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나라 박경림의 고통이 이 정도였다면

[컬처]by 한겨레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다시, 스물>로 본 열악한 제작환경

<뉴 논스톱> 배우들 당시 고통 고백

인기 누릴 여유도 없이 혹사당해

예산 없어 팬카페서 엑스트라 충원


주당 최대 68시간제 도입됐지만

제작현장 그다지 나아진 것 없어

하루 20시간씩 밤샘촬영도 여전


방송사 ‘턴키계약’도 개선 안돼

현실 모르는 정부는 엉뚱한 조치

제작현장 환경개선에 힘 실어야

장나라 박경림의 고통이  이 정도였다

“<뉴 논스톱>을 하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웃으며 식탁 너머 김정화를 바라보던 박경림은 일순 무너진 둑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문화방송 <뉴 논스톱>(2000~2002)을 찍을 무렵의 자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던 김정화가 웃으며 덤덤하게 털어놓은 고백 때문이었다. “언니 오빠들이 다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게 잘하지? 나는 되게 어렵게 어렵게 이걸 지금 하고 있는 건데?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고….” 16년 넘게 묻어두었던 속내를 듣게 된 충격과, 함께 일하던 동료가 그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는 자책이 뒤섞인 울음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박경림에게도 과로를 이기며 무리하게 <뉴 논스톱>을 촬영하던 중 쓰러졌던 경험이 있다. 방금 전까지 팔짝팔짝 뛰며 활발하게 대사를 읊던 사람이 갑자기 전원이 나가듯 픽 하고 선 채로 쓰러지는 자료화면은 지금 다시 봐도 간담이 서늘하다.


문화방송이 <뉴 논스톱> 종영 16년 만에 선보인 <엠비시 스페셜―청춘다큐 다시, 스물>은 박경림이 그 시절을 함께했던 동료들을 만나 당시를 회고하는 내용으로 꾸려졌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푸르른 청춘이 가까이에서 보면 온통 멍들어 시퍼렇기 일쑤인 것처럼, <다시, 스물>은 그 찬란했던 시절이 사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고백하는 목소리로 빼곡하다.

혹사당하는 배우와 스태프

대부분의 한국 시트콤이 그렇듯 <뉴 논스톱> 또한 주말을 제외하면 휴지기 없이 주 5일 방영하던 작품이었고, 그 노동을 보상할 만큼 좋은 제작환경을 갖춘 현장도 아니었다. 연출을 담당했던 <문화방송> 김민식 피디의 회고에 따르면, <뉴 논스톱>의 제작환경은 엑스트라 50명을 기용할 예산이 없었던 탓에 제작진이 팬카페에 촬영 안내문을 올리며 팬들에게 엑스트라로 나와줄 것을 요청해야 할 만큼 열악했다. 이런 환경이었으니 출연하는 이들이라고 충분한 복지와 보상을 누리며 일했을 리 없다. 양동근은 그 시절을 오로지 자아를 누른 채 기계처럼 주어진 캐릭터를 분석하고 연기하는 것에만 몰두하느라 병들고 지쳐가던 시기로 기억했고, 장나라 역시 웃으며 그 시절을 회고하던 중 도저히 일이 끝날 줄 모르는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경험을 들려줬다.


동시대를 살았고 <뉴 논스톱>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라면, 멤버들의 고백과 박경림의 울음을 보며 울컥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소속사와 매니저의 전문적인 관리를 받으며 카메라와 대중의 시야 앞에 서는 연예인들조차 죽을 것 같은 감정을 예사로 느끼는 현장이었다니. 그렇다면 대중의 눈 밖,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이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더 안 좋지 않았을까? 절대 “배우보다는 스태프들이 더 힘들었을 테니 엄살 피우지 말라” 같은 고생 올림픽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그간 언제든지 토크쇼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던 연예인들의 고통도 알지 못했다.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드러난 고통이 이 정도인데, 더 깊은 곳에 누적된 고통은 도대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이야기다.


그 시절 스태프들이 겪은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뉴 논스톱> 종영 16년이 지난 2018년 지금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스태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장에서 생생한 증언들이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폭염에서도 평균 20시간씩 일하고 1~2시간, 길게는 3시간 자고 나온다. 중간에 하루 쉬는 휴일은 그날 새벽까지 촬영이 진행되기 때문에 쉬는 게 아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2일은 쉬더니 최근에는 8일 촬영하고 하루 쉬는 스케줄이 나오고 있다.” “요 며칠 쪽잠 1시간을 자고 연달아 출근을 하다 보니 코피가 나는 코를 부여잡고 눈물만 나네요. 드라마 스태프는 사람이 아닙니까? 제작부의 갑질에 아무 말도 못하는 염전 노예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올해 제작된 드라마인 티브이엔 <나인룸>과 <아는 와이프> 제작 현장에서 제보된 내용이다. 고 이한빛 피디의 유지를 계승하며 출범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공개한 현장 스태프들의 고통은,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 만큼 참혹하다.


현장에서의 오랜 문제 제기 끝에 지난 7월1일 방송가에도 주당 최대 노동시간 68시간이 도입되었지만, 현장 상황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미디어비평지 <미디어 오늘>이 제작하는 인터넷방송 <방송국 놈들>에 출연한 김두영 희망연대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은, 주당 68시간이라는 상한선을 3~4일의 일정에 끼워 맞춰 해석해 여전히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밤샘촬영을 진행하는 현장이 비일비재하다고 밝혔다. 그나마 그와 같은 사례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68시간을 맞추려는 성의라도 보인 사례에 가깝다. 정부가 노동시간 단축을 위반하더라도 향후 6개월간은 단속과 처벌을 유예하기로 결정한 탓에, 여전히 일주일에 5~6일씩 하루 18시간 이상 노동을 강행하는 제작사가 많은 것이다.


추혜선 정의당 의원실에 도착한 에스비에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제작 스태프의 제보를 보자. 7월1일부터 6일까지 5일간 노동시간은 98시간50분에 이른다. 특히나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구간의 일정은 가히 살인적이다. “7월6일 오전 6시20분 촬영 시작. 다음날 새벽 5시50분까지 23시간30분 촬영. 인근 사우나에서 씻고 두 시간도 못 쉬고 오전 7시30분 촬영 재개.”


방송가의 가장 고질적인 관행인 ‘턴키 계약’ 또한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턴키 계약은 방송사가 제작 스태프 개개인과 개별적인 고용계약을 맺는 대신 조명팀이나 녹음팀 등의 감독급 스태프와 통째로 도급계약을 맺는 형식의 계약을 말한다. 상세 노동시간이나 세부 급여 항목 등의 용역료 산정 기준을 명시하지 않은 채 뭉뚱그려 총액으로 계산하는 턴키 계약은, 방송사가 져야 할 책임을 감추고 제작비 절감을 하기 쉬운 방식의 계약이다. 개별 스태프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책임은 자연스레 턴키 계약을 맺은 감독급 스태프에게 돌아가고, 방송사는 시간당 상세 급여 대신 총액으로 계약을 했으니 현장에서 몇 시간을 돌려도 책임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고용노동부는 최근 실제적 사용자인 방송사와 제작사 대신 원치 않는 턴키 계약 방식을 강요당해온 감독급 스태프들을 사용자로 간주해 주의조치를 했다. 현장에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정부는 여전히 현실을 모른다.

장나라 박경림의 고통이  이 정도였다

제작환경 개선에 나서야

최근 논란이 된 드라마 촬영 스태프들의 갑질 또한 이런 열악한 제작환경의 산물이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촬영 중이니 물러서라”고 요구하고, 동선을 줄이겠다고 개인 사업장 앞에 무단으로 스태프 차량을 주차하는 등의 행동은 분명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잘못이다. 그러나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느라 당장 눈앞의 업무에만 허덕이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스태프들이 이처럼 타인의 편익을 무심하게 침해하는 일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당장 내가 23시간30분을 연속으로 노동한 탓에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마당이라면, 타인의 편익과 권리를 고려할 정신을 챙기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 아닌가.


다시 <뉴 논스톱>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인기의 단맛을 즐길 틈도 없이 혹사당했던 시절을 회고하는 <다시, 스물>의 배우들을 보면,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 말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조금은 울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방송 콘텐츠 제작 현장의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때다. 제작 스태프들이 충분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보장받고 대우받으며 일을 하는 현장이라면, 자연스레 밤샘촬영이나 디졸브 촬영(새벽에 촬영을 끝낸 뒤 아침 일찍 촬영을 시작하는 방식)이 어려워진다. 카메라 뒤에 선 스태프들이 받는 혜택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카메라 앞에 서는 배우들 또한 수혜를 입는다. 조명기구를 들고 카메라를 잡고 음향기계를 만지는 스태프들이 일손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배우들끼리만 촬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2018.10.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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