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테크 ]

과잉 연결 시대, 디지털 격차의 역설

by김국현

과잉 연결 시대, 디지털 격차의 역설

한국에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대규모의 사회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실험 대상은 이 IT 강국의 ‘디지털 네이티브’들. 초고속 인터넷으로 탄탄히 연결된 스크린을 현실만큼이나 많이 보고 자란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커 나갈까? 누구도 답을 지니고 있지 않은 그 미지의 미래를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스크린 속 가상 세상에 과몰입한 나머지 눈앞 현실의 가족 친지에게 무심해지는 모습에 열불이 나는 부모들의 모습이 공식 과목이 되어 버린 코딩에 우왕좌왕 어떻게든 학원 교육이라도 시키려고 애쓰는 모습과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의 조사이지만 가계수익이 높을수록 유년기의 스크린 타임은 줄어든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인종별로도 백인이 흑인이나 히스패닉보다 스크린을 훨씬 덜 보며 지내고 있었다. 빈부격차에 따라 스크린 타임이 달라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디지털 디바이드’인 시대다. 인터넷 디바이스를 갖지 못해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원조 디지털 디바이드의 걱정과는 달리 가난하고 지칠수록 아이를 스크린 속에 방치하고 있다. 풍요의 디지털 시대다.

 

실리콘벨리에서도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도 IT 리터러시가 높은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의 스크린 타임에는 꽤나 엄격하다. 오히려 IT에 익숙지 않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유모로 쓰고 있다. IT 업계 종사자들이 신기술로부터 차단된 사립학교에 보내려 한다는 것이 한때 뉴스가 된 적이 있었다. IT 혁신의 당사자들일수록 자신들이 관여한 서비스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유저를 빠져들게 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첨단의 UI·UX, 최신유행의 그로스 해킹에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라면 무방비로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본인들은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자녀들은 피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게 음식을 가족에게는 먹이지 않는 점주가 된 듯한 미묘한 기분일 것이다. 카톡, 유튜브, 페이스북 등등 어른들조차 스스로를 통제 못하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우리는 ‘초연결세상’ 등등 용어를 만들어내며 과잉 연결을 칭송하고는 하나, 인간은 이런 식으로 진하게 연결된 채 살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고독과 프라이버시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임을 알아 가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일이었다. 때로는 지루한 일상의 심심함과 무료함. 또는 기성 세대가 만든 틀의 답답함이 아이를 어른이 되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성장을 통해 외로움의 가치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할 소중한 시기, 수시로 알림창이 뜨며 찰나적 흥분과 초조함과 후회를 주입하는 스마트폰은 인류의 진화 속도를 애초에 앞서버렸다.

 

지금 중년이 된 이들 중에는 과거의 성공 체험을 회고하며 나도 ‘국민학교’ 시절부터 컴퓨터를 했다고 자랑할지 모르겠지만, 8비트 컴퓨터는 충분히 불편했다. 충분한 불편함은 오히려 창의력을 불러온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겠다는 패기라도 생겨나니까. 하지만 지금과 같은 과잉연결 콘텐츠 풍요의 시대에는 소비만으로도 급급하고, 그러한 충분한 불편함이 스며들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요즈음 밀레니얼 세대는 컴퓨터의 디렉토리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블라인드 타이핑도 어려워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PC적 상식과 교양은 스마트폰에서는 필요 없는 일이라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점점 생산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신호다. 대중이 키보드보다 화면을 쓸어 넘기는 일에만 익숙해지면 생산은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도 있다.

 

20세기의 과학 소년은 최신형 라디오를 뜯어보고 그 원리를 알 수 있었고, 8비트/16비트 컴퓨터를 어른들보다 더 잘 다룰 수도 있었다. 단순했던 시대의 축복이었다. 그렇게 생산이 놀이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지금의 최첨단 고도소비사회는 좀처럼 허락하고 있지 않다.

 

정보의 소비와 생산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는 점, 지금 손에 들린 도구가 무엇에 특화된 것인지 부모도 사회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산의 전제가 될 수 있는 답답함과 고독을 아이들이 스스로 키우게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쓸쓸한 외로움이 가져다주는 생산의 욕구를 우리가 방해해 온 것은 아닌지 미래 세대를 위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