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는 윌리를 찾아서

[컬처]by 계란비누

한 푼 짜리 인생, 윌리 로먼의 하루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그럼 뭘 기억해야 하지?”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라 삶이 반드시 마주해야 할 일부분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죽음 앞에 있는 세일즈맨의 삶이 궁금해진 까닭도 같은 이유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주인공인 세일즈맨 윌리는 죽음을 보고 삶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평생 보험료를 내기 위해 돈을 벌었다. 자신의 위상이 흔들린다고 느낄 때는 화려한 장례식을 상상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는 흡사 죽음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25년동안 주택 할부금을 갚으려 일을 계속 했지만 정작 온전히 그의 것이 된 집에서 그는 하루도 살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끊임없이 준비만 하며 사는 현재의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는 윌리를 찾아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미국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아서 밀러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태숙 연출가가 각색을 맡았다. 회색 시대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구조 밖으로 밀려난 세일즈맨 윌리. 삶과 죽음조차 그가 속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윌리는 홀로 견딜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고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손을 행주 삼아 식탁을 닦아내는 무던한 아내가 있었다. 긍지와 자랑으로 분신처럼 키운 두 아들과 함께 힘겹게 마련한 집에 터전을 꾸렸다. 가족들이 그에게 좋은 남편, 최고의 아빠라고 부르던 시절에 윌리는 그 말에 기대어 삶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가족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관계의 뿌리는 조금씩 말라갔다.

 

사회와 맺고 있던 커다란 뿌리는 젊은 사장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가차없이 잘려나갔다. “사장한테 소리를 지르다니, 미쳤네 미쳤어.”라고 읖조리면서 윌리는 처음으로 스스로 미쳤다고 인정한다. 자신을 삼켜버릴 자본주의에 얽매인 눈 먼 자아였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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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시절의 로먼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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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 윌리와 사장 하워드

이타주의자의 살과 위선자의 피

극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은 아버지 윌리와 아들 비프의 관계다. 윌리는 막차를 잡아탄 사람처럼 계속해서 비프를 닦달한다. 마치 한 번 내리면 더 이상 기차를 탈 수 없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인다. 애초에 다른 기차를 타고 싶었던 비프는 아버지의 성화에 내리지도, 좌석에 남아있지도 못하고 아슬아슬한 주행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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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프가 내뱉는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퍼진다. 비프 또한 담배 연기처럼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동생 해피와 그저 허황된 이야기를 떠벌릴 뿐이다.

 ‘이타주의자의 살을 할퀴면 위선자의 피가 흐른다(마이클 기셀린)’라는 말이 있다. 윌리는 자신이 한 행동이 모두 비프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비프는 끝내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다. 아버지 윌리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비프는 윌리를 가르켜 말한다. “아버지는 자기 찌꺼기를 토해내는 위선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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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비프 로먼과 아버지 윌리 로먼

“난 세일즈맨이야.”

윌리는 마지막 남은 자존감으로 울부짓듯이 말한다. 나는 세일즈맨이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내야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울부짖음을 들어줄 귀가 없다. 되려 스스로 낙오자가 되었음을 드러낼까봐 이 땅의 윌리들은 숨죽이고 살고 있다. 한태숙 연출은 세상의 모순을 극중 곳곳에 배치했다. 생전 윌리의 장담과 달리 썰렁하기만 한 장례식도 그 중 하나이다. 그를 조문하러 올 거라는 각지의 유명 인사들 대신 숨죽이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만 있을 뿐이다.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 된다. 우리는 끝까지 뒤집어 지지 않을 ‘살자’를 외칠 수 있을까. 윌리역을 맡은 배우 손진환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남아있는 시간을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윌리가 생의 마지막으로 한 선택이 결국 틀린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윌리가 우리에게 권하는 마지막 세일즈 아닐까.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는 윌리를 찾아서

숨죽이라고 말하는 듯한 윌리

글 계란비누

201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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