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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IT 강국의 품격 이탈리아 편

내리막길에서도 감성 있게,
인생은 즐거우니까.

by김국현

내리막길에서도 감성 있게, 인생은 즐

최근 이탈리아는 유럽연합의 말썽꾸러기다. 포퓰리스트 정권들이 연이어 집권하더니, 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10년째 살아날 줄 모른다. 실업률, 특히 청년 실업률은 최악인 데다, 지역 격차도 극심하다. GDP 대비 부채율은 그리스 다음으로 심각하다. 심지어 어떤 나라처럼 다리마저 무너졌다. 무디스 신용 등급은 투기 등급에서 겨우 한 단계 위다.


이런 이탈리아지만, 실은 숨겨진 IT 강국이었다. 남북의 격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북이탈리아의 공업기반은 IT에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올리베티(Olivetti)라는 브랜드는 20세기에 컴퓨터를 했던 이들이라면 기억할 '이탈리아 감성' 그대로의 컴퓨터 회사였다. 지금 봐도 세련된 타자기를 만든 곳으로 유명한데, 실은 세계최초의 데스크탑 전자 계산기 ‘프로그래마 101’가 이곳의 작품이었다. 이 시절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한 물리학도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페데리코 패긴(Federico Faggin).


우여곡절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텔 4004 프로세서를 설계한 장본인이다. 4비트 4004가 8비트 8008을 거쳐 16비트 8086으로 진화해 가는 스토리는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하자. 또한, 페데리코는 8비트 키즈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Z80을 만든 자일로그(Zilog)사의 창업자이니, 우리가 이탈리안 과학자에게 신세 진 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뿐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문화는 사람과의 인터페이스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아름다움이야 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사회가 숭상하니, 감성 하나로 고가를 받는 '메이드 인 이태리'의 디자인 능력이 발휘된다. 기호와 취향을 존중하며 생활양식을 한 땀 한 땀 리드하는 이태리 장인의 능력은 디자인과 제조업을 융합하게 하니 이탈리아 상품이 21세기에 언제든 다시 터져도 이상할 일이 없다.


제3의 이탈리아라고도 불리는 북이탈리아의 지역 산업 시스템은 여러 전문적 강소기업들이 모여 수평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강한 산업 경쟁력을 만들어내 왔다. 역사적으로도 각 지방은 밀라노나 로마에 의존하지 않고 해외와 직접 거래를 트고 정보 수집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그 덕에 선진국 중에서도 유난히 소기업 비율 높아 종업원 9인 이하가 기업 수 전체 94.8%에 달한다. 독보적 아이폰 부품 조달로 유명해진 일본의 전자부품기업 무라타는 이탈리아의 종업원 12명짜리 작은 회사를 인수했다. 이런 알짜 소기업이 자생하고 또 그 매력을 세계로 어필할 수 있다는 점이 이탈리아다운 일이다.


이탈리아 스타트업의 반절은 IT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가 해외로 떠나려 하고 있다. (영어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도심 곳곳에 영어학원 광고가 보이는 것은 독일이나 프랑스와도 사뭇 다른 풍경이다.) 재정위기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탈리아의 문화를 바꿀 수는 없다는 자괴감이 커서일 수도 있다. 지역을 우선시하고 축재(蓄財)는 죄라는 카톨릭 교회의 문화가 남아 있다 보니, 고만고만한 상태로 머무르게 되는 것을 못 견디는 이들도 있을 터이다. 이탈리아 최대 제조기업 피아트는 세르비아로 생산기지를 옮기더니 본사마저 네덜란드로 옮겨 버렸다. 페데리코도 이제는 미국 시민이다.


그러나 괜찮다. 세상은 아름다우니까. 대신 이탈리아는 외국인이 창업하기 좋은 곳이 되고 싶어 한다. 그 덕인지 외국인이 설립하고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IoT 기업 솔레어(Solair)가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성공적으로 매각되는 등 이래저래 돌아간다.


경제는 암울하고, 국정은 파탄 나고, 실업률은 높아, 되는 일 하나 없지만 그래도 낙천적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인생을 구가하다니, 라틴족의 원점답다. 그렇게 만들어진 느리게 흐르는 시간, 풍성한 문화는 관광객을 부르니 남는 장사인 듯싶다.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5.8명이지만 이탈리아는 5.7명으로 OECD 평균 11.6명을 크게 밑돈다. 유럽 최저수준의 생산성으로 빈축을 사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보다 시간당 노동생산성도 1인당 GDP도 높다. 우리는 스펙 쌓느라 야근으로 고생하느라 놀지도 못하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만, 내리막길에서 인생과 문화를 만끽하는 이탈리아인보다도 효율이 낮으니, 참 우리도 불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