지 피살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던 유희서의 아들 유일마저 죽이려 했으나 유희서의 어머니가 "하나뿐인 손자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눈물로 하소연한 덕에 장 1백대를 맞고 3천 리밖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감형됐다. 당연히 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관은 이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왕법이 시행됐다면 임해군은 당연히 형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총명을 잃고 오히려 개인의 사랑에 빠져 그의 악을 모르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과 신문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는 책임을 맡은 중신에게 미치게 했다."


세종 대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이 살인사건 은폐에 가담해 함께 하옥되는 일도 있었다. 황희 사위가 시비 끝에 종들을 시켜 아전 한명을 때려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의정부 찬성이던 황희는 친분이 깊던 맹사성을 찾아가 구원을 호소했고 맹사성이 피해자 집안과 사건 발생지 현감 등에게 손을 써 엉뚱한 사람이 주범인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그러나 사건 처결 문서를 꼼꼼히 읽어본 세종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데 의심을 품고 의정부로 사건을 내려보내 재조사할 것을 엄명했다. 그 결과 사건 진상과 은폐 과정이 백일하에 드러나 '성군' 세종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희를 복권시켜 다시 중용하기는 했지만.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양반, 남성에게는 관대했던 반면에 여성과 양인, 천인은 상대적으로 무겁게 처벌됐다. 특히 양반이 자기 집안 여종을 겁탈하거나 간음하더라도 '종은 주인을 고발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사실상 처벌이 불가능했다. 정종 대에 곽충보라는 자는 여러 여인과 간통 행각을 벌였다는 폭로가 내연녀 중 한명으로부터 나와 궁지에 몰렸으나 정종은 곽충보가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상대방 여성들만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반면에 세종 대에 이복 남동생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여자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등 성범죄에 관해 여성에게 들이대는 칼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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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칼 찬 죄수들 (국립민속박물관) [김영사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범죄 수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없느니만 못한 존재인 경우가 많았다. 어느 마을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먼저 아전과 나졸들이 들이닥쳐 마을 주민들을 포승줄로 묶어 죄인 다루듯 닦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온마을을 벌집 쑤시듯 휩쓸고 다니며 곡식이든 가축이든 마구잡이로 노략질한다. 수사가 시작되면 피의자나 피해자 이웃부터 잡아들여 판결이 날 때까지 죄인처럼 구금한다. 수사에 동원되는 관리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도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몫이다. 이 때문에 살인사건이 나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건을 은폐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사건화하면 이런 고초를 염려해 주민들이 다른 마을이나 산속으로 달아나 동네가 텅 비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저자는 "그 시절에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검은손의 유혹을 뿌리치며 불의와 싸우던 관리, 형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의는 늘 백성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면서 "특히 조선의 힘없는 백성에게 법이란 그저 수탈과 억압을 합법화하는 무형의 칼날일 뿐이었다"고 썼다.


김영사. 328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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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cwhyna@yna.co.kr

2020.01.0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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