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에 쏟는 집중력이 최고점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낯선 것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익숙하던 그것이 사라져버린 빈자리가 낯설어질 때. 무언가를 완전히 떠나보내고 난 후에야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게 되는 이유는 뭘까. 몇 년 전의 숭례문도 그랬다. 주변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것을 딱히 의식하거나 집중해서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늘 그곳에 있었으므로. 내가 바라보지 않아도 그곳에 있을게 분명하니까. 숭례문이 갑작스런 집중을 받게 된 건, 그것이 방화로 완전히 소실되고 난 다음날이다. 버스 안의 열어젖힌 창문에선 사람들
사람에겐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 영혼의 향기와 같은 복잡한 얘기가 아니다. 특정향수나 샴푸 ‧ 바디워시 등의 제품을 즐겨 쓴다면, 별 수 없이 그 제품의 향기를 풍기게 돼 있다. 미진이는 향수를 쓰지 않았다. 대신 R브랜드의 바디워시와 샴푸를 좋아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의 문을 열기만 해도 제품의 향이 훅 하고 코를 엄습할 정도였으니까. 결국 나도 그 향기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미진이와 함께 그 브랜드 매장을 방문했을 때 난 알게 됐다. 매장의 향기와 미진이의 집에서 맡았던 향기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내가 좋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 이상의 경외심을 가지게 되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가을날의 바람 때문에 그렇다. 이맘때쯤 불어오는 바람은 지나치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 나태함을 꾸짖는 알싸함과, 상실감을 감싸주는 포근함을 동시에 주는 묘한 바람이다. 미뤄둔 빨래를 처리하러 빨래방으로 향했던 며칠 전 새벽, 나는 가을 밤바람을 한껏 맞았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나는 원래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휴대폰을 꺼내 몇 장의 사진을 찍어봤지만 모든 감흥이 고스란히 담기
모든 남자는 원래 나쁜 남자다. 단지 단 한사람에게만 무던히 착해지려 노력할 뿐. 나는 지금 카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미진이와 헤어지기 며칠 전 방문했던 카페다. 딱히 그녀가 그립진 않았지만 조금은 애틋한 기분이 들어 휴대폰의 사진첩을 열어봤다. 지울 수 없었던 사진들이 이젠 꽤 많이 사라진 상태다. 확실히 미련도 희미해졌다. 남아 있는 사진 속, 미진이와 함께 웃고 있는 나를 봐도 더는 슬프지 않다. ‘내가 다시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함도 사라지고 없다. 마치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
너를 바꾸기 위해 너와 벌이는 싸움보다는, 나를 바꾸기 위한 나와의 싸움을 이기는 게 행복한 연애의 지름길 여성들은 남성들과의 싸움을 답답해한다. 싸움 그 자체가 일종의 감정소통과정이 될 수 있다는 걸 남성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임쯤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도무지 이길 수가 없는 게임이란 생각이 들 경우엔 일단 사과부터 하며 그저 싸움을 피하려고 든다. 이때 ‘내 이야길 들어 달라.’는 소통을 거절당한 일부 여성들에게선 ‘내 이야기를 듣도록 만들어야겠다.’는 투쟁심이 발휘되고, 그렇게 싸
그럴 수도 있는 일과 그러면 안 되는 일. 그 사소한 견해차가 결국 이별의 원인이 된다. 미진이와의 연애는 거의 동거수준이 돼버렸다. 난 주중의 이틀정도와 대부분의 주말아침을 미진이의 오피스텔에서 맞이했다. 일상을 함께 하며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그녀는 집에선 늘 TV를 켜놓는다는 것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것, 잠을 청할 땐 늘 한쪽 다리를 내 무릎에 올려놓는 것과 코를 조금 곤다는 것, 가끔씩 입을 벌리고 자는데 그 모습이 갓난아기 같이 참 예쁘다는 것, 샴푸를 사용하고 뚜껑을 닫지 않는다는 것과 이틀에 한번
희생을 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희생을 제대로 인지하는 게 사랑이다. 연애는 남자를 성장시킨다. 맛집 정보의 획득은 성장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그녀의 만족을 위해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레스토랑과 그곳의 메뉴들을 습득해 나간다. 이곳, 애견을 동반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미진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강아지들이 보는 앞에서 파스타를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연애를 한 지 세 달쯤 흘렀을까. 당시의 난 ‘어떻게 해야 그녀가 좀 더 즐겁게 웃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래라 여겼던 건, 그저 내게 남은 미련일 뿐이었다. '몇 번째 데이트에서 사귀자는 얘길 할까요' 라는 상담이 많다. 이건 '얼마나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게 좋을까요' 라는 것만큼이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연애에는 정해진 룰이 없다. 그러니 왕도도 없고 정답도 없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므로, 타인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본인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 시작하면 된다. 굳이 요즘연애의 평균추세를 대답해야 한다면, 세 번째 만남에서 시작하는 연인들이 많다고 얘기할 순 있겠다. 이들은 첫 번째 만남에서 상대방
당신이 슬픈 건 더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다. ‘먼저’ 사랑에 빠져서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의 첫 인상은 달콤하다. 실은 맵고, 짜고, 눈물 나게 쓰고, 심지어 썩어버리기까지 하는 알맹이를 감추고 있음에도 불변의 달콤함만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첫눈에 반하는 건 위험하다. 달콤함에 취해 오감을 상실해 버리고선 이런 환상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완전해. 이번 사랑은 황홀할거야. 우린 분명 그렇게 만들어 나갈 수 있어!’ 공사다망한 연애과정을 거치며 천천히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적당한 불순물을
내 이름은 조태희. 직업은 연애칼럼니스트다. 내겐 하루에도 수십 건의 연애상담이 들어오는데, 그 다양한 형태의 질문들은 대부분 ‘어떻게?’ 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상처를 덜 받는지, 어떻게 이별을 극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를 사랑해야할지.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 할 수 있는지.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대답은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왜 연애를 시작할 수 없는지, 왜 상처를 남들보다 더 받는 건지, 왜 이별을 극복하기 힘든지. 왜 나는 그를 사랑하는지. 왜 나는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