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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변태적인, 그렇기에 누구보다 부러운 -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by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한 건 ‘육시랄’ 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논술 특강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육시랄’의 어원을 설명해주셨다. ‘육시’(戮屍)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시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관을 쪼개고 목을 베는 형벌이다. ‘육시를 할’의 형태가 축약되면서 ‘육실할’의 형태로, 다시 자연스러운 발음을 위해 ‘육시랄’로 변형됐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욕들은 성적인 욕도 있지만 죽음이나 형벌등과 관련해있기 때문에 서양의 욕들보다 훨씬 세련됐다고 역설하셨다. 어원에 대한 강의 시간이 아니었고, ‘육시랄’은 강의의 흥미를 돋우는 에피소드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시간 어원을 훑는 과정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성향은 죽 이어졌다. 고등학생 때 국어선생님은 항상 나에게 너무 한 문장에 집중하지 말 것을, 나무보다는 숲을 봐야한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나는 지금도 한 단어, 한 문장에 꽂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다.

변태적인, 그렇기에 누구보다 부러운
피터 길리버가 입을 열었다. ”저는 ‘run’을 수정했지요.“ 그는 조용히 말하고, 미소 지었다. ”아홉 달이 걸렸습니다.“ - 220 쪽

“그 날이 사전 편찬자로 일하면서 제일 짜릿했던 하루였어요.” (중략) 남들이 보면 우습다 생각할 것이다. 그깟 ‘a’를 두고 웬 소동이람! 이렇게 작은 단어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아무리 야단을 부려도 이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208 ~ 209 쪽

세상에는 저런 사람들도 있다. 한 단어의 의미를 위해 아홉 달이라는 시간을 소요하고, ‘a’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에서 일의 보람을 느끼는. 아니, 저걸 일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나? ‘짜릿’함을 느꼈다는 건 일의 보람이라기보다 인간적인 만족에 더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서술자가 ‘슈프라흐게퓔’이라고 표현하는 언어에 대한 감각. 그 감각의 만족이 주는 어떤 것이다. 저런 의미가 사전에 추가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표현하던 대로 말하고 쓸 것이다. ‘a’ 만큼 흔한 단어에 새로운 정의가 추가된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 사전을 뒤적거릴 리 없다. 이런 사실을 사전편찬자들도 알고 있다. 그들은 그저 단어와 의미를 생각하는 과정자체를 흠모하는 것이다. 그들은 변태가 확실하다.

“이상하게도, 나는 정의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불완전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의란 특정한 관습들을 이용해 어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고, 이때 단어의 의미와 정의는 구별됩니다. 의미는 단어 안에 사는 것이고 정의는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죠. 정의는 인공적이에요.” - 185 쪽

영어는 성장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산다. 바르고, 건강한 일이다. - 81 쪽

‘irregardless’는 단지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하는 정지된 단어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성장해가는 힘 있는 언어의 예시였다. - 101 쪽

그들의 변태적인 행위는 단순하지 않다. 언어는 말 그대로 살아있다. 사전편찬자들은 그 성장을 부지런히 따라가면서 단어가 쓰이는 최대한 많은 경우를 모으고, 그 경우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여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한다 한들 ‘명확한’ 정의는 단어의 의미와는 또 달라진다. 사전에서 찾은 단어가 내가 말할 때 쓰던 그 단어와는 뭔가 거리감이 있다고 느껴본 적 있지 않나? 책에서 얘기했듯, 정의는 인공적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언어는 살아있고, 사전의 정의는 그것을 예쁘게 꾸며 누군가가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여전하다.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책에서 꼭 하나 씩 마음에 드는 문장을 기억해놓기도 하고, 시를 읽는 방법은 모르지만 그 시 안에서 새롭게 쓰인 단어나 인상 깊은 구절을 되새기면서 그 이면의 의미를 더듬어가는 과정은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단어들은 나에게서 나오기도, 나를 이루기도 한다. 나의 언어는 곧 나를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누구보다 단어와 의미를 사랑하고, 좁은 책상 앞에서 한 단어의 의미를 위해 뇌를 쥐어짜는 일이 부럽기도 한 것이다.

변태적인, 그렇기에 누구보다 부러운
“저는 그냥 영어를 사랑해요” 말이 불쑥 나왔다. “영어를 사랑해요. 정말, 정말 사랑해요.” -22 쪽
변태적인, 그렇기에 누구보다 부러운

김마루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