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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애완견 대신 개미핥기를 산책시키던 화가가 있다고? - 살바도르 달리

by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20세기의 대관종남, 살바도르 달리

‘나’브랜드 자기PR의 시대

자기 PR이 스펙이 되는 시대라고들 말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개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있다. 과거에는 자기자랑하는 사람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었던 행동들이 이제는 그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 이상 관종(‘관심 종자’의 줄임말)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은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오늘 20세기 최고의 관종남을 소개하려 한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영화 제작자, 살바도르 달리다.

20세기 최고의 관종남, 살바도르 달리

1904~1989 스페인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사실에 최고의 희열을 느낀다.”

뾰족한 프링글스 모양의 수염, 오버스러울 정도로 동그랗게 뜬 커다란 눈. 과장돼 보이는 몸짓, 희극배우처럼 보이는 이 남자는 <기억의 지속>이라는 명작을 탄생시킨 화가이다. 어린 시절부터 담비 망토와 왕관을 쓰고 당당히 여장을 하고 다녔으며, 10대가 되자 어른 행세를 하기 위해 파이프를 피우고 넥타이핀을 꼽고 다닌 달리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에는 상당한 멋쟁이로 통했다고 하는데 길게 기른 구레나룻, 롱 코트, 스타킹 등을 매칭하여 화려한 패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선보였다. 1927년부터는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모방하여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독특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였는데 훗날 이 수염은 달리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람에도 흩날리지 않고 고정되는 이 한껏 멋부린듯한 수염이 사실은 물엿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관계로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들끓은 개미들에 시달려야 했다고. 참고로 달리는 여분의 수염을 담뱃갑에 항상 챙겨 가지고 다녔는데, 사람들을 마주칠때마다 “수염 하실래요?”라고 권유하며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즐겼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매번 멋쩍어 했지만 달리는 그 반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세웠다고 하니 4차원을 넘어선 5차원의 성격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할듯 하다.

애완견 대신 개미핥기를 산책시키다

“나의 꿈은 내가 되는 것이다.”

달리가 프랑스 파리에 방문했을 적 많은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 사건이 있었다. 지하 계단에서 올라오는 그가 특이한 동물 두 마리를 끈으로 묶어 산책 시키는 모습이 촬영된 것. 달리와 함께 길을 걷던 그 동물은 바로 개미핥기였다. “상상은 자유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라는 그의 말버릇이 현실화된 순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척 즐기며 뽐내듯이 걸어갔을 그의 표정이 쉽게 상상이 된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맹수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개미핥기를 길들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 모습 역시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순간의 이슈와 주목을 위해 다양한 기행을 일삼던 남자.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 중 하나인 셈이다.


훗날 그는 오셀롯이라는 고양이과 포유류를 키우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 동물은 살아있는 옵아트!’(기하학적, 추상적 무늬와 색상이 반복되어 표현된 추상미술로 주로 원형이 빼곡히 박힌 형태가 많다.)라며 감탄하며 거의 모든 공식석상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오셀롯은 나름 무시무시한 맹수에 속한다)


그 외에도 1936년 런던의 국제 초현실주의 전람회에 잠수복과 헬맷 그리고 당구채로 치장하고서 러시아 사냥개 2마리와 함께 등장해 강연한 일 역시 역대급 기행으로 꼽힌다. 하지만 잠수복이 밀폐되면서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았고, 점점 숨이 막혀온 달리는 결국 관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끝에 구출될 수 있었다.

잘난척 하는 사람? 아니, 자신의 가치를 아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

또 다른 유명 일화 중 하나는 달리가 자신의 친구들을 최고급 레스토랑에 잔뜩 초대했던 날의 일이다. 맛있는 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난 달리는 식당 측에 금액을 지불하는 대신 종이 뒤에 자신의 그림을 그려 건네주었다.


자신의 그림이 이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는데, 근거 없는 자만감은 아니었던 게 그 당시 그는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고.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기행이 더 멀리 알려지게 된 것은 물론이다.

츄파춥스 로고를 만들다

달리는 우리가 오늘날 즐겨먹는 사탕, 츄파춥스의 로고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1969년 지인이었던 츄파춥스 사장 베르나트의 로고 고민을 들은 달리가 티타임 도중 냅킨 위에 바로 스케치를 해서 건네준 것이 오늘날의 츄파춥스 로고가 되었다. (로고를 옆면이 아닌 정수리 부분으로 올려달라는 정확한 지시도 함께)


즉석에서 디자인된 것치고는 너무도 깔끔하고 직관적인 형태였기에 베르나트는 이 로고가 마음에 쏙 들었으며,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고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달리가 디자인한 사탕이라는 이름 덕에 한동안 달리 전시회가 열리는 날은 샵에서 츄파춥스가 함께 대량으로 판매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미술 교과서 속의 살바도르 달리

앞서 언급한 <기억의 지속> 역시 생각 외로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그림이다.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한 번쯤 다들 시계가 액체처럼 흐느적거리는 형태로 늘어져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기억의 지속>으로 무의식의 공간인 꿈속에 나타난 잠재적 욕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듯이 그의 그림은 입체파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환각과 정밀한 사실을 편집광적으로 연출한 표현이 특징이다. 기인에 가까운 심리 상태를 가진 작가로도 회고되는데, 오늘날 봐도 파격적인 이 그림은 당대에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외에도 많은 그림들이 형태와 공간을 무시한 채 꿈꾸는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파격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오늘날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이 바로 달리이다.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다

“세상은 나를 우러러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경멸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일생이 언제나 행복한 일만 가득 찼던 것은 아니다.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화려한 모습 뒷편에는 위장염으로 어린 시절 사망하여 본인에게 이름을 물려준 형의 그늘에 갇혀 애정결핍에 시달렸던 일(그는 자신은 죽은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어린 시절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한 아버지 등 굴곡 많은 가정사 탓에 부유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초를 겪으며 자라야 했다.


"내 어머니보다, 내 아버지보다, 피카소보다도… 그리고 심지어, 돈보다, 갈라를 더욱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게 만든 운명적인 여인인 갈라는 유부녀였으며, 달리의 연인이 된 이후에도 40세나 어린 남성들과의 불륜을 일삼으며 그를 괴롭게 하는 등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일들을 겪어야 했다.


노년에는 중풍과 노인성 치매 증상을 겪다 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화상을 입기도 하는 등 그의 일생은 끊임없는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대체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으며, 본인의 가치를 아는 진정한 참사람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볼거리와 웃음, 그리고 감동을 주고 떠난 그야말로 본받을 만한 진정한 스타가 아니었을까. 많은 일들을 극복하고 언제나 당당하려 노력했던 그의 행보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전수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