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테크놀로지 만세.

[테크]by 김국현
빈티지 테크놀로지 만세.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받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흔히 빈티지라 부른다. 특정 지역 특정 연도의 포도주를 뜻했던 빈티지. 그 어떤 생산연도의 와인이 극상의 대박이었음을 나타냈다. 이제 사람들은 꼭 포도주가 아니더라도 물건에는 빈티지 이어(year)가 있어 그 시대를 반영하는 명품이 나오기도 한다고 믿게 된다. 이에는 조건이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한 일품이어야 한다는 점. 그렇지 않으면 그냥 고물이나 쓰레기일 뿐이니까.


예컨대 빈티지 데님(진)이라고 하면 한국전쟁 전후로 만들어진 리바이스 501 등 제품들, 빈티지 카라고 하면 대공황 이전에 만들어진 차량을 일컫기도 했을 정도로 빈티지는 오래전부터 다방면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는 IT에서는 참 어려운 일이다. 전자제품은 시대가 바뀌면 바로 구형 퇴물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사실 빈티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본질적 기능이 일단 완성되어야 한다. 포도주는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만들어졌다. 청바지의 기능성은 서부개척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클래식 카도 지금의 차에 비해 굴러가는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컴퓨터는 그렇지 못하다. 1980년대의 술도 차도 보존 상태만 좋다면 지금도 명작이 될 수 있지만, 컴퓨터나 폰 만큼은 그럴 수 없다. 무어의 법칙에 따라 18개월마다 성능이 정말 두 배가 된다면 무조건 신상을 찾는 것이 남는 장사다. 내년 제품이 절대적으로 더 좋은 것이 확실한 IT 제품 특유의 숙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독한 술과 빠른 차가 무조건 명품은 아니듯이 IT 또한 성능 이외에도 다른 개성적 기호를 자극하는 무엇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최근 하드웨어의 성장 가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칩은 여전히 매년 적당히 빨라지고는 있지만 사용자가 느끼는 사용성은 그저 조금씩 더 개선될 뿐이다. 5년 전 PC도 5년 전 폰도 아직 쓸만하다. 그래서인지 애플의 iOS는 5년 전 구형폰까지 업그레이드 지원 대상을 넓혔다. 지금까지는 일 년 묵은 속도와 성능조차 참을 수 없었기에 신제품만을 갈망해 왔다면, 이제는 좋은 제품은 어느 정도 묵혀도 쓸만한 성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실 소프트웨어에서는 이미 빈티지는 트렌드다. 예컨대 8비트 게임은 훌륭한 빈티지다. 울티마나 드래곤퀘스트 등 어쩌면 게임으로서의 서사적 완성은 그 시절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그 분위기, 그 세계관을 잊지 못해 ‘고전게임’을 수집하고 아카이브 룸 등 나만의 비밀기지를 방 한 켠에 마련하기도 한다. 좋았던 그 시절로 시간 여행한 듯한 기분에 빠지게 만드는 빈티지의 마력. 디지털에도 어엿한 빈티지 문화가 살아 있다. 소설 및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그 시절 빈티지로의 집착적 헌사가 작품이 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빈티지의 매력을 모방하고자 새것을 헌것처럼 만드는 ‘빈티지 스타일’이 게임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일부러 8비트 느낌을 내려고 픽셀아트를 하고, 음악을 8비트 풍으로 만드는 칩튠(Chiptune)이 서브컬처를 형성했다.


비즈니스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도 빈티지가 있다. COBOL 프로그램은 풍미 좋은 빈티지다. 수없이 차세대 프로젝트로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 해보지만, 역시 비즈니스 프로그램은 코볼로 짜야 제맛이라는 듯 업무의 정수만을 업무만을 위한 언어로 녹여내 왔다. 똑같은 효용을 더 작은 자원을 써서 이뤄내는 간결한 미니멀리즘의 원점은 그것이 게임이든 업무이든 빈티지로 승화된다.


옛날이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는 과거지향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좋은 것은 이미 과거에 다 만들어졌다는 왕년 주의는 위험한 발상이다. 추억팔이는 게다가 편리하기에 남용이 쉽다.

섣불리 빈티지 만세를 읊다가 골동품이 되고 말 수도 있다. 골동품에는 빈티지와는 반대로 쓸모없이 묵어버린 사람이란 뜻도 있음을 잊기 쉽다.


이런 리스크를 아는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지금을 우리 미래의 빈티지 연도로 만드는 일이다. 지금 우리 일상의 일과 작품에서 빈티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일 수도 있다. 인생은 짧다. 초침은 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미래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빈티지는 가르쳐 준다.


이런 자세를 가지며 늙어야 “에이징(Aging)” 잘된 인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빈티지에는 특정인의 행동이나 발언이 너무나도 그다울 때, ‘빈티지 아무개’라고 하면 그의 최고걸작 버전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은 한 해 ‘빈티지 여러분’을 꼭 찾기를 바라며.

201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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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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