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증언 뒤 감춰진 고통…이용수 할머니 "나는 어디선가 운다"

[이슈]by 연합뉴스

2005년 할머니와 함께하며 증언 연구한 사카모토 치즈코씨 논문

"이런 얘기 하면 가슴 아파 잠 못자" 증언 과정서 정신적 고통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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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할머니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렇게 좀 도움을 주셨는데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면 하는 게 소원이고…울어가면서 그렇게 하면 한이 없죠. 나는 언제든지 어디선가 울어요."(이용수 할머니)


최근 기자회견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할머니들을 위해 후원금을 쓰지 않고 있다. 수요집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피해를 1990년대 초부터 여러 강연과 집회, 언론 인터뷰 등에서 활발히 증언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대중이나 언론 앞에서 수십년 전 피해 기억을 다시 헤집어 세상에 내놓는 과정 자체가 상당한 정신·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1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자인 사카모토 치즈코(坂本知壽子) 씨가 2005년 연세대 대학원생 신분으로 쓴 석사논문 '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정치학'을 보면, 저자와 만난 이용수 할머니는 당시에도 증언 과정에서 이같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사카모토씨는 2005년 1월 이용수 할머니의 대구 자택에서 2박 3일간 머물며 채록한 할머니의 발언을 논문에 담으면서 할머니의 언행에 숨겨진 심리를 분석했다.


저자는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에 자신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느껴' 열심히 증언했다고 설명한다. 이 할머니는 당시 "억울함을 풀어 주셨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 울어가면서 그렇게 하면 한이 없다. 나는 언제든지 어디선가 운다"고 저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할머니가 숱한 증언으로 자신이 괴로워진다는 점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 힘들어 보였으며, 1990년대 초부터 10년 넘게 증언했지만 변하지 않는 상황에 지치고 있었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이젠 그만해도 내가 수십만 번 했고 하니까 참 그 아주 괴롬(괴로움)을 주는 거고 피해를 입히는 거더라고요. 이런 얘기를 하면 얼마나 가슴 아픈 줄 알아요? 그러니까 저는 잠을 못 자요. 자기네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증언하지만은 웃지만은 내가 그 사람들 쳐다볼 때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생각해요. 원망도 해요…."


저자는 "청취자가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모습이 결국 증언자를 무력화하는 태도임을 보여주는 예"라며 "청취자는 증언에 대한 청취능력이나 응답 책임에 대한 의식 없이 증언을 소비하려고 하니 할머니로서는 소모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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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시위에서 발언하는 이용수 할머니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할머니는 사카모토씨에게 "방송을 해 놓고 나면 그런 사람들도 알면서도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며 "그럴 때까지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 나만 몸이 상하니까 되도록이면 나도 생각해가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언론과 대중이 계속해서 증언을 요구하지만, 그 과정은 할머니에게는 '몸이 상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어떤 이야기를 할지 스스로 통제한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저자는 비슷한 사례로 피해자 김순덕 할머니(2004년 별세)가 1998년 일본에서 열린 증언회에 참석했을 당시 일화도 언급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참가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증언한 뒤 무대에서 내려와서도 한동안 몸을 덜덜 떨었다. 이는 겁이 나서 떨린 것이 아니라,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써야 하는 에너지 때문인 것 같았다고 저자는 밝혔다.


다만 저자는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할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올라 힘들지만,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속이 시원하다고도 한다"며 증언의 긍정적인 면에도 주목했다.


실제로 이 할머니는 자신의 증언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거론하며 "위안이 되고 치료가 된다"며 "이렇게 배워서 치료가 좀 됐습니다. 상처가 치료가 됐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론에서 저자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은 물론, 피해자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덜 느끼도록 자유로운 대화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도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아픔과 함께 번역해 들려주는 피해자들 옆에 있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물으며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언어를 가지고나 있을까 성찰할 필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jujuk@yna.co.kr

2020.05.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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