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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결혼을 할까요? 옷이 점점 더러워져서 말이죠”

by한겨레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1. 엘리자베스 키스, ‘함흥의 어느 주부’

한겨레

10월이다. 이제 늦더위 타령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여름이 갔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나에게 여름이란 엄청난 양의 빨래 더미가 쏟아지는 계절과 다름없기에, 이때쯤엔 저절로 ‘해방 노예’의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한창 땀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으니 더 그렇다. 마치 눈이 펑펑 내리는데 눈을 쓸고 있는 느낌이랄까. 세탁기가 있어도 이 모양으로 허덕이는데 옛날에는 어땠을지…. 옛사람들의 기록이 있어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다.


“남편들이 계속 흰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냄새나는 하천에서, 궁궐 후문의 우물에서,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물웅덩이에서, 아니 주택 밖 실오라기만한 개울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다.”

한겨레

1894~1897년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은 1898년에 펴낸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비숍뿐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우리네 빨래 문화에 많이 놀랐던 것 같다. 1919년에 입국해 한국의 풍속을 다양한 목판화로 남긴 영국의 판화 작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도 그중 한명이다.


키스는 함경도 함흥시에 방문했다가 한 젊은 여성의 수채 초상을 남겼다. 1946년에 펴낸 화집 <올드 코리아>에 수록된 ‘함흥의 어느 주부’가 그것. 손가락에 하얀 옥가락지 두개를 낀 것으로 보아 그녀는 얼마 전 결혼을 한 새댁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빛에서 새댁 특유의 싱그러움을 찾을 수 없다. 햇빛 가리개용 머릿수건을 풀어헤친 뒤, 자기 머리보다 큰 함지박을 정수리에 얹은 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기란 어려웠을 터. 젖은 빨래를 한아름 담은 무거운 함지박을 손으로 잡지도 않은 채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키스는 무척 신기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연민의 감정도 있었을 것 같다. 키스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어떤 노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함지박 속 방망이를 손에 쥔 채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억척스럽게 빨래를 두드리고 주무르고 문질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집에 돌아가 빨래를 말린 후 다듬이질도 밤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듬이질의 고됨은 악명이 높았다. 여성들의 손목은 매일 부었고 심지어 손가락이 휠 정도였다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중노동을 거의 매일 수행해야 했다는 사실. 당시 남성들은 하얀 두루마기에 하얀 바지만 입었던 터라 세탁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탁은 오로지 여자들 몫이라는 사실에 키스는 부조리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동생인 엘스펫 키스에게 보낸 편지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는 외국인 댁의 남자 하인이 최근에 상처(喪妻)를 했어. 그런데 몇주 뒤 그 사내가 안주인에게 가서는 ‘진실이(여자 하인 이름)가 저랑 결혼을 할까요? 옷이 점점 더러워져서 말입니다. 이걸 빨 때가 됐으니 치다꺼리해줄 여자가 꼭 필요한뎁쇼’ 하더래. 그러곤 둘이 결혼을 했다지 뭐니! 한국에서는 옷을 깨끗이 빠는 일이 곧 부인을 얻는 일인가 봐!”


키스 자매가 우리 문화 뒷담화(?)를 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런데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듯싶다. 여성들이 옷을 깔끔하게 입고 한끼 자기 손으로 잘 차려 먹으면 주위에서 “야무지네. 결혼해도 되겠어!”라는 소리가 나온다. 반면 남자는 다림질 안 한 와이셔츠를 입거나, 배달 음식 혹은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면 “아이고, 결혼해야겠네!”라는 말을 듣는다. 이쯤 되면 대놓고 여성들을 향해 ‘가부장제의 일개미’로 살라는 얘기 아닐까? 요즘 여성들이 비혼 선언하는 게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