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30주기 맞은 한국계 러시아 로커 빅토르 최

[컬처]by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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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빅토르 최 '추모의 벽'이 세워졌다. 한 여성이 빅토르 최의 대형 얼굴 그림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온기 대신 유리의 초록빛/불 대신 연기/달력에서 하루가 뜯어졌다/붉은 태양이 전부 다 타버리고/하루도 그것과 함께 타버린다/타고 있는 도시에 그림자가 드리운다/변화를! 우리의 심장이 요구한다/변화를! 우리의 눈이 요구한다/우리의 웃음과 우리의 눈물 속에/우리의 맥박 속에 변화를!/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

한국계 러시아 록가수 빅토르 최가 1989년 발표한 '변화를 원해' 노랫말의 일부다. 빅토르 최는 1980년대 소련에서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누리다가 1990년 8월 15일 교통사고로 숨졌다. 향년 28세. 요절한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처럼 팬들의 가슴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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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토'의 한 장면. 독일동포 2세 유태오가 연기한 빅토르 최(가운데)가 동료들과 록그룹 키노를 결성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엣나인필름 제공]

빅토르 최는 고려인 4세다. 증조부 최용남이 함경북도 성진에 살다가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뒤 고려인 안나 바실리예브나 유가이와 결혼해 막심 페트로비치 최(최승준)를 낳았다. 최승준은 1937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됐고, 부인 나데즈다 김(김혜정) 사이에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최(최동렬)를 두었다.


최동렬은 1953년 소련 최고지도자 스탈린의 사망으로 고려인 거주 제한이 풀리자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거주지를 옮겼다. 빅토르 최는 엔지니어로 일하던 최동렬과 우크라이나 태생의 교사 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구세프 사이에서 1962년 6월 21일 태어났다. 외모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나 눈은 어머니처럼 푸른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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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직업을 물려받기를 원했으나 일찍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고교 시절 그림과 조각에 뜻을 두고 미술학교로 전학했다가 기타와 록 음악에 빠져 록그룹 '제6병동'을 결성했다. 레닌그라드는 핀란드가 지척이어서 암시장에서 서방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세로프 예술대(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문화예술대)에 진학한 뒤에도 록그룹 활동을 이어갔으나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그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고 '제6병동'도 해체됐다.


소련은 음반과 공연을 사전 검열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가사가 아니면 음반을 낼 수도 없고 무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록을 향한 빅토르 최의 열정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가린과 쌍곡면'이란 그룹에서 활동하다가 1982년 여름 록그룹 '키노'(영화)를 결성하고 데뷔 앨범 '45'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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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빅토르 최 동상. 조각가 알렉세이 블라고베스트노프는 빅토르 최가 오토바이를 탄 모습을 형상화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전까지 소련의 록 음악은 미국과 서유럽의 그룹을 흉내 내는 수준이었으나 '소련의 비틀스'라고 불리던 키노가 등장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노선을 선언한 것도 록 음악 열풍을 부추겼다.


빅토르 최는 서정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을 담은 노랫말, 묵직한 중저음 목소리, 러시아 특유의 음울한 정서가 밴 멜로디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증조부부터 3대에 걸친 기구한 이주사와 소수민족이라는 정체성도 저항과 마이너리티라는 록 정신과 맞닿아 있어 인기몰이에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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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 20주기인 2010년 8월 15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앞에 팬들이 놓아둔 담배가 쌓여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최고의 히트곡은 1988년 8번째 앨범에 실린 타이틀곡 '혈액형'이었다. 전쟁터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병사의 비장하고도 애절한 심경을 노래한 곡이다.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돕기 위해 무자헤딘 반군과 10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소련판 베트남전'이라고 불리는 아프간 내전이었다. 빅토르 최는 젊은이들에게 반전(反戰)사상을 불어넣으며 우상으로 떠올랐다.

"대가를 치러 이길 수야 있지만/그런 승리는 원치 않는다/누구의 가슴도 짓밟고 싶지 않아/그저 당신과 같이 있기를 원했다/그저 너와 함께 남기를/그러나 높은 하늘의 별이 나를 부르네/소매에 적힌 혈액형아/소매에 적힌 내 군번아/싸움에서 나의 승리를 빌어다오/이 들판에 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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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 이름을 딴 러시아의 빅토르 밴드가 빅토르 최 20주기인 2010년 8월 1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추모 무대를 꾸미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노래를 윤도현밴드(YB)가 1999년 우리말로 번안해 불렀고 한대수도 리메이크했다. 2010년 YB가 원어(러시아어)로 부른 곡은 유튜브로 알려져 "빅토르가 살아 돌아왔다"는 러시아인의 반응을 끌어냈다. 빅토르 최는 라시트 누그마노프 감독의 영화 '이글라'(바늘)에서 주인공 모로 역을 맡아 연기 재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90년 키노는 절정기를 맞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6만2천여 명의 관객을 모아놓고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펼쳤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공연 일정이 잡혀 빅토르 최는 난생처음 증조부모의 나라를 방문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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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 20주기를 맞아 팬들이 2010년 8월 15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앞에 모여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1990년 8월 14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차기작 앨범 녹음을 마치고 이튿날 취미인 낚시를 즐기러 승용차를 몰고 가다가 버스와 정면충돌해 즉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열혈 소녀 팬 5명이 뒤따라 자살하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소련 정보국 KGB가 교통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무덤에는 극성팬들이 무보수로 묘를 지키고 있으며, 모스크바·카잔·키예프(우크라이나)·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알마티(카자흐스탄) 등지에 세워진 추모의 벽에는 그를 기리는 글귀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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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토'의 포스터. [엣나인필름·세미콜론 스튜디오 제공]

미발표곡을 수록한 추모 앨범, 러시아 로커들이 참여한 헌정 앨범, 전기, 뮤지컬, 추모 콘서트 등이 러시아와 한국에서 선보이고 있다. 2018년에는 빅토르 최의 삶과 음악을 담은 영화 '레토'(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초청된 데 이어 국내에서 개봉하는가 하면 빅토르 최 여권이 경매에서 1억5천만 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올해는 한국·러시아 수교 30주년과 빅토르 최 30주기를 맞아 한러 수교 30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러시아에서 양국 록가수들의 합동 공연을 계획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빅토르 최가 한국과 러시아 우호의 상징이자 내국인과 고려인 동포 화합의 촉매로 부상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못내 아쉽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heeyong@yna.co.kr

2020.08.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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