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여행

민중의 간절함,
예술로 승화하다

by아시아투데이

'기록문화의 보고' 경남 합천

내달 3일까지 합천기록문화축제

아시아투데이

국난을 극복하려는 고려 민중의 간절함이 빚어낸 팔만대장경. 차곡하게 쌓인 모습은 종교적 의미를 초월해 예술이 됐다.

경남 합천 가야면 가야산(1430m) 기슭의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에서 2019 합천기록문화축제(11월 3일까지)가 한창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주제로 이를 지켜온 고려 민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세계기록문화유산의 가치를 곱씹어보자는 취지의 행사다. 너무 친숙해서 대강 지나칠 수 있지만 팔만대장경은 결코 예사롭지 않은 문화유산이다. 한 번쯤은 천천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는 해인사 들머리에 있다.

아시아투데이

‘법보종찰’ 해인사의 가을.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모아 놓은 것이다. 팔만대장경에는 석가모니가 해탈한 후 부처가 되는 길을 설법한 8만4000법문이 들어있다. 인간의 8만4000 번뇌를 해소하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은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에 보관돼 있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유산’ 두 개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다. 장경판전은 출입이 금지돼 있다. 살창을 통해 흘깃 볼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건물 바깥에서 차곡하게 쌓인 경판들을 상상해야 한다.

아시아투데이

해인사 장경판전 옆에 전시된 팔만대장경 경판 모형.

상상을 풍성하게 만들 정보 몇 가지. 일단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원래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고려시대 때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 경판 수가 8만여개에 달해 ‘팔만대장경’으로 불린다. 공식적인 경판 숫자에 대한 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장경판전 안내판에는 8만1350개라고 소개한다. 경판 한 개의 크기는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 3.6cm). 무게는 약 3.5kg이다. 경판 한 개에 약 640자씩 쓰여 있으니 총 약 5200만자가 쓰여 있는 셈이다. 이를 이용해 경전을 찍으면 약 6800권이 된다. 해인사의 한 스님은 “이를 꼼꼼하게 다 읽으려면 전문가라도 하루 8시간씩 투자해 30년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감이 오지 않는다면 산술적으로만 따져보자. 경판을 가로로 죽 늘어 놓으면 길이가 약 57km에 달하는데 이는 서울에서 경기도 오산까지 거리와 맞먹는다. 판판하게 눕혀서 쌓아 올리면 높이가 약 2.93km로 백두산(약 2750m)보다 높다. 총 무게는 285톤에 달한다. 해인사가 ‘법보종찰’로, 합천이 ‘기록문화의 보고’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팔만대장경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수천만 개의 글자가 오자나 탈자가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공을 들여 새겼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작 기간만 16년이나 걸렸단다.

아시아투데이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해인사 장경판전.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장경판전은 세계문화유산이다.

무엇이 이토록 간절했을까. 팔만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인 1011년에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해 간행됐다. 이때 대장경을 초조대장경이라고 한다. 이후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소실됐다. 1251년 항몽의지를 담아 새로 편찬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이를 초조대장경과 구분하기 위해 재조대장경이라고 한다. 지금 한창인 합천기록문화축제는 2011년 초조대장경 간행 1000년을 기념해 열린 대장경세계문화축전에서 비롯됐다. 어쨌든 당시 고려 민중들이 경판에 새긴 것은 단순한 불경이 아니었다. 국난 극복 의지와 화평한 ‘그날’에 대한 희망을 혼신을 다해 글자에 담았다. 차곡하게 쌓인 경판들이 애틋하고 또 아름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은 이미 종교를 초월해 예술이 됐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본 판이라는 것. 팔만대장경은 원래 인천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되다가 1399년 해인사로 옮겨졌다. 이때부터만 따져도 무려 600여년간 훼손이 없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장경판전 때문이다. 장경판전은 남북으로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수다라장과 법보전, 동서로는 해인사 고려각판을 보관하고 있는 동·서 사간판전 등 4채의 건물로 이뤄졌다.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인의 지혜가 숨어 있다.

아시아투데이

해인사 장경판전 외벽의 살창. 공기의 흐름을 원할히 하기 위해 상단과 하단의 살창 크기를 달리 한 것이 눈에 띈다.

장경판전 외벽 앞면과 뒷면에는 각각 상단과 하단에 살창이 있다. 살창의 크기는 벽마다 다르다. 앞면의 살창은 아래쪽의 것이 크고 위쪽이 작다. 뒷면은 반대다. 이는 공기의 흐름과 관련 있다. 건조한 공기가 건물 내부에 골고루 퍼진 후 외부로 잘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살창의 방향과 크기는 시간에 따라 햇빛의 양을 조절하기도 한다. 경판을 넣어두는 판가와 경판의 배치 역시 온도와 습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구조다. 총 5단으로 된 판가 각 단에 조밀하게 배열된 경판과 경판의 틈새가 일종의 ‘굴뚝 효과’를 낸다. 이 때문에 경판 표면의 온도, 습도가 조절된다. 장경판전은 이처럼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도록 만들어졌다. 팔만대장경이 수백년간 변치 않은 이유다.

아시아투데이

2019 합천기록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 합천군 제공

장경판전 출입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합천기록문화축제의 주무대인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에서는 팔만대장경을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이 위대한 기록유산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볼 수 있고 가상현실(VR)이나 5차원(5D) 영상으로 접할 수도 있다. 팔만대장경을 옮기는 이운행렬 체험이나 고려복식 체험도 가능하다.

아시아투데이

홍류동 계곡의 가을 풍경.

여기에 축제와 함께 가을 서정을 만끽할 수 있는 여정 몇 곳을 추가한다. ‘합천관광 1번지’는 해인사다. 사찰 들머리의 홍류동 계곡은 단풍이 고운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에서 해인사 들머리까지 이어진 계곡이 홍류동이다. 단풍이 너무 붉어서 이것이 투영된 계곡 물마저 붉게 보인다고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을 따라 약 6km에 걸쳐 ‘해인사 소리길’이 이어진다. 이 가운데 신라 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수도했다는 농산정에서 장쾌한 물줄기가 인상적인 낙화담까지 약 2km의 구간이 백미다.


해인사에도 단풍이 내려앉고 있다. 몇몇 암자를 연계하면 고즈넉한 산책이 가능하다. 해인사 서쪽에 위치한 지족암, 희랑대, 백련암은 조붓한 숲길로 연결된다. 지족암과 희랑대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 된 화엄종의 고승 희랑대사가 수행한 곳. 백련암은 성철 스님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해인사 동쪽으로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 해인사보다 더 오래된 원당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인 용성스님을 위해 창건한 용탑선원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두 코스 각각 1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본다.

아시아투데이

황매산 억새군락지

아시아투데이

황매산 억새군락지

단풍과 함께 가을의 전령으로 통하는 억새도 합천에서 볼 수 있다. 대병면과 가회면에 걸쳐 솟은 황매산(1108m)이다. 자동차로 억새군락지가 있는 정상부까지 갈 수 있어 구경이 편하다.


여행 팁 하나 추가하면, 합천시티투어가 운영 중이다. KTX김천구미역과 해인사를 비롯한 합천 주요 관광지를 연결하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KTX와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합천까지 2시간20분 만에 닿을 수 있다. 그리 멀지 않다.


글·사진 김성환 기자 kshwan@as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