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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닌텐도 라보. 즐거움은 화면 밖에 있음을 알려주는 골판지

by김국현

닌텐도 라보. 즐거움은 화면 밖에 있

초등학생만 되어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와이파이 잘 잡힌다는 건물 앞 계단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게임을 한다. 아이들은 전자오락을 알기 전 누구나 소꿉놀이를 했을 것이다. 전자오락이 없던 시절 아이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플라스틱이 흔해지기 전 장난감은 귀한 것이었다. 나무나 양철처럼 비싸고 무거운 재료 대신 플라스틱이 장난감의 표준이 되기 전, 대중화의 역할을 자처한 것은 딱딱한 종이였다. 한국전쟁 후 급속히 발달하게 된 딱딱한 종이 생산. 아이들의 장난감 문화에 소재 혁명과 같은 일이었다. 서양의 우유뚜껑놀이(Milk Caps)에서부터 우리 80년대 문방구의 둥근 딱지까지 서민 자제들의 놀이 문화에서 종이는 빠질 수 없었다.

 

지금도 마분지나 특히 골판지 한 장에 아이들의 상상력만 곁들인다면 할 수 없는 놀이란 없다. 큼지막한 택배 박스 하나라도 생기는 날, 그곳은 아이에게 궁전이 되고 요새가 된다.

 

골판지에서 즐거움의 원점을 찾는 IT 회사들도 있다. 구글의 카드보드(골판지) VR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VR이란 비싸지도 어렵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임을 즐겁게 공작하면서 깨닫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 골판지를 들고 돌아온 진짜 괴짜 회사가 있다.

 

상상력 충만한 게임회사 닌텐도다.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Switch)의 확장 키트라 할 수 있는 닌텐도 라보(Labo) 안에는 게임 소프트웨어 외에 골판지 여러 장이 들어 있다. 이 골판지를 뜯어내 부품 삼아 조립하게 되는데, 마치 21세기의 소꿉이 되려는 듯, 자질구레한 일상용품이 가득하여 골판지로 피아노, 낚싯대, 로봇 수트 등을 만들게 된다. 완성된 모형에 스위치의 컨트롤러 ‘조이콘(Joy-Con’을 끼워 넣으면, 컨트롤러의 센서가 이들 모형의 움직임을 인지해 움직이면서 게임을 즐기게 되는 것.

 

닌텐도 스위치는 작년을 풍미한 히트 상품이다. 출시 9개월 만에 천만 대 돌파라는 실적은 닌텐도 자신을 포함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대히트였고, 심각한 물량부족으로 팔 물건이 동나는 일이 허다했다. 스마트폰을 누구나 들고 다니는 이 시대에 갑자기 무슨 휴대용 콘솔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휴대용 게임기의 화면을 컨트롤러와 분리하고 다시 거실의 TV와도 연계해 활동 공간을 넓히니, 게임은 혼자 틀어박혀서 얼굴을 파묻고 즐기는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사회적 시선을 떨어낼 수 있었다. 놀이는 스크린 화면 밖에서도,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간 전체에서 즐기는 것이라는 역발상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분리된 컨트롤러에 집어넣은 센서와 진동 모터 덕에 컨트롤러는 이제 입력뿐만 아니라 출력의 역할도 하게 된다.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바퀴도 없는 리모컨 카가 타이어 대신 컨트롤러의 진동을 활용하여 다리를 떨며 전진한다.

 

이제 이 발상의 전환은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골판지로 만들어진 저 피아노가 어떻게 연주를 한다는거지?’ 이런 궁금증은 아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가지게 된다. (힌트는 피아노에 삽입되는 컨트롤러에 IR 카메라가 탑재되어 있다는 사실.)

 

만들고(make), 즐기고(play), 깨닫는(discover) 놀이의 절차 그대로가 닌텐도 라보의 캐치프레이즈다. 조립해서 즐기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고, 이 놀이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 얼개를 배워간다. 움직임 감지나 적외선 카메라 같은 센서의 조합과 그 기술적 구조까지 배움의 도구가 되니 놀이는 어느새 학습이 된다.

 

그런데 가격이 70~90달러이니 싸지가 않다. 종이의 제조 원가를 생각하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런데 비싸다는 기준은 무엇이었나? 이 가격에는 소프트웨어도 들어 있기에 그 가격을 소프트웨어 가격으로 치고, 종이는 포장재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종이란 허접스러운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골판지라도 좋아한다. 꾸미고 낙서도 하고 무엇보다 마음껏 성형할 수 있는 그 평면을.

 

종이는 언젠가 때가 타고 문드러진다. 그렇게 망가지고 나면 물론 새로 사달라는 아이도 있겠지만, 종이니까 직접 만들어봐야지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기크(geek)의 싹은 아끼는 것이 망가졌을 때 취하는 자세에서 피어난다.

 

놀이는 자연스레 과학 교육의 발판이 된다. 만약 플랫폼이 오픈된다면, 그래서 깃헙(github) 등에 각종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설계도가 공개되고, 누구나 이 라보(Labo)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수많은 택배상자, 피자박스, 귤상자 등에 오려낼 수 있는 선이 인쇄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게임실황 대신 골판지를 오리고 고무줄로 묶는 언니 오빠들이 초등학생의 유튜브를 점령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면 이 풍경, 바로 실세계가 게임의 세계로 단숨에 확장해 버린 세계, 가상·증강·혼합현실이라 불리는 세계의 풍경 아니었던가. 모두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뒤집어쓰는 헤드셋 개발에만 여념이 없었지만, 닌텐도는 골판지 몇 장으로 이 미래의 풍경을 제안해버렸다.

 

이 풍경을 뒤로하고는 그 누구도 게임이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힘들어져 버린다. 게임기마저 갑자기 지능개발 도구로 보이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을 흔들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다.

 

이 골판지 소식 후 닌텐도 주가가 오른 것은 물론, 일본 내 골판지 제지업체의 주가도 들썩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