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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알고 보니 더 재미있네
‘사은품 변천사’

by한겨레

‘사은’ 개념 60년대 말 본격 등장


조미료, 비누 등 제공에서 시작


과당 경쟁에 승용차 경품까지 나와


고가 사은품 제한 법령 제정되기도


‘품격’ 표방 도서상품권 인기 뒤에선


콘돔 제공 청바지업체 대박 사례


천편일률적 ‘물품’으로 관심 못 끌자


맞춤형 VCR테이프 제작 ‘서비스’까지


똑똑해진 소비자들 ‘미끼용’은 외면


환경·이미지 앞세운 에코백 등 인기


잘 만든 사은품은 돈 주고도 찾아


공짜에서 판매용으로 신분 상승


사은품은 공짜? 무조건 효과?


판매품 가격에 제작비 반영돼


소수 혜택 위해 다수 웃돈 내는 셈


“부적절한 경우 구매욕 약화” 연구도

한겨레

“30년 가까이 조미료를 써온 소비자로서 한마디 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1992년 7월 <한겨레신문> ‘국민기자석’ 코너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 실렸다. 넉달 전 조미료업체에 사은권을 보냈는데, 사은품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불만이었다. 이 독자는 “꼭 사은품에 욕심 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소비자에게 ‘사은’을 약속한 이상 지켜야 할 게 아닌가”라고 엄히 꾸짖었다.


1980~90년대 신문 독자투고는 사은품 관련 불만이 단골 소재였다. 사은행사에 대한 소비자의 기대와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사은품은 때로 ‘밤샘 대기’ 진풍경까지 낳았지만, 품질이 낮거나 수량이 부족한 물품을 내놓은 기업은 영락없이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 ‘사은’과 ‘배은’ 사이 어딘가에서 이어져온 판촉물의 역사를 짚어본다.

한겨레

생필품부터 ‘나심품’까지


국내 기업들이 사은품 개념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것은 1960년대 말이다. 처음엔 조미료 등 식료품과 비누·치약 등 생활필수품이 많았다. 1980년대엔 아이스크림 속 우표부터 그릇세트까지, 사은품이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 연말연시 ‘시즌성’ 사은품도 쏟아졌다. 4000만 국민이 ‘1인 1달력’을 가진 시대였다.


이때부터 유통업체들은 회원고객에게 전시회 초대권을 주는 방식으로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판촉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은품 가격대는 점점 높아졌다. 휴대전화, 냉장고, 승용차 등 고가 경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1989년엔 롯데햄우유가 ‘하와이 여행권’으로 화제 몰이를 했다. 국외여행 자율화 덕분이었다. 제품가격의 10%가 넘는 사은품 증정을 제한하는 법령이 만들어질 정도로 과당 경쟁이 벌어졌지만, 값비싼 경품과 사은품은 계속 쏟아져나왔다.


물건보다는 현금성 유가증권이 인기였다. 1990년대 ‘히트’ 사은품은 각종 상품권. 1975년 과소비 억제 조치로 폐지된 도서상품권이 1991년 부활했다. ‘품격 있다’는 이유로 날개 돋친 듯 나갔다. 비누를 상품권으로 바꿔달라는 신문 독자 투고도 등장했다. “헌혈의 고귀함에 부응하는 사은품은 아무래도 책일 것 같다. 도서상품권으로 정착시켰으면 한다.”(<ㄷ일보>, 1993년 5월2일 ‘독자의 편지’) 대한적십자사가 이 글을 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90년대 말부터 ‘헌혈 사은품=도서상품권’은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사은품은 질적으로도 ‘진화’했다. 구매력이 향상될수록 소비자들은 천편일률적인 시제품따위에 시큰둥했다. 결혼식 사진을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주는 등 ‘맞춤형’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이른바 ‘나심품’(나의 심리 만족을 위한 사은품)의 효시라고 할 법하다. ‘민망한’ 사은품도 등장했다. 태승트레이딩은 1996년 ‘닉스’ 청바지 사은품으로 콘돔을 내밀었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는데 “청소년에게 올바른 (성) 지식을 알려줘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 업체는 한동안 청바지 시장을 주름잡았다.


공동사은품과 부록패션


1997년 외환위기의 그림자는 길고 짙었다. 생필품이 사은품 목록에 다시 올랐고, 기업들이 뭉쳤다. 음반회사가 머리영양크림 등 ‘헤어제품’ 광고를 전단에 넣어주면, 화장품 회사는 음반 구매 사은품으로 헤어제품을 주는 식이었다. 판촉비는 줄지만, 고객층은 넓어져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효과가 있었다.


2000년대 들어 경기가 회복되고 주5일 근무제까지 뿌리내리면서 레저·웰빙용품 등을 중심으로 판촉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2002년 월드컵 등 스포츠 행사 땐 ‘160명 사은품 증정’(16강 진출 기념) 등 시끌벅적한 숫자 마케팅도 나왔다. 구매금액별로 사은품을 쪼개서 주는 차등화 전략도 선보였다.


영리한 기업은 ‘기민한’ 소비자를 낳았다. 영수증을 모아오면 상품권을 주는 행사 탓에 무턱대고 타인에게 영수증을 요청하는 ‘영수증 수집족’이 등장했고, 사은품으로 받은 액세서리로 온몸을 치장한 시민이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른바 ‘부록 패션’이었다.


‘감시의 눈’ 키운 소비자


사은품은 소비자운동 발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소비자들은 질 낮은 사은품을 내놓거나 증정 약속을 어긴 기업을 질타했다. 한국부인회,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등 민간단체가 선봉에 섰다. 한 소비자단체는 1982년 사은품 증정을 안한 식품업체를 소매상인과 손잡고 231차례나 고발해 화제를 모았다.


1990년대 ‘플라스틱 제로’ 등 환경운동도 소비자들 손끝에서 태동했다. 소비자단체들은 식품·화장품 업체들부터 플라스틱 사은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동네 목욕탕에서 샴푸·린스도 추방했다. 유통업체들도 소비자 요구에 발맞췄다. 스티로폼 상자를 반납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매장에 오는 고객에게 사은품을 증정했다.


1990년 유통시장이 개방되면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국산 농산물 돕기에 발벗고 나선 것도 소비자단체였다. 이들은 기업 사은품으로 공산품이나 수입품 대신 ‘우리 농산물’을 활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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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몸통을 흔들다’


2016년 경품 총액을 제한하는 고시가 폐지됐다. 일부 업체는 아파트 분양권, 외제차 등을 경품으로 내걸었지만 열기는 예전만 못하다. 청탁금지법 시행으로 과한 선물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은 게 한몫했다는 평가다.


요즘 업계에서는 ‘이미지’와 ‘환경’을 내세워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를 충족시키는 데 더 집중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확산으로 디자인을 중시하고, 플라스틱 등 환경 유해 제품 사용을 줄이는 추세에 따라서다. 2010년대 중반부터 에코백과 텀블러 등 사은품이 인기를 끈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굿즈 사러 갔더니 책이 같이 배송됐다.” 잘 만든 사은품이 판매품 인기를 추월하기도 한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은 책갈피, 독서대 등에 그치던 책 사은품을 책베개, 마우스용 손목쿠션 등으로 다변화했다. 마일리지가 차감되는 방식이라 완전 무료는 아닌데도, 각종 일러스트와 ‘셜록’ 등 유명 캐릭터를 앞세운 제품으로 재미를 봤다. 2013년 1977억원 수준이던 연매출은 지난해 3563억원으로 2배가량(영업이익 68억원→167억원) 늘었다. 스타벅스도 비슷한 사례다. 단골 소비자들은 연말 한정판 플래너를 구하려고 17잔을 채우는 데 사활을 건다. 두 업체는 일부 굿즈 상품을 판매용으로도 내놨다.


물론 사은품은 공짜가 아니다. 판촉비용으로 분류돼 가격 책정 시 반영된다. 거칠게 말하면, 소수에게 돌아갈 사은품을 위해 모두 웃돈을 내고 있는 셈이다. 사은품이 항상 고객 유인 효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2013년 계간 <광고학연구>에 실린 보고서 ‘기업의 사은품 제공이 소비자의 내재적 동기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에 관한 연구’(김지윤·이정교)를 보면, 제품과 관련성 높은 사은품은 오히려 구매 동기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은품 때문에 돈을 쓰는 데 거부감이 생길 수 있어서다. 충성도 유발을 위해선 ‘덜 노골적인’ 사은품이 나을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


노골적인 ‘미끼’는 거부하는 ‘스마트’ 소비자와 이에 발맞춰 더 똑똑해지려는 기업. 사은품을 두고 형성돼온 이 오랜 애증 관계는 더더욱 복잡하게 얽혀들어가고 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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